"어이, 어린이. 다 왔다니까. 내려."
차가 학교 앞에 도착했는데도, 현민은 내릴 생각을 않는다. 손을 덜덜 떨고있는 현민을 보며 동민은 살짝 미소짓는다. 많이 무섭구나, 어린이.
막상 자퇴하려니까 현민은 몹시 두려워졌다. 윤선에게 문자 하나로 통보하듯 알린 자퇴는, 현민의 전화기를 끊임없이 정현의 전화로 울리게 했다. 또 앞으로 어떡할거냐는 정문의 카톡으로도 핸드폰은 쉴 새가 없었다. 핸드폰이 수시로 반짝이는 것을 보면서, 현민은 자기가 과연 이제까지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이라야 말이지. 당장 내일, 이전과는 180도 다른 인생을 나는 살 수 있을까? 학교를 안 다니면서, 난 과연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성공적으로 살 수 있을까?
"어린아."
"................"
"오현민."
낮은 목소리로 동민이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자, 현민은 갖은 걱정과 상념에서 퍼뜩 벗어난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은 동민을 바라본다. 동민은 운전대에서 손을 떼고는 현민의 어깨를 살며시 잡는다. 용기를 북돋아주려는 듯이 살짝 흔든다.
"할 수 있어. 힘내서 다녀와, 너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형."
"처음 게이 골목에 혼자 왔었던 용기는 어디갔대."
현민이 울멍한 눈으로 바라보자, 동민은 씩 웃으며 현민의 볼을 살짝 꼬집는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얼른 다녀와. 빨리 갔다와서 맛있는거 먹으러 가자. 동민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자, 현민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저 다녀올게요, 라며 현민은 드디어 차를 박차고 나간다. 언제 크나, 저거. 동민은 운전대에 기대어 현민이 학교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빤히 바라본다.
현민이 교무실로 들어오자, 담임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쉰다. 왔구나, 너. 현민은 담임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담임의 옆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는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담임은 낮은 목소리로 현민에게 묻는다.
"진짜 자퇴할거냐?"
"........어떻게 아셨어요?"
"아침에 어머니한테 연락왔어. 니 의견을 존중하시겠다는구나. 아들이 이상한 길로 들어서는데 존중이라, 나는 참 이해가 안 돼."
"이해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래, 써라, 써. 자, 자퇴서 여기 있다."
담임은 현민과 싸울 마음이 없어 보인다. 어제 소동으로 인해, 담임은 현민과 말싸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래그래, 소동이나 벌이지 말고 나가라. 게이가 학교에 있으면 안 좋은 소문만 파다하지. 그럼 나가는 게 제일 이득 아니겠는가. 스스로 나가겠다는데 굳이 말려서 뭐 해. 담임이 순순히 건넨 자퇴서를 잡고 현민은 재빠르게 글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다른 선생들은 두 사람의 눈치만 보는 가운데, 교무실 안은 시계 초침소리와 현민이 연필로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가득하다. 그렇게 한참을 써내려갔을까, 현민은 담임에게 자퇴서를 휙 내민다. 담임은 대충 종이를 훑어보더니, 파리라도 쫓듯 손을 휙휙 내젓는다. 그래, 어서 나가라. 담임이 말에, 현민은 아쉬움 하나 없이 몸을 홱 돌려 교무실 문을 벌컥 열었다.
".............."
수업 시간인데, 창엽은 혼자 복도에 서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다 보며 인상을 찌푸리다, 교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창엽이 후다닥 고개를 든다. 뭐야, 선생인가!! 그러나 곧 나오는 사람이 현민인 것을 알고, 창엽은 더더욱 있는 힘껏 인상을 구긴다. 너였냐.
". 그 난리를 치고 학교에 오고 싶냐?"
"꺼져."
"너나 꺼져."
".........안 그래도 꺼진다, 지금 자퇴했어."
현민의 말에 창엽은 픽, 웃는다. 게이가 선택할 루트가 사라지는 것 밖에 더 있겠냐. 이참에 아예 죽어버리지 그래. 그러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거잖아. 창엽이 빈정거리자, 현민은 이를 악 문다. 생각해보니,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이 곳에서 나간다. 그런데 남의 비밀을 까발리고 일을 저질러버린 가해자는 이 곳에 남아, 피해자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본다. 이 얼마나 웃긴 상황인가. 현민은 화가 치밀어오르기 시작한다. 창엽은 그러거나 말거나, 삐딱하게 서서 현민을 위아래로 훑는다.
