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미녀들
그레이스 켈리 (Grace Kelly)
1929년 11월 12일 (미국) ~ 1982년 9월 14일
170cm, 49kg
배우자 : 레니에 3세
아들 : 알버트 2세
딸 : 캐롤라인 그리말디, 스테파니 그리말디
외손자 : 안드레아 카시라기, 피에르 카시라기
외손녀 : 샬롯 카시라기
50년대 헐리우드에서 활동했으며 모나코의 왕비가 된 신데렐라 스토리로 유명한 미국의 여배우
미국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음
고등학교에서 춤과 연기를 배웠으며 졸업책에 존경하는 배우로 잉그리드 버그만과 조지프 코튼(Joseph Cotten)을 꼽았다고 함
모델로 경력을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와 텔레비전에서 연기를 하다가 마침내 할리우드의 스릴러 영화 "14시간(1951)"에서 단역을 맡게 됨
그러나 관객과 평론가들의 눈에 띄지 않아서(…) 연극무대와 텔레비전에서 활동을 지속하다
1952년 서부극 영화 "하이 눈"에서 게리 쿠퍼의 상대역으로 출연
그리고 1953년 "모감보"에서 클라크 게이블, 에바 가드너와 함께 주연을 맡음
켈리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
"모감보"의 성공은 켈리에게 골든 글로브 상의 영광을 안겨준 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득 역시 안겨주었는데, 바로 앨프리드 히치콕의 눈에 든 것
히치콕은 켈리를 데리고 "다이얼 M을 돌려라(1954)"와 "이창(1954)"을 제작했고,
그전까지만 해도 순진하고 청순한 이미지였던 켈리는 히치콕의 영화로 인해 우아하고 침착한 냉미녀 이미지를 얻게 됨
1954년에는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함
이렇게 스타덤에 올라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화려한 스캔들이 함께 따라왔음(…)
이란의 왕 팔레비 2세,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레이 밀런드,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덴, 올렉 카시니 등등... 이 외에도 염문을 뿌린 상대는 더 많다고 추정됨
이 가운데서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다이얼 M을 돌려라"에서의 상대역이었던 레이 밀런드와의 염문설
사족이지만 밀런드는 켈리보다 22살이나 더 많은 유부남이었음(…)
실제로 켈리가 밀런드와 불륜을 저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염문은 켈리의 커리어를 거의 작살낼 뻔 했음
이후 몇 편의 영화를 찍고 또다시 히치콕의 영화 "나는 결백하다(1955)"에 캐리 그랜트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는데,
화보 촬영차 모나코에 들렀다가 일생일대의 전환이 찾아오게 됨
모나코의 왕족 레니에 3세가 켈리를 초대한 것
이후 레니에 3세는 12캐럿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등 지속적인 구애를 펼쳤다고 함
여담이지만, 재미있게도 켈리의 다음 영화 "백조(1956)"는 유럽 왕실을 다룬 코미디 영화였으며 영화 속에서 켈리의 배역은 공주였음
그리고 그 다음 영화 "상류사회(1956)"는 켈리의 마지막 영화가 됨
켈리가 결국 레니에 3세와 결혼하며 5년만에 영화계에서 은퇴하게 된 것
1956년 4월 18일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레니에 3세와 켈리는 결혼식을 올렸음
이 이후로는 그레이스 공비(Princess Grace)라고 주로 불리게 됨
그녀가 2달러를 선물 받은 뒤 레니에 3세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여 2달러가 행운의 상징으로 등극하기도 하였음
켈리는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서 아들 알베르 2세, 딸 캐럴라인 루이즈 마거릿 그리말디와 스테파니 마리 엘리자베스 그리말디 총 세 명의 자녀를 둠 여담으로 이 덕분인지 이후 모나코에 미국인 관광객이 폭증했다고 함 이 드라마틱한 결혼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 및 추측과 카더라 통신이 있었는데... <세기의 결혼? 그 이면의 이야기>오나시스는 모나코의 위기를 구해낼 비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툭 까놓고 너야 아무 여자랑 결혼해도 되잖아?”
