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자님."
"왜."
"황자님은, 다음 생이라는 걸 믿으십니까?"
"다음 생? 갑자기 무슨.."
"그냥요. 요즘 종종 그런 생각을 들어서."
처음 당신을 보았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차라리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까먹지 않고, 가슴 속 깊이 새겨 당신이 살아온 그 시간의 역사만이라도 기억할 걸 그랬다는 후회 역시 그렇다. 좀 더 알았더라면, 당신의 옆사람이 내가 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느낄 무력이 덜했을 테니. 광종비, 왕소의 부인이 해수는 아니라는 사실을.
"뭐, 다음 생까지는 몰라도.. 현세에서 지은 업보가 대물림되리라는 건 믿는다."
"......"
"아마 난 아주 천벌 받을 놈으로 다시 태어나겠지."
웃음을 닮은 한숨. 해수.. 아니, 고하진은 사실 다음 생 따위는 믿지 않는 지극히도 현실적인 21세기 여자고, 당신은 그렇기에 해수의 남자도, 고하진의 남자도 될 수 없는 사실을.
"그러는 넌, 다음 생을 믿느냐?"
한때는 늘 피를 묻힌 채 허공만을 더듬던 눈동자가 어느새 나를 담고 있었을 때. 그때 느꼈던 내 떨림을 당신은 알까.
"......"
"어찌 답이 없어."
"...황자님."
아는 이 하나 없던 이 세상, 고려에서 처음 언니를 잃었고, 그 다음은 첫사랑과도 같았던 4황자님을 가슴에서 지워냈다. 나는 수없는 인연들을 보냈고, 잃었고, 포기했고, 그렇게 천천히 다 끊어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입니다."
"......"
"황제도, 황자도, 귀족도 종도 없는 세상이 오면 말입니다."
"...뭐?"
그 마지막이 당신이 되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었다.
"사람들은 말이 아닌 다른 것을 타고 다니고, 서신이나 봉화가 아닌 다른 소식통으로 서로에게 안부를 전하고,"
"......"
"고려에만 뜨는 별도 더는 뜨지 못할 때가 오면요."
함께 했던 시간이 다 끝나고 나면 그때의 나는 어떨지를.
"꼭, 다시 나타나기에요."
"..너,"
"약조해주세요. 이번 생에는 제가 황자님 앞에 짠.. 나타났으니까 다음 생에는 꼭, 황자님이 먼저 나타나 주셔야 해요."
"꼭 떠날 사람처럼 말하는구나."
"......"
"네가 말하는 그 생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에 그래."
끝내는 작게 웃음 짓고 마는 당신의 그 입꼬리에, 아주 작게 파인 보조개 끄트머리에라도 나의 기억이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해수라는 여인을 온통 잊지는 말았으면 한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이름으로 고하진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록될 테니. 든든한 줄로만 알았던 가엾은 그 어깨 위에 올렸던 짐은 조금만 내려놓고, 조금만 더 많이 웃을 수 있기를 바란다.
"천 년이요."
"참 나. 뭐가 재미지다고 농인 게냐, 또."
"농이 아닙니다."
"뭐라?"
"그땐 내게 먼저 모습을 보이라는 것도, 농이 아니야."
꼭, 나타나주길.
"그때는 꼭 당신이 먼저 와주기야."
"......"
"나 같은 사람으로, 이렇게 죽어도 이뤄지지 못할 사람으로는 싫구 그냥.. 그냥 지나가다 실수로 발을 밟아도, 음식점에서 밥 먹다 옷 위로 전부 쏟아버려도,"
"......"
"그래도 천벌받지 않고, 황명으로 다스려지지 않을 사람으로."
눈을 감고 보일 세상. 다시 나타날, 고하진의 세상.
그리고 다시는 느끼지 못할 당신의 숨결에 차라리 내 숨을 끊고 싶지 않을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시간을 두고.
"나랑,"
"......."
"사랑.. 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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