"야, 이제 너 꺼지니까 최정문은 내가 먹어도 되냐?"
"뭐?"
"넌 줘도 못 먹는 여자 아니냐. 이제 너가 꺼지니까 내ㄱ........"
말은 다 이어질 수 없었다. 현민이 주먹을 쥐고 다시 창엽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창엽의 볼에 현민의 주먹이 꽂힌다.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창엽은 뒤로 넘어진다. 현민은 창엽이 넘어지자 바로 창엽의 배를 걷어차기 시작한다. 마치 어제 창엽이 현민에게 그랬던 것처럼, 현민은 분노를 실어 더욱 강하게 걷어차기 시작한다.
"아악!! 미, 친, 아아악!!!!!!!!"
"다른 사람 건들지마. 특히 정문이는, 정문이는 절대, 절대 안 돼."
"아아악!!!!!!!! 살려줘!!!!!!!!! 아악!!!!!!!!!!!"
창엽이 걷어차이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교무실 문이 열리고, 담임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빠끔 내민다. 그러다 현민이 창엽을 있는 힘껏 걷어차는 광경을 보고, 아연실색한다. 담임이 달려들어 현민을 밀친다. 현민은 신나게 창엽의 배를 걷어차다가, 떠밀려나 숨을 몰아쉰다. 씩씩 대며 창엽을 감싸고 있는 담임을 내려다본다. 담임은 화를 벌컥 낸다. 그런 변태 성도착증으로도 모자라, 사람 패는 것까지 할 셈이야!!!!!!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저보다 게이 같네요."
"........뭐?"
"더러워."
현민은 어제처럼 둘에게 중지손가락을 들어보인다. 엿이나 드셔.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빠르게 내려간다. 평소의 현민 같으면 전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요새 현민은 하고 있다. 나 이래도 괜찮은 걸까 싶은 현민은 아까처럼 손이 덜덜 떨린다. 창엽을 팰 때 느꼈던 이상한 흥분상태도 가시지가 않는다. 계단을 뛰어내려가면서, 현민의 숨은 점점 거칠어진다.
동민은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다가, 현민이 저 멀리서 학교 건물을 빠져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라디오를 끈다. 그런데 현민의 표정이 좋지 않다. 지나치게 빠른 발걸음도, 꽉 쥔 두 주먹도 어딘가 현민이 긴장하고 있는 것 같다. 아까는 그냥 겁이 난 상태였는데, 지금은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거지? 동민은 차 문을 벌컥 열고 조수석에 다급하게 타는 현민을 빤히 바라본다. 현민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덜덜 떨고 있다. 어린이, 무슨 일이야. 동민은 현민을 부른다. 그러자 현민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동민을 천천히 바라본다.
"나오는 길에, 최창엽 패고 왔어요."
"그게 누군데."
"나, 아웃팅시키고, 팬 애. 엿같은 말 하길래, 막 때리고............ 형, 요즘 내가 나 같지가 않은데, 나 좀 무서워요."
아, 이거구나. 싶은 동민은 가만히 미소를 짓는다. 그동안 얌전하고 조용하게 살았던 오현민은 지금의 질풍노도 같은 하루하루가 무서우리만큼 낯설겠지. 이제서야 낯설다는 걸 알아차린거냐. 어려서 그런가 둔하구나. 동민은 손가락이 새하얘질정도로 강하게 쥔 현민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손가락을 하나씩 펴준다. 손톱에 손바닥 베이겠다, 라는 부드러운 말과 함꼐. 현민은 멍하게 동민을 바라본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다 편 동민은 현민과 손을 잡고 깍지를 낀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잘 찾고 있잖아. 스스로를 위해서는 강한 태도를 가져야지. 새로운 길이라 낯설고 무서운거야."
".....나 잘하고 있어요?"
"응, 나처럼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평타 이상이지."
이와중에 잘난 척은. 현민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자, 동민은 입꼬리를 늘려 활짝 웃어보인다. 이제야 좀 기분이 괜찮아지냐? 장난스럽게 웃으며 동민이 차에 시동을 걸자, 현민은 가만히 동민을 바라본다. 동민은 조수석 쪽 창문을 반쯤 내려준다.
"너 아직은 기운이 안 나는 것 같으니까, 바람이라도 쐬면서 기분 풀어."
"......................."
"점심은 내가 좋은데 데려가줄게. 거기 진짜 맛있더라."
