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습니다..........."
윤선은 울먹이며 손수건에 얼굴을 묻는다. 진호와 준석은 난감한 시선을 서로 주고받는다. 경훈은 조금씩 떨리는 윤선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주었다.
가족한테 알려야지, 라고 말하면서 준석은 현민의 핸드폰을 켜, 주소록을 눌렀다. 그리고 엄마라고 저장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렇게 윤선에게 연락하긴 했지만, 막상 윤선이 받자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난감했다. 당신의 아들이 머리가 깨졌습니다, 는 너무 잔인하고. 당신의 아들이 지금 의식불명 상태에요, 라고 하기엔 좀.... 결국 준석은 병원의 위치와 현민이 입원한 사실만을 알렸다. 윤선은 무슨 일인지 파악이 안 된 채 혼비백산해서 병원에 달려왔고, 담당의를 통해 현민의 상태를 들었다. 의사에게 설명을 듣자마자, 윤선은 머리가 멍해져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그녀를, 세 사람은 일어날 때까지 팔다리를 주무르고, 곁을 지키고, 따뜻한 물을 얻어왔다. 경훈이 얻어온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신 윤선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분명, 현민이는 눈을 뜰 거에요."
"그, 그러길 바래야죠........... 오랜만에 보는 아들인데...... 이렇게 보다니........."
윤선은 충혈된 눈을 손수건으로 찍었다. 그러더니 서 있는 세 사람을 차례로 바라본다. 고마워요, 세 분 다.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저흰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하는 게 없는걸요, 뭐."
"그래도, 이렇게 돌봐주시고............. 그런데, 저, 그 분은, 안 계시나요?"
"..........누구요?"
세 사람은 윤선에게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했지만, 윤선의 입에서 나올 사람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껏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 그렇게 현민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고, 현민의 병원비까지 모두 부담해놓고. 막상 현민이 입원을 하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사람. 현민이가 일어나면 먼저 찾을, 가장 보고 싶어할 사람.
"....이름이, 장동민씨 던가요...?"
윤선의 말에, 진호는 자신도 같이 울고싶어졌다. 저도 그 사람이 대체 어디있는지 모르겠어요. 현민이 어머님, 대체 그 인간은 그 날 이후 왜 종적을 감춰버린 걸까요. 그러나 이런 마음을 감춘 채, 진호는 간신히 입을 열어 일이 매우 바쁜 모양이라고 대답했다.
그 날 이후, 동민은 갑자기 사라졌다. 메세지는 물론이고, 전화조차 받지 않았다. 진호는 동민을 찾아 게이 골목을 이리저리 뒤져도 보고, 심지어는 동민의 집 앞까지 찾아가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곳에서도 동민을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 매일 준석과 경훈을 데리고 현민이 깨어났는지 살펴보러 왔지만, 동민은 매일 나타나지 않았다. 담당의와 간호사들에게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물어도, 그런 분은 본 적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렇게 울어놓고, 대체 어디간거야, 형?
"그래, 바부터 가보자!!"
경훈의 외침에, 현민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던 진호와 준석은 고개를 든다. 진호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경훈에게 말한다. 너는 이 상황에 바를 가고 싶냐? 진호의 힐난에, 경훈은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 아니야!!
"장동민이 혹시 바에 있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가 봤어. 없더라."
"기껏해야 길거리나 대충 돌아다녔겠지. 장동민이라면 분명 바에서 술마시고 원나잇하고 돌아다닐지도 모를 일이야."
".........너 동민이 형 우는 거 못 봤냐. 이 상황에서, 절대 그럴 일 없어."
"혹시 모르니까 가보자는 거잖아!!! 그럼 어디서 찾을건데, 이렇게 술래잡기 하는 사람을!!"
경훈은 펄펄 화를 낸다. 준석은 경훈이 이 사건에 열을 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진다. 자신이 입원했을 때 매일 찾아와 자신을 살펴주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준석은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경훈은 자신이 입원했던 때보다 지금 더 온 성의를 다 해서 현민을 위해주고 있다.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고. 물론 준석도 친한 동생이 이렇게 된 것이 매우 슬프다. 그러나 경훈에게 자신이 먼저가 아님을, 오늘도 깨닫게 된 준석은 가만히 입술을 깨문다. 이런 준석의 속을 알 리가 없는 경훈은, 그저 동민에 대한 배신감이 싹트고 있을 뿐이다.
