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지엠 넘나 좋고요..꼭 같이 들어줬음 더 좋고요..)
'I'm raining~'
덕선의 해맑은 목소리가 종일 귀에 울리는 정환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멍청하고 모자라보이기만 한 성덕선이 눈에 밟히기 시작한 게.

정신 차릴 때마다 성덕선 생각에 빠져있을 줄, 정환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런 짓거리를 언제부터 했는지도 모르겠다.
되짚어 보자면, 중학생 때까진 확실히 아니었다.
남자 넷 사이에서도 골목대장을 할 만큼 활발하고 좀 거친 그런 여자애, 아니. 여자로 보이지도 않는 그런 동네 친구였다.
집에 빚이 생기고 정환의 집에 딸린 반지하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후에도 전과 별 차이 없이 해맑아서, 너무 맑아서 오히려 멍청해보이던 그런 녀석이었다.


고등학생이 되고, 다른 학교를 다니면서 등하교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마주치기 힘들었다.
그나마 그 짧은 순간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까칠해지는 성격때문에 덕선과 마주칠 때마다 투닥거리기 바빴다.
밝은 녀석은 곧잘 여자인 친구 무리에 어울렸고, 골목에 사는 다섯이 모여 놀던 시간은 점점 줄어갔다.
대신 같은 대문 안에 살게 되면서 덕선과 단 둘이 마주치는 일이 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환은 그 동안 몰랐던 덕선에 대해 알아갔다.

덕선은 보라누나와 자주 싸웠고, 늘 졌다. 몇 대 맞고 방에서 쫒겨나면 마당으로 나와서 행국이한테 말을 걸었다.
'행국아아~ 성보라 저 미친X 지나갈 때 확 물어버려! 알았지이~'하면서 혼자 실실 웃는데, 진짜 바보 같았다.
그럴 때마다 행국이 밥을 챙긴다는 구실로 개밥을 퍼서 마당에 나갔다.
아예 다리를 펴고 앉아서 행국이를 쓰다듬고 있는 녀석의 뒷 모습을 보면 웃음이 났다.
뭘 쭈그리고 있냐며 덕선의 머리를 툭 치고는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 땐 그게 무슨 감정인지 몰랐다.
짝사랑 하는 애를 때리고 도망가는 초등학생 심보 정도로 보면 되려나.


그러니까 정환은, 어느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의 괴롭힘에 투덜거리는 녀석이 귀엽다가도,
덕선이 귀찮은 듯 반응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왠지 섭섭해지는 감정을, 웃기게도 그건 흔한 짝사랑이라는 걸.
딱히 짝사랑을 거부하거나, 인정하기 싫은 것은 아니었다.
키가 자라고 생각이 조금씩 어른스러워져도, 가뜩이나 감정표현에 서툰 정환은 그런 방면에선 한참 어렸다.
그런 정환이 덕선을 바라보고, 웃고, 가까이 닿고, 떨리기를 반복하면서 마침내 좋아하는 마음에 확신을 가졌을 땐 말이다.
이미 늦었나 싶었다.

선우를 바라보는 덕선의 눈빛부터 유난히 해맑은 웃음 모두, 정환이 모를리가 없었다.
덕선이 곁에 있으면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고백할 생각조차 못할만큼 첫사랑이 버거운 자신이 보기에도, 성덕선의 짝사랑은 너무 어렸다.
쟤 진짜.. 왜 저렇게 티를 내나 싶을 정도로.

'I'm raining' 이라는 왠 말도 안되는 문법으로 애들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내뱉질 않나,
더군다나 이번 수학여행 때 덕선과 갑자기 안게 된 자신은 열이 올라 정신이 없는데, 아무렇지 않게 기대오던 덕선을 떠올리면 허탈한 정환이었다.
성덕선한테 나는 그냥 친구, 딱 그 정도. 그 이상은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요며칠 떠나지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덕선이 정상이지, 어릴 때부터 친하던 골목 친구에게 흑심을 품은 자신이 비정상이란 생각도 함께.
아니, 성덕선도 비정상이지. 왜 하필 좋아한다고 미친듯이 티를 내는 게 선우 녀석인지.
정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몇 주를 흘려 보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 아니다.
최택이 눈치 챌 정도로 덕선은 선우에게 할 수 있는 모든 표현을 했다. 보고만 있자니 답답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의외라고 하기엔, 정환의 눈치가 빠르기도 했지만 선우가 보라누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은 꽤 충격이었다.
늘 웃기만 하는 덕선이 아마도 운다면, 눈치 없는 녀석마저 선우의 마음을 깨달은 날이겠다 싶을 정도로.
평소처럼 자습을 마치고 동룡과 함께 골목으로 향한 오늘,
대문 앞 계단에 퉁퉁 부은 눈으로 주저 앉아 있는 덕선을 발견할 줄은 몰랐다.
'저거 덕선이 아니냐?'하는 동룡의 목소리에 정환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본 때부터 지금까지, 덕선이 저렇게 울던 순간은 몇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정도를 제외하고는, 멍청할 정도로 밝은 녀석이라.
동룡이 다가가려 하길래, 아 그냥 냅둬, 하고 집으로 밀어넣었다. 별 일 아닌가 하며 동룡이 들어갈 동안 정환의 시선은 계속 덕선이었다.
정환의 발걸음 소리에도, 멈춰 선 그림자에도 덕선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우냐?"
"성덕선, 왜 우는데."
"야."
묻는 말에 아무 반응이 없다.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기겠지 했는데, 뭘 어떻게 해야하는지 감도 안잡히는 정환이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데 대문 뒤로 선우와 보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화 내용이 다 들리진 않는데, 덕선이 알게된 것은 확실했다.
굳어서 울기만 하는 덕선을 보다가, 얘는 또 멍청하게 울거면 멀리가서 울지, 문 앞에서 이러고 있는 건지 못마땅해진다.
"하여튼 멍청해가지고.."
혼잣말에 그제야 고개를 든 덕선이 정환을 째려본다. 그 모습에 왠지 화가 나는 정환이다.