내가 진짜 처음 가봤을때는 꿈에 나오더라니까? 맛이 진짜 죽여줘! 동민은 뭐가 신이 났는지,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한 톤 높아져있다. 현민은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신이 났나 생각해보다가, 픽 웃는다. 나 기분 풀어주려고 이러는구나.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오늘은 나 때문에 이런 것도 다 하네. 동민의 이런 노력이 고마워, 현민의 기분은 한층 좋아진다. 현민이 살며시 미소짓자, 동민은 현민의 손을 기어스틱 위에 놓더니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놓는다. 바람이 현민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부드럽게 현민의 이마를 가른다. 현민은 눈을 돌려 창 밖을 바라본다. 완연한 가을이라, 하늘이 새파랗고 깨끗하다. 놀러가는데 안성맞춤인 날씨다. 현민에게 있어, 오늘 하루는 그 어떤 날보다 최고의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런 데에서, 고급스러운 뷔페라니. 진호는 포크를 들어 음식을 뒤적거린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사람을 바라본다. 요환은 우물거리며 스테이크를 먹다가, 진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흐흐, 하고 눈웃음을 지어 보인다.
이 저녁 약속을 먼저 잡은 것은 진호였다. 다짜고짜 요환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그깟거 못 먹을게 뭐가 있냐고. 한 번 먹자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러자 요환은 저녁 데이트에 신이 나, 제멋대로 서울 시내 제일 비싼 호텔 레스토랑 예약을 잡아 버렸다. 아니, 기껏해야 고깃집일 줄 알았는데.... 호텔 뷔페라고??????? 일인당 가격이 20만원이라는 것을 알고 진호는 뜨악해졌는데, 요환은 거기에 스테이크까지 시켜버렸다. 이 한 끼에 50이라니... 진호는 입을 떡 벌린다. 그러나 요환은 가격이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눈치다. 음식을 먹는 내내 헤실거리며 진호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아니, 이 사람아. 이런 비싼 음식에 집중을 하라구요.. 왜 자꾸 나만 봐.
"진호씨, 맛있죠? 여기가 서울에서 꼭 데이트 와봐야할 레스토랑으로 유명하거든요."
"아, 네, 맛은 있긴 한데... 제가 이런 곳이 사실 처음이라.. 저, 가격이 생각보다..."
"아이, 부담가시지 마세요! 제가 사는 거니까요! 제가 데이트 신청 했잖아요!"
....그것 참 감사하게도, 더욱 부담이 되는데요. 진호는 속으로 빈정거린다. 요환과 대화하는 내내, 진호는 이 사람과의 시간이 참 재미없다고 느꼈다. 그도 그럴것이, 항상 동민과 붙어다니면서 둘은 서로 티격태격만 했었다. 한 사람이 놀리면 상대방이 물어뜯고, 반대로 또 똑같이. 언제나 대화 패턴의 90프로 이상이 이랬었다. 그런데 요환은 진호가 무슨 말만하면 참 착하게도 미소를 지으며 그렇군요 진호씨. 맞아요 진호씨. 라며 동조를 할 뿐이었다. 농담을 건네도 받아치긴 커녕 하하하. 게다가 테이블에 앉을 때는, 요환이 진호의 의자를 살짝 빼 주었다. 여자를 대하듯이. 이건 뭐, 여자가 되어 젠틀한 외국 남자랑 선을 보는 기분이다. 진호는 따분해져서 고기 한 덩이를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는다. 그나저나 호텔 식당이라니, 그럼 다 먹고 나서는 호텔 올라가서 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진호는 씹던 고기를 꿀꺽 삼키고, 요환에게 말을 건다.
"콘돔은 뭐 쓰세요?"
".............네?"
"오늘 이 호텔에서 하는 거 아니에요?"
진호의 말에, 요환은 잠시 말을 하지 않는다. 빤히 진호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으며 당황스러운 듯 웃는다. 아니요, 저는 할 마음이 없어요. 요환의 말에 진호는 네? 라며 반문한다. 진호의 어리둥절한 반응에, 요환은 들고 있던 나이프와 포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두 팔꿈치를 식탁에 올려놓더니, 진호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진호는 요환의 얼굴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진호씨, 전 진호씨랑 그렇게 진도를 빨리 나가고 싶지 않아요."
"............."