“…에이 오형, 너무한다.”
“시끄러! 지금 나라가 넘어가느냐 마느냐의 상황인데… 지금 전 세계에서 모나코로 관광올수 있는 나라가 어디 있겠냐?”
“그… 글쎄요? 독일이나 영국 아닐까요?”
“너 바보 아냐? 당근 미국이지! 좀 살만한 나라들은 2차대전 때문에 나라가 박살나 버렸는데 독일·영국·프랑스·일본 등등등 웬만한 나라들 다 박살나 있잖아!”
“아… 그렇구나.”
“남은 건 미국 하나 뿐인데… 미국 관광객을 끌어와야 하거든.”
“그렇군요. 근데 그거랑 저랑 무슨 상관이죠?”
“… 네가 인마 미국 여자랑 결혼하면 미국 관광객이 찾아 올 수도 있잖아! 미국에서 잘나가는 여자 한명 데려와서 살아봐봐. 꼴에 너도 왕인데, 미국 애들이 관심 안가지겠냐?”
“그렇구나… 근데 어떤 여자를 데려와야 하죠?”
“지금 미국에서 제일 관심 받는 여자애들은 모조리 할리우드에 가 있어. 괜히 은막의 여왕이겠냐? 할리우드 여자배우들 중에서 지명도 있는 애 하나 고르면 돼 이런걸 두고 일타 쌍피라 하는 거야 인마. 결혼도 하고, 관광객도 몰고 오고…”
“아싸 재수 땡!”
이리하여 오나시스와 레니에 3세는 왕비 후보감들을 물색하게 되는데…
“난 오드리 햅번!”
“야야, 걔는 벨기에 애야. 지금 미국 관광객 데려와야 하는데…”
“마릴린 먼로는 어때요? 인기 짱이잖아요.”
“인기는 좋은데… 흠 근데 걔가 사생활이 좀 시끄러워서…”
“에이, 그런게 어때서요. 원래 할리우드 애들은 다 소문나고 그러는 거 아네요?”
“소문도 소문 나름이지… 걔가 또 백치미가 있어서 관상용으론 좋은데, 왕비감으로는 아니야. 샤넬 CF모델로 뽑으면 또 모를까…”
“그럼 누구로 해요?”
“야, 너 ‘하이눈’ 봤냐?”
“아… 그거”
“그레이스 켈리 어떠냐?”
“그레이스 켈리?”
“애가 참하잖아. 이지적이고… 있는 집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느낌 팍 오지않냐?”
“걔도 소문 안 좋던데…”
“야야, 원래 할리우드가 그런 데라면서? 원래 그런 데니까 대충 신경 꺼라. 그럼 그레이스 켈리로 간다.”
이리하여 오나시스는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중매쟁이로 변신하게 되는데…
“켈리야, 너도 인마 신데렐라 한번 해봐야지 안 그래? 지금이야 영화찍고 잘나가는 거 같은데, 나이 들어봐라. 새파란 애들 치고 올라온다니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잘나갈 때 깔끔하게 정리하고 왕한테 시집가면 얼마나 뽀대나겠냐?”
“……”
결국 오나시스는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를 엮는데 성공하게 된다.
청순한 외모지만 격렬한 것을 좋아하는 침실매너 때문에 때문에 애인들로부터는 "눈덮인 화산"이라는 별명을 들었다고..