"아니, 진짜로 형이 현민이를 위한다면 한 번이라도 병원을 왔겠지! 지금까지 간호사들이나 담당의가 다른 사람이 왔었다고 한 적 있어? 없잖아!"
"....................."
"놀라서 울 수는 있어. 하지만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혹시나 해서 가보자는 거잖아."
정 둘이 안 가겠다면, 나라도 가 볼거야! 라고 소리치며 경훈은 병실을 나선다. 그러자 준석도 경훈의 뒤를 따라 병실을 박차고 나간다. 진호는 잠시 망설인다. 내가 아는 장동민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 눈, 그 흐느낌. 그 슬픔은 너흰 몰라. 내가 처음 볼 정도로 얼마나 깊은 슬픔이었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진호는 누워있는 현민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꼬맹이, 그럴 사람 아닌거 너도 알지? 내가 꼭 찾아와줄게. 그러니까 그 전까지 눈 좀 떠. 진호는 마음속으로 현민에게 말을 건네고는, 둘을 따라 나간다.
바는 오늘도 혼잡했다. 어두운 공간 속을 빨간 조명이 사람들을 핥고 있었다. 조명이 가진 특유의 야릇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둘씩 짝을 지어 몸을 맞대고 있다. 혀를 섞고, 탄성과 신음이 섞이고. 평소였다면 이 공간 속에서 자신의 그 사람을 찾아헤맸을 경훈이지만, 오늘은 한 사람을 찾기에 몰두한다. 장동민, 장동민!! 정말, 정말 여기에도 없는거야? 경훈이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키스하고 있는 사람의 뒷통수를 잡아 떼어내어 얼굴을 확인하고, 펠라하는 사람 얼굴을 들어 얼굴을 확인하고. 그렇게 별 짓을 다하는데, 뒤에서 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찾았다."
그리고 셋은, 할 말을 잃었다. 동민이 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동민의 얼굴은 너무나도 평온하다. 어제 그렇게 울었던 사람이 맞나 싶다. 동민은 긴 손가락으로 잔을 매만지며 여유롭게 스테이지를 바라본다. 그러다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셋을 발견한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오른손을 들어 가볍게 살랑인다. 왔네. 경훈은 동민에게 빠르게 걸어간다.
"...미친 거야?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보면 모르나. 술 마시지."
"오현민, 지금 의식 없이 누워있다고."
"알아."
"그런데, 병원도 안 가고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내가 가야할 이유가 있나?"
동민의 말에, 경훈은 동민의 멱살을 잡아쥔다. 준석은 허, 하고 기가 차다는 듯 숨을 내쉰다. 진호는 동민의 말에 큰 충격을 받는다.
"뭐라고? 형 지금, 그게 할 소리야?"
"너야말로. 대체 내가 병원을 가는게 당연하다는 그 말투는 뭔데?"
"....오현민, 형이랑 같이 있다가 그렇게 당한거라고!"
"그래서 병원 데려다주고 병원비까지 냈어. 이 정도면 엄청나지 않나?"
"그 동안 그렇게 그 애랑 같이 있던 시간 동안 정 안들었어? 그렇게 함께했던 애를 갑자기 이렇게 버리는 거야?"
경훈의 목소리는 부들부들 떨린다. 믿을 수가 없다. 장동민이, 이렇게 냉정하고 정 없는 사내였던가. 그 동안 말은 심했어도, 자신들을 은근히 챙겨주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그건 다 우리가 속고 있는 거였어? 진호도 이 상황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아, 동민의 말을 곱씹어본다. 아마 자신이 잘못 들었겠지, 의미를 왜곡해서 들은 거겠지 싶어서. 그러나 동민이 뱉은 모든 말은, 하나하나 칼날이 되어 진호의 마음을 도려낸다. 동민은 픽 웃더니, 경훈을 바라본다.
"고작 몇 번 잤다고 내가 연인 놀이라도 해야 돼나?"
"뭐?"
"원나잇은 원나잇이야. 이제 끝난 인연, 새 인연 찾아 떠나야지."
어떻게 그런 말을! 경훈은 동민이 먹던 잔을 들더니, 그대로 동민의 얼굴에 뿌려버린다. 동민은 자신이 마시던 붉은색 칵테일을 뒤집어쓴다. 머리칼 끝마다, 술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두 번 다시 아는척 하지마, 이 냉혈한!! 경훈은 동민의 얼굴에 대고 버럭 소리를 지르더니, 바를 뛰쳐나간다. 준석은 동민을 바라본다. 동민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술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있다. 저래도 싸, 라고 중얼거리며 준석은 경훈의 뒤를 따른다. 진호는 준석을 바라보더니, 동민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동민은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있다. 진호는 동민에게 다가간다.