"야, 너는 울거면 뒷골목이라도 가서 울던가. 바보냐?"

"제발 시비걸지말고 들어가 좀.."
눈은 퉁퉁 부어가지고, 어쩌자는 건지 말대답은 잘하길래 몇 번 더 말을 붙이다가 안되겠다 싶었던 정환이 덕선의 팔목을 잡았다.
그냥, 이대로 선우 녀석과 마주하긴 싫었던 마음이었다. 의외로 덕선은 거부 없이 정환의 손에 끌려왔다.
얘가 이렇게 무기력한 애가 아닌데, 덕선이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은 정환은 괜히 속이 쓰렸다.
정처없이 걷다보니 도착한 곳은 결국 골목 근처 슈퍼였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슈퍼 앞 탁상에 걸터 앉았다.
정환이 아이스크림을 건내자 덕선이 고개를 젓는다.
"그냥 사 줄 때 먹지?"

"아. 싫어. 너나 많이 먹어."
정환이 빤히 쳐다보자 몇 번 입을 다물었다가 말을 꺼낸다.
"...너도 알고 있었어? 선우가 우리 언니 좋아하는거..아니..내가..선우 좋아하..는거? 티 났어?"
정환이 자신을 바라보고만 있자 답답한지 목소리를 높인다.
"아니. 티 났냐고. 그럼 나 좀 말리지. 어? 나 진짜 쪽팔려.. 야.. 나는 진짜.."
눈시울이 붉어지다가 결국 펑펑 울기 시작하는 덕선이다.
찬 아이스크림만 쥐고 있는 정환은 왜 자신이 울고 있는 덕선을 멍청하게 보고만 있어야하는지 모르겠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다 참아보려고 답을 찾아보려해도 머릿속은 점점 하얘진다.
덕선이 한참 울기만 하다가, 정환의 품에 기댄다.
얘는 내가 친구니까, 편하게 하는 행동인데 그런 덕선이라도 좋아서, 같이 울 것 같은 정환이다.
"야.."
정환의 목소리에 덕선이 더 파고든다.
"정팔아..나 좀 냅둬..지금 기댈 사람 너 밖에 없어.."
그 말에 잠시 굳었던 정환이 덕선의 어깨를 잡고 밀어낸다.
"아. 김정환 진짜 서운하게 왜 그러냐"
덕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올려 눈물을 닦아주며 말을 잇는 정환이다.
"..넌 좀 심하게 멍청한 것 같다"
"너 아까부터 자꾸 멍청이에 바보 같다고 하는데 진짜 죽는다."
"너무 니 감정에만 집중하니까 멍청한 꼴 되는거야."
"왠 잔소리래. 넌 뭐 다 알았냐."

"내가 너만 보고 있었는데, 그럼 모르겠냐."
"..돌았냐? 징그럽게."
"진짠데"
덕선은 그냥 웃고 넘기려 한다. 점점 애가 타는 정환이다.
이 정도로 말했는데, 진짜 바본가.
"야."
덕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함께, 그대로 고개를 숙인 정환이었다.
덕선과 맞닿은 입술은 키스라고 하기엔 민망했다. 윗입술만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데, 손 끝까지 힘이 풀려버렸다.
열이 올라서 공기와 닿은 모든 부분이 뜨거워 죽겠는데도, 덕선이 도망갈까 두 손으로 붙잡고 고개를 숙인 정환이다.
정수리만 보인 채 두서없이 말을 내뱉느라, 덕선의 표정조차 보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안해도 니가 눈치챌 줄 알았는데,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 아..놀랐지..아"
겨우 고개를 들어서 말을 잇는 내내 떨려서 죽을 것 같았다.
"나 너 좋아해.. 진짜.. 진심으로."
아 내 운명은 고백하다가 떨려 죽는거구나 싶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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