레니에 3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식들은 연애 사업(?)이 영 좋지 않음장녀 캐럴라인 공주는 막장으로 살다 좋은 남편을 만나 세 자녀를 출산하나 남편이 사고로 사망하여 과부가 되고...그 이후에는 친구의 남편을 빼앗아 결혼하였으나 그 남편과는 불화로 인해 결국 이혼했고 다행히 세번째 결혼은 그나마 잘 되고 있지만.....차녀 스테파니 공주는 젊은 시절에는 뒷날의 패리스 힐턴처럼 온갖 막장짓으로 부모 속을 썩이더니 그야말로 다양한 남자들과 결혼과 이혼을 수십번 반복하고, 장남 알베르 2세는 자신의 혼외자식들에 질려 도망가려던 여자를 붙잡아 강제 결혼의 위업을 달성(…) 이러니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콩가루 집안 중 하나가 됨1982년 9월 13일, 딸 스테파니와 함께 차를 몰고 가던 중 갑작스런 발작으로 인해 차가 그만 산비탈로 굴러떨어지는 사고가 났음 같이 타고 있던 스테파니 공주는 살아남았지만 켈리는 심한 부상을 입고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다음날인 9월 14일에 사망. 향년 52세
비비안리 ((Vivian Mary Hartley)
1913년 11월 5일 (인도) ~ 1967년 7월 7일
161cm, 47kg
영화계를 조금만 알아도 아니 영화계에 관심 없어도 웬만큼 다 아는 전설적인 여배우 역대 세계 영화 열손가락 아니 다섯손가락 안에도 들어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을 매력적으로 소화하며 일약 세계적인 여배우가 되었음
1913년 11월 5일 영국의 식민지 인도 다질링에서 태어났으며,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계 영국인이며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써 백인 혼혈임
연기뿐만 아니라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도 어린 시절 배워서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알았으며 무용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다고 함
돈 많은 집안에서 외동딸로 자랐고, 덕분에 좋은 교육을 받으며 평생 돈걱정은 하지 않고 삼
인도에서 5세에 영국으로 귀국했고 이후 가톨릭 학교를 다니다가 10대 초반부터
18세때까지 아버지가 유럽 여행을 데리고 다니면서 학교를 몇번씩 전학을 갔다고 함
영국에 돌아온 후 웨스트엔드의 연극 공연을 보고 배우가 될 결심을 하게되고 런던 왕립연극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시작
이 즈음 13살 연상의 귀족인 허버트 리 홀먼과 첫번째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알려진 성인 리 (Leigh)도 여기서 얻게됨
보수적이었던 남편은 그녀의 배우경력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고 그녀는 다니던 학교도 그만 둬야 했음
첫번째 아이 출산 이후(그당시 겨우 20세) 맞지않는 가정주부 생활에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녀는
친구들의 독려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고 곧 자신의 에이전트를 만나게 됨
이후 연극 무대에 데뷔하게 되는데 첫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찬사를 받게됨
이 경험은 그녀에게 좋은 기억이 아니라 나쁜 기억으로 남게 되는데 너무 큰 찬사로 인해 엄청난 부담감을 얻게된것
또한 그녀의 인터뷰에 의하면 자신의 외모가 연기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했으며
외모가 평균 이상인 여배우는 다른 여배우들보다 몇 배 이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했음
여왕님같은 외모랑은 달리 엄청난 노력파로 이건 나중에 발병하게되는 조울증이 더욱 심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함
하여간 그 데뷔 무대를 본 로렌스 올리비에가 비비안에게 다가가고 둘은 곧 불륜상대가 됨
각각 이혼하려 했지만 양쪽 상대가 이혼에 반대하는 바람에 불륜이 되고 만것
리즈 시절의 둘
분명히 자식이 있었다면 엄청난 외모를 자랑했겠지만 안타깝게도 비비안 리의 건강상태가 안좋았던 탓에 몇번을 유산
그 유산 과정에서 그녀의 조울증이 걷잡을수 없이 안좋아짐
배우 초기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고 자신이 스칼렛이 될거라고 예언한 바 있음