"형, 방금 말 진심이야?"
".........................."
"장동민, 이 질문이 마지막이야. 지금 말 진심이야?"
"...남자는 내뱉는 모든 말이 진심이어야 하지."
진호는 동민의 대답에 충격을 먹는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래...... 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동민의 곁을 떠난다. 수군거리는 인파 사이로, 비척거리며 바를 걸어나간다. 동민은 서서히 눈을 뜨더니, 그렇게 사라져가는 진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동민은 현민의 사고 다음 날, 바로 학교에 찾아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모든 교실의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혔다. 그 이유는 하나였다, 최창엽 어디 있어. 기어코 창엽을 발견하고 만 동민은 수업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교실에 쳐들어가, 멱살을 잡고 질질 끌어냈다. 선생들이 말리고 학생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해도, 동민은 강하게 멱살을 잡으며 창엽에게 말했다. 당장 나와서 현민에게 사과하라고. 그랬더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창엽의 말이 가관이었다.
"뭘? 내가 뭐 했나? 증거가 있어?"
선량한 학생한테 이러면 안 되지, 쓰레기 아저씨. 창엽의 비아냥에 동민은 망설이지 않고 복도에서 다시 한 번 창엽의 얼굴을 세차게 갈겼다. 결국 동민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선량한 미성년자인 학생을 후려팼다는 이유로 학교에 잡혀있게 된 것이다. 교장실에 앉아 몇십분을 갇혀있자, 창엽의 부모와 수많은 증인들 중 몇 명이 교장실에 들이닥쳤다. 그리고는 곧 동민에 대한 처벌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창엽의 부모는 이런 불한당은 고소를 해야 마땅하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증인들도 동민이 우악스럽게 창엽을 끌어내어 갑자기 두들겨 팼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민은 그들에게 지지 않고 말했다.
"이 최창엽 학생이 한 무고한 학생을 폭행해서, 현재 그 학생은 의식 없이 입원해 있습니다. 잘못하다간 목숨을 잃는다구요!"
"우리 창엽이가 얼마나 착한데 그런 거짓말을!!!!!!!"
동민은 상황이 당연히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 누가 자기 자식이 사고를 일으켰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어. 게다가 아무런 증거가 없으면 당연히 이 쪽이 불리할 수밖에. 창엽이 이 상황에서 뻔뻔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자, 동민은 가져온 태블릿 PC를 켠다. 그리고는 한 영상을 누른다. 그것은 동민의 자동차에 달려있던 블랙박스 영상이다. 그 영상에는 현민이 맞고 쓰러지는 것, 동민이 창엽의 멱살을 잡는 것, 창엽의 이름을 부르는 것까지. 이 상황이 너무 멀리서 찍히기는 했지만, 동민은 이것이 자신의 무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창엽의 얼굴마저 찍혀있어, 당연히 창엽의 폭행을 입증하는 영상이 아닌가. 사람들은 그 동영상을 보다가 현민이 쓰러지자, 숨을 들이킨다. 저거 뭐야, 최창엽이 진짜 때린거야? 야 저거 너무 심하다...!!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여기까진 매우 좋다. 창엽의 죄가 입증되는 거니까. 여론도 술렁이기 시작하고. 그런데 갑자기, 창엽이 한숨을 내쉬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아저씨가, 오현민 애인이라 저를 몰아가시는 것 이해해요. 하지만 억울해요. 저는 그냥 뒤에서 놀래켜주려고 한 거라구요!"
창엽의 어이없는 말을 뒤로, 동민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창엽의 핸드폰을 바라본다. 화면에는, 현민과 동민이 키스하는 사진이 찍혀있다. 며칠 전, 창엽이 페이스북에 올려 현민을 아웃팅시켰던 바로 그 사진이다. 자신의 옆 얼굴이 어찌나 적나라하게 찍혔는지, 동민은 딱 봐도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느꼈다. 사진이 공개되자, 교장실 안은 다시 한 번 술렁이기 시작한다.
"게이야.......?"
"세상에, 이런 애가 이 학교에 있었단 말이에요??"
"어떻게, 고등학생이 동성애를...!!"