"반한 지 얼마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차근차근 진호씨를 알아나가고 싶어요. 이 쪽 문화라는게, 상당히 진도가 빨리 나가기는 하지만. 전 진호씨랑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은 안 할겁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야해요. 이런 제 마음, 아시겠어요? 요환은 젠틀하게 웃어보인다. 그러나 진호는 이러한 요환의 말에 더욱 기분이 좋지 않다. 나랑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고? 내가 그렇게나 매력이 없나. 밥맛이 뚝 떨어져, 진호는 들고 있던 포크를 땡그랑 소리를 내며 접시 위에 내려놓는다. 요환은 빈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는 진호를 보더니, 배가 부르시구나! 라고 생각한다. 천성이 긍정적인 요환은 진호가 절대 자신을 마음에 안 들어할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호씨가 배부르시면, 슬슬 일어나죠! 제가 진호씨 집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요환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호는 그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심지어 지금 시간은 저녁 9시 30분. 집에 들어갈 시간이 절대 아닌데...?
"아, 지금요?"
"네! 진호씨 푹 쉬고 내일 출근하셔야죠. 먼저 나가계세요, 저 계산하고 나갈게요."
외모는 괜찮게 생겨서 한 번 밥이나 먹어볼랬더니만,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부담스럽고, 재미없다. 이 사람, 외모만 괜찮지 나랑 잘 안 맞는 것 같아. 이대로 집에 들어가기는 아쉬우니, 진호는 경훈이나 불러서 바에 갈까 생각한다. 그래서 요환이 계산하러 자신에게 멀어지자마자, 진호는 통화를 눌러 경훈에게 전화를 건다. 뚜르르 - 하는 소리가 3번 울리더니, 경훈이 받았다. 둘 사이에 인사도, 굳이 긴 말도 전혀 필요없었다.
"레드가넷, 10시 반."
- 오키. 누구누구?
"너랑 나. 준석이는 안 가잖아."
- 뭐, 그래. 이따 봐.
30초도 되지 않은 이 짧은 통화 하나로, 이후 스케줄이 정해져 진호는 만족스럽다. 핸드폰 액정을 끄면서, 진호는 문득 동민이 생각난다. 그나저나 지금 동민이 형은 뭐 하려나? 연락 한 번 없네. 진호는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으며, 메세지에 답장이 없는 동민이 미워진다. 그러나 몇 시간 후 진호는 동민에게 연락이 올 뿐만 아니라, 동민의 얼굴을 보게 되리라는 것을. 지금의 진호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 아응, 하아아.......경훈아........"
준석은 더욱 빠르게 속옷 안에 넣은 자신의 손을 움직인다. 눈을 감고, 그 날 밤을 떠올린다. 경훈이 강한 허릿짓으로 자신을 채우던 기억, 자신을 들어올려 허공에서 마구 박아대던 기억, 엎드린 자신을 찍어누르며 사정을 하던 경훈에 대한 기억까지. 준석은 경훈과의 뜨거운 섹스를 떠올리며 자기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입에서 걸러지지 않은 신음이 마구 튀어나오는 것을 보아, 곧 절정인 듯 하다. 준석은 그 날 귓가에 울리던 경훈의 목소리를 기억해낸다.
'하, 아으, 준석아, 예뻐. 아아....'
자신의 귓가에 뜨겁게 속삭이던 경훈의 목소리. 달뜬 숨을 뱉으며 내던, 그 낮은 소리. 그 목소리에 준석의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아아아!! 그리고 그 기억을 마지막으로, 준석은 사정한다. 손에 준석의 정액이 가득 묻어, 찐덕찐덕거린다. 으윽. 할 땐 좋았는데, 이렇게 뒷처리 할 때는 기분나쁘단 말이지. 준석은 가만히 손을 뻗어 옆에 놓인 물티슈를 꺼낸다. 그리고 손에 묻은 정액을 싸서 버려버린다. 속옷은 벗어서 빨래통에 넣는다. 방 안에 시큼한 정액냄새가 가득하다. 준석은 인상을 쓰며 새 속옷을 입고, 바지를 주워 입는다. 그리고는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드르륵 연다. 곧 차가운 밤 공기가 방 안에 맴돌기 시작한다. 하아... 준석은 한숨을 내쉰다.