그리고 알다시피 전설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정말로 스칼렛으로 출연. 초특급 스타가 됨 원래 배우 다 뽑아놓고 촬영준비단계였으나 유일하게 스칼렛 역만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녀를 본 캐스팅 관계자로 인해 막판에 최종 선발 이경우는 정말로 외모가 도와준 상황. 참고로 그 당시 폴레트 고다드가 유력한 스칼렛 후보자였으나 비비안의 등장+무려 채플린의 불륜상대라는 안좋은 가쉽거리까지 겹쳐져 무산된것으로 알려짐 이후 둘의 커리어를 보면 본인으로선 많이 안타까울듯
비비안 리는 클라크 게이블과 올리비아 드 하빌렌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배우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애쉴리 역의 레슬리 하워드와는 앙숙이었다고영화 개봉후 리와 올리비에는 각각의 파트너와 이혼하고 드디어 결혼 하지만 비비안의 전남편은 비비안 사망 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함
영화배우로서 성공한 이후 그녀의 조울증은 오히려 점점 심해지게 되는데 첫번째로 그녀는 "스타"가 되기보다는
"배우"로 기억되고 싶었으나 대중들은 점점 그녀를 스타로만 인식하기 시작했고
앞서말한 외모에 대한 찬양까지 겹쳐서 그녀는 더더욱 자신의 연기에 대한 자신감을 잃게됨
거기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그녀가 유명해 지기 전에도 찬사받던 배우였는데 결혼 후 연극에서 함께 출연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그녀는 점점 자신의 연기가 보잘것 없는 수준이고 자신은 올리비에의 무대에 누를 끼칠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됨
평단도 여기에 한 몫 했는데 그녀가 스타가 된 후 연극 덕후 평론가들은 "비비안은 영화배우이지 연극배우가 아니다" 혹은
"올리비에가 잘 연출해놓은걸 그녀가 망쳤다", "비비안이 옥의 티였다"라는 식의 평을 계속해서 내놓게 됨
물론 대다수가 그런건 아니었지만 완벽주의자였던 비비안은 이런 소수의 평에도 심한 상처를 입었고
아무리 좋은 연극평이 나와도 나쁜 평에만 집착하는 습관을 가지게 됨
몇번의 유산뒤에 조울증 증세는 더욱 악화되어 심할땐 발작증세를 일으켰다고
주로 연극 투어중에 발병을 했는데 한번 일어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말리는
올리비에를 폭행 (...)하는듯 옷갖 짓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닥에 쓰러져 울다 기절했다고 함
깨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하며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후엔 매우 부끄러워 했음
이런 증세때문에 연극 투어 대부분에서 중도 하차/복귀를 반복.
놀랍게도 이런 발작증세를 평소에는 억누르고 있다가 로렌스 올리비에와 둘만 있을때 보였다는 것
덕분에 언론에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나 비비안을 혼자 돌봐야 했던 올리비에는 개고생을 했고 나중에 이혼한 이유가 됨
이후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게되지만 한쪽이 캐스트되면 한쪽은 실패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결렬
들리는 말에 의하면 원래 관심이 없는 배역이었더라도 올리비에가 캐스트 되었다는 이유 만으로
출연하고 싶어했다고 하니 얼마나 남편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는지 알 수 있음
반대로 올리비에는 점점 그녀의 집착과 조울증에 정신이 피폐해짐
위의 발작이 가장 심했던 호주 투어 당시에는 비비안이 호주 배우와 바람까지 폈는데
이전에 클레오파트라 영화 촬영중 아이를 유산한것에 대한 충격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들 함
투어기간 6개월동안 조울증, 발작에 불면증으로 고생하였고 부부싸움도 잦아짐
이후 올리비에의 말에 의하면 "호주에서 비비안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당시 초특급 스타인 말론 브란도와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출연하면서 또 한번 세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라는 것을 입증
사실 이 영화는 브로드웨이에서 극찬을 받은 연극이 원작인 영화로서 비비안 리를 제외한 모든 배우들이 원작 연극의 출연자들
브로드웨이판 블랑쉐 두보아 (여주인공 이름)를 맏았던 여배우가 이름값/얼굴이 안예쁘다는 이유로 짤리고
비비안이 캐스트되자 다른 출연자들과 감독의 반발이 매우 심했으나 유일하게 말론 브란도만 좋아했다고..이유는 그녀가 섹시해서라고 (...)