동민은 자신이 보여준 영상에 대한 언급이 사라지고, 그저 현민과 자신이 게이라는 것에 술렁이기 시작한 이 분위기가 당황스럽다. 아니, 잠깐만요. 이 영상을 보라구요!! 애가 쓰러져서 피 흘리는데, 당신들은 이것보다 그게 더 심각하단 말이야!! 동민이 소리치는데, 창엽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쐐기를 박는다.
"멀리서 보면 제가 때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요. 장난으로 때리는 척을 한 건데, 현민이가 놀라서 넘어진 거에 대해선 제 잘못이 커요... 하지만 전 절대 친구를 때리진 않아요. 아저씨 애인인데, 죄송합니다. 고의는 아니었어요."
그리고는 창엽이 동민에게 고개를 숙인다. 동민은 말문이 막힌다. 창엽은 고개를 들더니, 부모에게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아빠엄마, 제가 친구 놀래킨 잘못도 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를 고소하지 말아주세요. 그냥 제 뺨 치료비로만 끝내요. 아저씨도 마음이 아프실 거에요."
창엽의 부모는, 자신의 아들이 어찌나 이렇게 바르게 컸는지에 대해 탄식을 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착하게 살면 피해를 보는 것인데, 우리 불쌍한 아들...!! 교장실에 불려온 증인들 또한 창엽의 쪽으로 확실히 기울어진다. 창엽은 자신을 감싸안은 부모의 팔 밑으로, 동민을 빤히 바라본다. 그리고는 입 모양으로 말한다. 병.신. 그러나 그날밤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동민을 몰아가기 시작한다. 이 여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분위기를 읽은 동민이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세차게 문지른다. 두 눈을 감아 어둠이 내리자, 피웅덩이 한가운데 누워있던 현민의 모습이 떠오른다. 미안해, 현민아.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동민은 이 곳에서 더 이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그렇게 300만원을 창엽의 부모의 통장에 입금했다. 내가 뭐라도 해줄 수 있을것 같아 쳐들어간 적진에서, 오히려 화살을 맞고 돌아온 동민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도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양, 조금도 더 머리를 쓸 수는 없었다. 오늘 하루를 이 정신으로 있다간 머리를 어디에다 처박고 말 것 같아, 동민은 그대로 바로 향했다. 레드가넷의 바텐더는 웬일로 혼자 찾아온 동민을 반기며 교태를 부렸다.
"뭐로 마셔, 오빠?"
"......독한 거, 진짜 독한 거."
동민은 잔을 받자마자 한 입 들이켰다. 빈 속에 독한 술을 들이키니, 한 입만에 시야가 아득해진다. 그래, 이 느낌이지.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 같아. 술이 최고의 약이라더니, 그 말 한번 명언이네. 동민은 그렇게 알코올 농도가 높은 술을 쉬지않고 들이켰다. 얼마나 들이켰을까, 빙빙 도는 고개를 간신히 돌려보니 경훈과 준석, 진호가 보인다. 아, 내 친구들! 인사를 했는데, 경훈이 오더니 멱살을 잡는다. 그리곤 다짜고짜 현민이 얘기. 현민이 얘기 하지마.
오현민.
나 같은 것 때문에
누워있다고.
아프게 해서 미안하니까
병원도 안 가고.
얘기하지마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어.
사라져주고 싶은데 마음 약해지니까, 더 얘기하지마
곧 동민은 자신의 얼굴에 술이 뿌려지는 것을 느낀다. 얼굴 앞에서 잠시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갑갑했던 목이 갑자기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제 후련하네. 가만히 이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는데, 이번엔 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장동민, 지금 말 진심이야? 지금 말? 뭐, 현민이한테 미안한거? 그럼, 난 언제나 진심이지. 남자는 내뱉는 말이 모든 말이 진심이어야 하지. 동민의 말을 듣더니, 진호도 사라져버린다. 미안하다, 진호야. 난 이제, 내 마음 속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어. 동민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어 눈을 가만히 깜빡인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는데, 하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래, 가야지. 나는 가야지, 중얼거리던 동민은 비척비척 바를 나와 택시에 오른다.
"어쩔 수 없잖아, 엄마. 이따 택시 타고 갈게. 다른 애도 아니고 현민이인데... 응, 응, 걱정 마요. 알았어!"
