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성
개방적이고 성적으로 평등했던 고려시대
지금 우리사회의 각종 생활의식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영향을 받았다.
작게는 가족관에서부터 크게는 국가관까지. 性의식도 마찬가지다.
남존여비, 남녀칠세부동석, 축첩제도 등 남성중심의 성의식이 불과 20세기 초반까지도
우리 사회를 지배하였고, 아직까지 우리사회에서의 성은 은밀하고 폐쇄적인 주제임에 틀림없다.
이 모든 것이 조선시대 유교사상의 영향이다.
앞에서는 근엄한 척하며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양반들의 성문화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쳐,
우리 사회는 곳곳에 불법 성문화가 독버섯처럼 만연하고 있다.
오죽하면 전국 어디서나 러브호텔이 성행하여 ‘불륜공화국’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근래 사극과 영화의 주인공으로 부활한 신윤복은 당시 조선시대 양반들의 이러한
이중적인 성유희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성의식이 상당히 개방적이었고
남녀평등이었음을 나타내주는 대목을 많이 찾을 수 있다.
먼저 신라시대를 한번 살펴보자.
신라왕실은 권력의 누수를 방지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근친혼을 광범위하게 인정한 나라였다.
예를 들어 법흥왕의 동생(삼촌)과 법흥왕의 딸(조카)이 혼인하여 태어난 이가 진흥왕이었고,
무열왕 김춘추 또한 진지왕의 아들인 김용춘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진지왕이 진평왕의 삼촌이니 용춘은 천명의 5촌당숙이 되는 셈이다.
또한 무열왕은 김유신의 두 누이인 문희, 보희와 혼인했으며, 문희의 딸인 지소는 삼촌인 김유신에게
시집을 갔고, 김유신의 딸 신광은 다시 사촌인 문희의 아들인 문무왕에게 시집을 간다.
<진흥왕 순수비>
신라 51대 왕인 진성여왕은 숙부인 위홍과 혼인을 하였다.
이러한 근친혼은 왕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서민사회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아버지가 다른 동복소생의 남매가 혼인한 기록까지 나올 정도다.
고려시대에도 신라와 마찬가지로 성의식이 개방되었음은 물론이고,
남녀가 사회생활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평등한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태조왕건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왕권안정을 위하여 각 지역의 호족세력과 혼인관계를 맺는다.
그 결과 무려 29명의 아내를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25남 9녀의 자녀를 얻었다.
이러한 혼인정책은 초기 왕실의 족내혼(근친혼)이 성행하게 한 원인을 제공한다.
고려 3대 왕인 정종은 견훤의 외손녀 둘과 결혼을 했는데,이 친자매는 태조왕건의
17대 부인 박씨의 친동생들이다. 그러니까 정종은 이모들과 결혼을 한 셈이다.
4대 임금인 광종은 자신의 이복누이인 대목왕후 황보씨를 첫째 부인으로,
자신의 이복 형이자2대 임금인 혜종의 딸 즉 조카를 둘째부인으로 삼았다.
5대 경종은 사촌과 결혼을 했고, 9대 덕종은 이복누이동생 두 명과,
고려의 태평성대를 연 성군인 문종(11대) 역시 이복형제와 결혼을 했다.
이러한 근친혼과 개방적인 성문화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왕실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고 고려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즉 왕실은 족내혼이 성행했고 일반 서민사회에서는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다.
송나라 휘종이 고려에 국신사(國信使)를 보낼 때 수행한 서긍이 송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그림을 곁들여서 기록한 책이 고려도경이다.
이 책 23권을 보면 여름철에 시냇물에서 남녀 구별 없이 옷을 벗고 목욕하였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아예 '경합이리(輕合易離)'라고 하여 "가볍게 만나서 쉽게 헤어진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송나라 사신의 기록이므로 신빙성에 의문이 있지만 고려의 성 풍속이 개방적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조선 초기 김종서, 정인지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만든 고려시대의 역사책인 고려사를 보면
곳곳에서 여자들이 절에 가서 술 먹고 춤추고 놀아 풍기가 문란함을 지적하는 기사가 많이 나온다.
고려시대에는 여성들의 재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임금 중에는 이혼한 여자와 결혼한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6대 왕이자 유학정치이념의 실천자인 성종(태조 왕건의 손자)은 역시 태조왕건의 손자이자
광종의 딸인 문덕왕후 유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역시 태조의 다른 손자 왕규에게 결혼을 했다가
성종에게 재가한 경우다. 더구나 그녀에게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었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개방적인 성풍속은 고려속요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작품은 충렬왕 때의 가요인 쌍화점(雙花店)이다.
모두 4절로 된 이 노래는 당시의 퇴폐적인 성윤리가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 있는데,유창한 운율과 아울러
봉건시대의 금기이던 왕궁을 우물로,제왕을 용으로 표현한 점 등은 뛰어난 기교라 하겠다.
내용을 보면 쌍화점에 쌍화(만두)를 사러 갔다가 회회아비(아라비아인)가 목을 쥐고, 삼장사에서는
주지가 손목을 쥐고, 우물에 물 길러 갔더니 용이 손목을 쥔다는 것으로 당시의 성풍속을 가감 없이 표현하였다.
이 작품이 조선 성종 때는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또는 음사(淫辭)라 하여 배척을 받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 표현의 수위를 짐작할 만하다.
충렬왕 때는 원나라의 축첩제도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때 박유가 나서서 일부다처제를 왕에게 권한다.
그가 임금을 호위하여 연등회를 갈 때 어느 할머니 하나가 나서서 " 축첩을 청한 자가 저 늙은이다"고 소리쳤다.
이 소리를 듣고 서로 전하여 손가락질 하니 온 마을에 붉은 손가락이 다발을 이루었다고 한다.
결국 박유가 건의한 축첩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박유가 뭇 여성들의 공격대상이 될 정도로 일부일처제는 그런 대로 지켜지고 있던 것 같다.
고려사에는 "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부인을 하나만 거느리고 아들이
없는 자도 감히 첩을 두지 않았다"는 대목도 나온다.
실제 축첩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논란의 대상이지만 하여튼 고려 때는
남녀관계의 균형이 유지된 사회였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리고 왕실에서는 姓도 경우에 따라서는 외가의 성을 따른 경우도 많다.
4대왕인 광종의 둘째부인이자 2대 왕 혜종의 딸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아버지 혜종의 성이 아니라
어머니 의화왕후 임씨의 성을 따랐다. 5대왕 경종의 둘째부인 헌의왕후 유씨도 외가 쪽 성을 따랐다.
경종의 세 번째 부인은 헌애왕후인데 그녀는 태조왕건의 손녀로서 어머니 선의왕후 유씨의 성을
따르지 않고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성을 따른 경우다.훗날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7대 목종에 오르자 스스로 천추태후라 하며 왕실의 권력을 농단하는 등 패륜을 저지른 장본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풍속은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급격하게 남성중심으로 바뀐다.
고려 말기 안향이 주자학을 들여오고 조선이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유학)를 장려함으로써
남녀의 성역할이 구분되고 남녀차별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