이 영화 촬영후로 말론 브란도와 절친이 되었고 이후에도 완벽주의자인 그녀인만큼 엄청난 노력으로 다른 배우들/감독도 그녀를 인정하게 됨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 영화에서 메쏘드 연기를 하지않고 전통적인 연극배우식 연기를 하는 연기자는 비비안 리 뿐
그러나 그녀의 배역 자체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있는 과잉행동을 하는
노처녀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의 연기스타일이 정말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음
그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맡았던 스칼렛이 남부의 몰락을 상징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러했음
블랑쉐 캐릭터 자체가 스칼렛이 레트를 붙잡지 못하고 늙었을때가 연상되는 캐릭터였던 것 (...)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두번째로 수상하지만 이 배역에 너무 몰입한 그녀의 조울증이 악화되고 맘
안그래도 이 영화전에 연극에서도 블랑쉐 두보아 역을 맏았는데 영화 촬영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9개월간 정신이상자 역을 연기한것
리 본인도 블랑쉐 두보아 역할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음
결국 1958년에 별거, 1960년에 이혼
그 이전까지도 올리비에와 연극활동을 함께 했었음
영화활동은 1961년에 당시 애송이 배우이던 워렌 베이티와 찍은 <어리석은 자들의 배>란 영화에서
젊은 남성과 사랑하는 노부인 이야기를 연기한 것이 마지막이 됨
말년에 그녀가 영화출연을 하지 못하고 잊혀져 간것을 슬퍼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틀림
앞에도 썼듯이 스타가 되는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배우로서만 인정받기를 원했음
본인도 연극배우로서 성공하는것을 더욱 큰 업적으로 생각했음
말년에 우울증이 심해지고 건강 악화로 인해 연극에도 자주 설 수 없게됨
폐결핵에 걸리게 된 사유는 흡연. 하루 3갑 이상을 피울 정도였다고
1967년 7월 8일 오랜 투병 끝에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올리비에 사진을 꼭 쥐고 있었다고 함
올리비에와 비비안리는 이혼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했지만, 이미 다른 사람과 사는 관계로 더 이상의 관계로는 이어지지 못했음
비비안리가 죽을 당시 존 멜리발이라는 배우와 동거중이었는데, 멜리발은 리의 죽음을 확인 후 막바로 올리비에에게 연락했고,
리의 집에 도착한 올리비에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고....올리비에는 리의 장례식을 실질적으로 준비했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그녀 생전의 세 남자, 홀만 박사,올리비에 경과 존이 함께 했음
조안 플로라이트의 인터뷰에 의하면 리가 죽은 뒤 올리비에가 한밤중에 그녀의 영화를 돌려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함
여담으로 허리 사이즈가 19인치인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이건 기절할 정도로 코르셋을 조인 상태의 이야기고 실제 비비안 리의 허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할 당시에 23인치였다고키가 160이 약간 못되는 걸 감안하면 오늘날의 마네킹 평균 허리 사이즈 비례에 약간 뒤처지는 수준
뉴욕타임즈는 이런 평을 남긴바 있음
"비비안 리만큼 아름다운 배우에게는 연기력이 필요없을 것이다, 비비안 리만큼 연기력이 훌륭한 배우에게는 아름다운 모습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마릴린 먼로 (Marilyn Monroe)
1926년 6월 1일 (미국) ~ 1962년 8월 5일
166cm
세기의 섹스 심벌이자 비극적인 사생활로 잘 알려진 여배우
정신장애가 있는 모친의 사생아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나 고아원과 양부모 집에서 양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등,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힘든 환경에서 도피하고자 같은 학교 연극반이었던 제임스 도거티와 16세 때 결혼을 했지만 이런 결혼이 늘 그렇듯이 4년 만에 헤어짐 먼로를 맡아 기르던 위탁가정의 부모가 멀리 이사를 가는데, 법적인 문제로 먼로를 데려갈 수 없고 그렇다고 아직 어린 소녀를 그냥 내버릴 수도 없어 후다닥 결혼을 시킨 거라고 함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방위산업체에서 페인트 분무기를 뿌리는 일을 하다가 부대 사진작가의 눈에 띄어 모델이 됨
달력의 누드 모델로 일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47년 <쇼킹 미스 필그림>이라는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여 스크린에 데뷔
그 후로도 단역을 전전하다가 1950년에 <아스팔트 정글(The Asphalt Jungle)>,
<이브에 관한 모든 것(All About Eve)>에 출연하여 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음
53년에 <나이아가라>의 주연을 맡아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되는데 20세기 폭스사는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먼로 워크를 중심으로 화려한 선전을 전개, 그녀를 세계적인 섹스 심벌로 만들었음
이후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 <백만 장자와 결혼하는 법>, <돌아오지 않는 강>, <7년 만의 외출(그유명한 환풍기씬)>,
<버스정류장>, <왕자와 무희>, <뜨거운 것이 좋아> 등의 영화에 출연
금발의 백치미인 컨셉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실제로는 똑똑했다고 함
<마릴린 먼로가 <율리시스>를 읽다>라는 유명한 사진에는 그녀가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인 율리시즈를 읽고 있는 모습이 찍혀있음
진짜로 읽었는지 궁금했던 한 영문과 교수가 기자에게 문의한 결과 진짜였다고...