하여간, 내가 애도 아니고! 정문은 뾰루퉁하게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는 병실 문에 난 창문 안을 들여다본다. 현민은 죽은 듯이 누워있다. 얼핏 보면 숙면하는 것 같다. 차라리 너가 숙면하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정문은 학교 밖에서 처음 만나는 현민의 몰골이, 이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현민의 번호로 정문에게 날아온 메세지란 병원 위치와 병실 호수, 그게 다였다. 무슨 일이냐며 반문했지만, 답장은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영문도 모른 채 병원에 도착한 정문은, 누가 썼는지 모를 긴 장문의 편지를 간호사를 통해 건네받았다. 그 곳엔 현민이 어떻게 다치게 되었는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현민에게 매우 미안하며, 정문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누가 썼는지 궁금한 정문이지만, 단짝이 의식불명인 상태에서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민아.............."
이렇게 부르면, 당장이라도 너가 문아, 라고 부를 것 같은데. 마음이 먹먹해진 정문은 문을 열지도 못하고 복도에 서서 가만히 병실 안을 들여다본다. 그렇게 하염없이 바라만보는데, 갑자기 복도 끝에서 웬 사람이 나타난다. 화들짝 놀란 정문은, 검은 정장을 입은 축 젖은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것을 느낀다.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정문은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다. 현민이 항상 핸드폰으로 보여주며 자랑했던 사람. 만나보지도 못했는데 이미 어느새 익숙해진 사람. 현민의 그 사람.
"...........장동민씨?"
정문이 부르자, 동민은 천천히 고개를 든다. 으응.........? 뭐야, 저 아저씨 왜 저렇게 취했어. 취객이 병원에 들어와도 괜찮은건가 싶은 정문이다. 동민은 비척거리면서 정문에게 걸어온다. 그러자 술 냄새가 훅 끼친다. 정문은 술냄새에 기겁을 하며, 문을 열려는 동민의 손을 붙잡는다. 이렇게 술 냄새를 가득 풍기면서, 이 아저씨가 어딜 들어가려고!!!!! 정문이 막자, 동민은 잠시 정문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미친듯이 끅끅대는 동민을 보며, 정문은 얼굴을 구기기 시작한다. 가관이네, 이런 똥차를 현민이 좋아한단 말이야? 믿기지 않는 정문이다.
"키키킥.... 그러엄.......나는, 들어가면 안돼...."
"당연하죠, 취객은 안 돼요."
"장동민은......더는, 오현민을........안 돼......."
"네?"
"더 이상, 현민이 다치면, 안 돼."
동민이 힘겹게 말을 하기 시작한다. 더욱 거세어진 술기운 사이로 진심을 꾸역꾸역 뱉어내는 듯하다. 그 진심에, 정문은 동민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민은 정문을 바라보지도 않고 혼자 말을 계속한다.
"너무, 미안해서. 내가............나는 쓰레기야..."
".......아저씨, 아저씨가 나한테 편지 썼어요? 이거?"
정문은 주머니에서 장문의 편지를 흔들어보인다. 동민은 눈을 들어 그 종이를 보더니, 고개를 나지막히 끄덕인다. 응, 현민이가.... 정문이... 친구래서... 너한테는 꼭, 알려줘야지...했어....... 다른 사람은 몰라, 비밀이야. 동민의 말에 정문은 벽에 쭈그려앉은 동민의 눈높이에 맞추려 같이 쭈그려앉는다.
"최창엽, 어떻게 됐어요....? 이 편지에는, 아저씨가 꼭 복수해준다고 썼잖아요."
"헤.........헤헤.......망해써, 망해써... 전혀, 현민이한테, 아무것도 못했어..."
"증거 같은게, 없었어요?"
"그 어떤 것도, 혐오라는 벽을 넘을 수가.... 미안해...."
동민의 말에 정문은 설마, 싶어졌다. 혐오라면, 아마도 현민이 게이인 것과 연관이 클 것이다. 대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정문은, 내일 아침에 학교에 가자마자 최창엽과 동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봐야 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갑자기 동민이 정문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왜, 왜 이래요. 겁에 질린 정문은, 동민의 눈빛을 보고 놀란다. 취한 사람 같은데, 눈빛만은 진지하다.
"내가 여기 온 거, 편지 쓴 거, 모든 걸 비밀로 해줘."
"왜요?"
".....나는, 이제 오현민의 인생에서 사라져야 해."
"현민이가 눈 뜨면, 아저씨를 찾을 텐데요?"
"잠시일거야. 어리니까, 곧 다른 사람 찾을 수 있을거야."
그래 줄 수 있지, 상큼한 아가씨? 동민은 헤헤 웃으며 정문의 손목을 놓는다. 그러나 정문은 동민의 눈에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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