경훈과 섹스를 하고 난 이후, 준석의 꿈에는 계속해서 경훈이 나왔다. 꿈 속에서 경훈은 준석에게 달콤하게 속삭였다. 하자, 준석아. 그리고 곧 둘은 나체가 되어, 열심히 몸을 섞었다. 준석은 신음하고, 경훈은 준석의 귓가에 야릇하게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 꿈을 꾸면서, 준석은 항상 파정을 하고는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무슨 중학생 남자애도 아니고, 몽정을 하다니. 오랜만의 이런 경험에, 준석은 부끄러웠다. 그런데 비단 꿈만이 아니었다. 준석은 자기 위로를 할 때마다, 경훈과 몸을 섞었던 침대에 누워 경훈을 기억하곤 했다. 갈 데까지 갔네, 이준석. 처음에 준석은 자신의 이런 변화가 당황스러웠다. 꿈에 경훈이 나오면 억지로 잠을 깨고, 침대에서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내가 김경훈에게 마음이 생겨버린 것을. 준석은 문득 경훈이 지금 시간에 무엇을 할지가 궁금해져, 핸드폰을 켜 전화를 건다. 몇 번 신호음이 가더니, 철컥 하고 경훈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그런데 주변이 몹시 시끄럽다.
"어디야."
- 어, 준서가!!! 나 레드가넷!!!!!!!!
"........또 바 갔어?"
- 응!!!! 너랑 안 가니까 안 오고 싶었는데!! 근데 홍진호도 왔고!!!!!! 좀 괜찮은 사람 있나 해서!!
오늘 형이 꼭 멋진 남자 꼬신다!! 경훈은 술을 한 잔 걸친건지, 잔뜩 신이 나 있다. 뭐, 뭘 꼬셔? 준석은 짜증이 난다. 나는 지랑 몸을 섞고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너는 바에 가서 이렇게 신나게 놀 수 있는거야? 정말 원나잇 그 이상은 아니었구나. 준석은 입술을 깨문다. 그 때, 준석의 이성을 끊어버리는 경훈의 말이 들린다.
- ........어, 저 남자 내 스타일. 준석아, 잠만!!
경훈의 외침으로, 통화는 끝이 난다. 아, 김경훈, 잠깐만! 준석이 다급하게 외쳐봐도, 통화는 이미 끝났다. 아, 이게 진짜 끝까지 신경쓰이게 하네! 준석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옷장을 열고, 아무 옷이나 꿰어입는다. 지금 자신의 코디따위, 전혀 신경쓸 겨를이 없다. 어떻게든 김경훈의 원나잇을 막아야겠다는 생각 하나에, 준석은 급하게 옷을 입고 집을 뛰쳐나간다. 이 시간에 택시를 타면 얼마나 막힐까, 생각하면서.
현민의 볼은 붉게 물들어있다. 한강 주변 공원에서 동민과 캔맥주 하나 했을 뿐인데,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동민은 차를 몰아야해서 술을 마시지 않았더니, 이 어린 놈은 혼자 홀짝거리더니 그대로 복숭아처럼 볼이 달아올랐다. 어이가 없긴 하지만, 애교가 더 늘어서 동민은 딱히 싫진 않다. 지금도 운전을 하는 내내 현민은 옆에서 혀 꼬부라진 발음으로 계속해서 애교를 부린다.
"아, 아까 거기이 - 저녁 먹은데 이짜나여! 지인짜 맛있어여!"
"야, 점심은. 저녁보다 신경 쓴데가 점심인데."
"아이잉 - 둘 다 당여니 마시쪄 - 장동민씨랑 먹는 건뎅!!"
히히, 현민이 웃어보이자 동민은 허, 하고 고개를 젓는다. 그래도 맛있었다니 다행이다. 솔직히 현민의 입맛보다 자신이 맛있었던 곳을 중심으로 가서, 혹시나 어린애 입맛에는 별로이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둘 다 현민은 맛있게 오물거리며 먹었었다. 예의상 먹은 건줄 알았는데, 취해서는 둘 다 맛있다니. 취중진담이길 바래야지. 동민이 씨익 웃자, 현민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동민의 어깨에 기대온다. 야, 사고 나! 동민이 팔로 툭 치자, 현민은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처박는다. 잠시 조용히 있더니, 현민은 동민을 천천히 바라본다.
"나아, 부탁이써여."
"뭔데."
"지금, 학교 데려다줘여."
"...........뭐?"
"마지막으로, 학교 볼래여."