물론 이 책을 읽는 행위가 똑똑함의 척도가 될 수는 없지만, 영미문학계에서 이 책이 지니고 있는 권위와 책이 가진 괴랄한 난이도를 생각하면...
그리고 로렌스 올리비에는 먼로가 자신이 이제껏 공연한 여배우들과 비교해서도 전혀 뒤지지 않는 재능과 열정을 소유하고 있다고 했고,
아서 밀러(세일즈맨의 죽음의 저자)가 그녀와 결혼을 한 이유 중 하나가 먼로의 지적인 면에 반해서였다고 전해짐
또한 여성 운동 등에도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양부모에게 성추행당한 과거를 고백하는 등, 당시로선 앞서가는 의식을 지녔었다고 함
게다가 마릴린 먼로 자신은 자기를 정상의 자리에 올려 놓은 백치미 컨셉에서 벗어나
진정한 연기력을 키우고 싶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멍청한 금발 미녀"라고만 기억하고 있음.....
먼로의 마지막 완성작 <The Misfits>에서는 번번히 촬영장에서 지각을 해서,
클라크 게이블과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불쾌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아로 자란 먼로가 평생동안 가지고 있던 정서불안,
자신의 연기나 사람들의 거절감에서 오는 두려움 등등에서 기인했음. 아마 약물중독도 원인이었을 듯...
결혼은 1942년, 16세 때 항공사 정비공으로 일하던 짐 도허티와 치룸
그러나 4년 만에 먼로가 모델 일을 하는 문제로 헤어짐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두번째 결혼을 했으나 또다시 이혼
두 사람의 사이는 한국 위문 공연 이후 틀어지기 시작
결국 디마지오는 마릴린 먼로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기에 이름
어찌나 맞았는지 이 시절의 마릴린 먼로는 얼굴의 멍을 감추기 위해 늘 짙은 화장을 해야 했었으며
심지어 야구 선수였던 디마지오는 야구 배트까지 동원하며 폭행하기에 이름. 나쁜놈
한국전쟁당시 위문 공연온 먼로. 한겨울에도 군인들을 위한 과감한 패션
둘 다 자존심이 세서 자주 다투었다고 함. 이미 전성기가 끝난 디마지오보다 마릴린의 인기가 더 있었고(...) 그것이 한 때는 야구선수로서 남부럽지 않은 큰 영광을 누리던 디마지오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던 것당시 이 부부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먼로가 많은 청중에 둘러싸여서 환호를 받으면서 "이 기분을 당신은 모를거에요" 그러자 디마지오가 "잘 알아" 이렇게 대답했다고 함. 결국 디마지오와도 이혼
이후 극작가 아서 밀러와 세 번째 결혼을 했으나 실패로 끝나는 등 사생활은 불행하였음
그다지 중요한 얘기는 아니지만 밀러는 매카시즘에 휘말렸을 당시 의원 한명한테 아내 먼로와 사진을 찍게 해주면
사면해주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밀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밀러와 이혼 후 이런 저런 추문에 휩싸였음. 촬영 중에는 각성제 및 음주...로 대본을 못 읽을 정도였다고
어느 날인가 중요한 촬영을 고의로 펑크내고 대통령 생일잔치에 참가해서 노래를 부르는 추문을 일으켜 바로 해고되었고 이후 은둔생활을 하였음
62년 8월 5일 그녀의 방 침대에서 나체로 죽은 채 발견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수면제 과다복용에 의한 사망으로 되어 있으나,
존 및 로버트 케네디 형제와 친밀한 관계였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녀의 죽음에 마피아 조직이 개입된 모살설도 끊임없이 나돌고 있음
브룩 쉴즈 (Brooke Shields)
1965년 5월 31일 (미국)
183cm
80년대 중후반에 피비 케이츠, 소피 마르소, 왕조현과 함께 한국의 남학생들의 책받침에 모셔져 있던 여신 이 넷중에서도 브룩 쉴즈가 가장 최고의 인기를 누림. 제 2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이 있었을 정도
뉴욕에서 최상류층 부부의 사이에서 태어났음. 아버지 프랭크로부터는 이탈리아, 프랑스, 아일랜드, 영국의 혈통을,
어머니 테리로부터는 독일, 영국,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웨일즈의 혈통을 물려받았음
그러나 쉴즈가 부모는 쉴즈가 태어난지 몇달만에 이혼
아버지쪽으로 그 유명한 보르지아 가문과 메디치 가문의 피가 흐름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룩 쉴즈의 친할머니가 이탈리아 귀족. 그래서 이탈리아 귀족 및 기타 유럽 왕실 및 귀족의 후손임
이때문에 한때 큰 키,미모,유명세,지능,학벌에 가문까지 좋은 쉴즈를 모나코 왕실에서 며느리감으로 점지하기도..
물론 브룩쉴즈가 아까움..당연히 쉴즈쪽에서 거부했음
5세부터 끼를 보였다고 하나, 첫 데뷔는 무려 한살때인 1966년에 아이보리 비누선전에 나왔음
물론 화장품 회사의 대표였던 아버지와 여배우였던 어머니의 빽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었겠지만, 애초에 본인도 부정하지도 않음
이후 아역 배우로 성공했고, 1978년 12살때는 성매매 소녀 역을 맡은 "프리티 베이비"라는 영화에 나와 연기력으로 호평받았음
14살때는 패션잡지인 보그지의 표지모델이 될 정도로 빼어나고도 성숙한 미모를 자랑함
특히 183cm의 장신에서 나오는 우월한 기럭지가 백미
15살때 나온 캘빈클라인진 광고사진.
광고문구가 "캘빈클라인 진과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요"라서 여기저기서 외설시비로 금지먹기도 했음
1980년에는 '푸른 산호초(The Blue Lagoon)'라는 영화에 출연했는데,
미성년자임에도 많은 누드와 성관계가 나와 논쟁을 일으켰음
이 영화는 많은 논란을 불렀고 의회에서 청문회까지 열렸는데, 쉴즈는 베드신은 대역을 썼다고 증언여담이지만 이 영화는 피비 케이츠가 주연한 파라다이스와 매우 비슷한 스토리 그리고 미성년자 연인의 성관계를 묘사해서 큰 파장을 불렀지만, 현재는 Endless love라는 주제가만 유명한 동명의 영화 endless love 에 출연했음 그리고 쉴즈는 이 영화로 첫번째 골든 라즈베리 최악의 여우주연상을 탔다(…) 어쨌든, 이렇게 탑레벨 배우 답지 않게 색기있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음 1984년에는 바다가 배경인 TV영화인 Wet Gold에서 원피스 수영복 차림으로 나와 육감적인 몸매를 과시하기도 함그러나 이후에는 아역 배우의 한계인지 더이상 정상의 자리에 있지 못하고 그저 그런 배우가 됨 결정적으로는 브룩 쉴즈의 섹시한 이미지를 이용하려는 배역 제의가 많았는데, 쉴즈는 자신의 이미지가 그쪽으로 굳어질까봐 계속 거절했고, 그러다보니 영화계에서 점점 출연할 기회가 뜸해진 것 게다가 어렸을때부터 계속 연예계 활동을 한지라 이미지 소모가 너무 많아서식상감이 온 탓도 있음. 전형적인 아역 딜레마.