응? 안 돼요? 현민의 질문에 동민은 한 쪽 눈썹을 들어올린다. 뭐 뽀뽀해줘여, 안아줘여 이딴 것일줄 알았는데 상당히 의외다. 그 꼴을 당하고 와서 바로 자퇴 얘기를 하길래 학교에는 아무런 미련이 없을줄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학교를 보고싶다니, 의외로 현민에게 학교라는 공간이 차지하는 바가 컸던 모양이다. 동민은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다. 그래, 오늘이 지나기 전에 너가 원하는 걸 다 해줘야지. 동민이 중얼거리자, 현민은 강아지를 만지듯이 동민의 볼을 쓰다듬는다. 고마워여!!
차를 세우자마자, 현민은 문을 열고 공이 튀어나가듯 내려버렸다. 어이 어린이, 그러다 나쁜 아저씨가 납치해간다!! 동민이 외치자, 현민은 깔깔 웃으면서 문을 닫아버린다. 앞으로 날을 잡고 술을 엄하게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동민은 느릿느릿 차에서 내린다. 차 문을 잠그고 현민을 바라보니, 그새 얼마나 뛰어갔는지 현민이 저 멀리서 두 팔을 벌린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참 나, 동민은 재미있는 구경이다 싶어 현민이 돌고 있는 것을 바라만 본다. 찰나였다, 현민의 뒤에서 막대를 든 인영을 발견한 것은.
"현민아!!!!!!!!!!!!!!!!!!!!!!!"
외치면서 달린다. 그러나 동민이 현민에게 가까워지기도 전에, 현민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막대는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현민은 순식간에 쓰러졌다. 동민이 현민에게 가까워졌을땐, 이미 현민은 바닥에 누워있었다. 막대를 든 소년은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지자, 동민의 등장에 분노에서 당황으로 얼굴이 바뀌고 있었다. 동민은 소년이 도망가기 전에 멱살을 잡아챈다. 소년은 놀라 동민의 손등을 할퀸다. 이거 놔, 놔!!!!!!!! 동민은 소년의 마이에서 명찰을 발견한다. 최창엽.
".................너구나."
"이거 놔!!!!!!"
"너였어, 너. 이 개, 새, 끼!!!!!!!!!!!!!"
동민은 창엽의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 그 바람에 강하게 잡고 있던 멱살이 느슨해졌다. 그 틈을 타, 창엽은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한다. 동민은 저 멀리서 몇 명의 패거리도 슬금슬금 움직이더니, 곧 창엽과 같이 달아나는 것을 바라본다. 지구 끝까지 쫓아가고 싶지만, 현민이 먼저다. 동민은 그렇게 생각하며 현민을 내려다본다. 피 웅덩이에 누워있는 사람. 동민은 며칠 전 본 광경이 다시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때처럼, 핸드폰을 꺼내어 들고 119에 신고를 한다. 위치를 말하고, 구급차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구급차에 함께 실려가, 누워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똑같아서, 데자뷰 같다. 그 날과 지금이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한 사람이 미친듯이 울고 있다는 것일까.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미칠 것 같은 마음에 계속 울고 있다는 것.
동민의 문자 하나에, 진호는 준석과 경훈을 데리고 바에서 급히 병원으로 달려온다. 중환자실이라니. 드라마에서나 보던 중환자실의 앞에 서자, 셋은 생각 이상으로 상태가 심각함을 깨닫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무릎을 꿇고 가만히 엎드려있던 동민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셋을 바라본다. 진호는 동민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다. 잔뜩 뜯겨있는 손등, 옷에 얼룩덜룩 묻은 피. 그러나 무엇보다도 진호가 놀란 것은.
"......지, 진호야......현민이, 현민이..."
정신 없이 울고 있는 동민이었다. 눈이 시뻘겋게 충혈이 되어, 미친듯이 울고 있는 동민. 진호는 동민이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심지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울고 있는 동민은, 상상조차 못한 모습이다. 동민은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계속해서 울고만 있다. 어떡해, 진호야? 어떡해? 수술, 오래 걸린대.
"그래도 주, 준석이처럼, 그, 금방 낫겠지?"
"동민이 형..."
"그렇다고 한마디만, 그 말 좀 해줘.... 누가 현민이 안 심각하다고, 좀 해 줘, 제발..."
여기가 사실은 중환자실 아니라고, 누가 나한테 제발 알려줘.... 제발.. 동민은 다시 울음을 토해내며 얼굴을 손에 묻는다. 손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진호와 준석과 경훈은 그렇게 아무말도 못하고, 한동안 동민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는 중환자실 복도에 멍하게 서 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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