성인이 된 후 지나치게 노출연기에 몸을 사린다는 비판을 받자 1996년에는 성인이 되고 난 후 처음으로 잡지용 누드사진을 찍은 바 있음영화쪽으로는 주연으로는 1990년대는 거의 출연하지 못했고, 조연으로 TV 시트콤이나 TV 영화에만 간간히 얼굴을 내비치는 정도 그때문인지 우울증에 걸려서 꽤 고생도 했다고.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래도 조연이나마 꾸준히 TV와 영화에서 작품활동을 해오고 있음1988년에 한국에 한국계 코메디언 쟈니윤, 유명한 코메디언 밥 호프와 함께 올림픽 기념 공연 겸 주한미군 위문을 위해 방한한 적이 있음 쟈니 윤과 꽤 친하다고. 이때 쟈니윤과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긴 했는데, 노래실력은 외모에 못미쳤다는게 중론1997년에 테니스 스타인 안드레이 아가시와 결혼한 후 2년만에 아이없이 이혼했고(동거는 1993년부터 시작.), 현재는 TV 작가인 크리스 헨치와 부부. 자식은 무남 2녀
인공수정 및 우울증약의 부작용으로 호르몬 이상이 생겨 외모가 많이 망가졌음 말단 비대증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호르몬제의 부작용이 와전된 것으로 보임 브룩 쉴즈의 키가 웬만한 여자 농구선수랑 비슷한 183cm. 그래서 이런 소문이 퍼진듯
소피 마르소 (Sophie Marceau)
1966년 11월 17일 (프랑스)
173cm
1남 1녀 1980~1990년대의 한국 청소년들을 사로잡은 외국 미인 여배우(브룩 실즈, 피비 케이츠, 왕조현 등등)들 중 하나
국내의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실시한 미인투표에서 1위로 뽑혔음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로 프랑스 영화는 거의 개봉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인지도는 웬만한 미국 배우 못지 않음
프랑스 파리에서 소피 다니엘 실비 모퓌(Sophie Danièle Sylvie Maupu)라는 이름으로 가게 종업원인 시몬 모리세(Simone Morisset)와 트럭 운전수인 브누아 모퓌(Benoît Maupu) 사이에서 둘째 아이로 태어났음 유년 시절 마르소 가족은 노동자 계급의 삶을 살았는데, 이것은 그녀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음 그래서 그런지 백인우월주의 극우 정당 FN(국민전선)이 예상을 뒤엎고 사회당을 이기고 대통령 결선투표(1, 2위가 다시 붙는 제도)에 오르자 소피 마르소는 이를 적극 반대하는 운동에 뛰어듬그녀는 주중에 가족의 식당 일을 도왔으며, 주말에는 에손(Essonne) 주의 베르 르 프티(Vert-le-Petit)에 위치한 작은 집인 라 카반(La Cabane)에서 지냄. 9살 때 부모는 이혼
1980년 2월,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는 10대를 위한 모델 에이전시를 찾고 있었고
마르소는 그녀의 사진을 에이전시에 가지고 갔으나 아무 것도 올거란 생각을 하지않고 있었음
같은때 클로드 피노토(Claude Pinoteau) 감독 영화 라붐(La Boum, the party)의 캐스트 감독이었던
프랑수아즈 메니드레(Françoise Menidrey)는 프로젝트를 위해 모델 에이전시에 추천할 것을 물어봄
수많은 면접을 거친 후, 고몽(Gaumont) 영화사의 감독인 알랭 푸아레(Alain Poiré)는 마르소와 장기계약을 맺음
10대 청춘물인 라붐(1980년)은 프랑스에서 450만의 관객을 불러들일 정도로 대히트했고, 속편격인 라붐 2(1982년)도 프랑스와 유럽에서 매우 큰 성공을 거둠 특히 애들이 참 쑥쑥 자란다.. 주제가 "Reality"(라붐1), "Your eyes(라붐2)"이
오히려 한국에서 영화보다 더 알려졌음. Dream is my reality~
2010년대에 와서야 EBS에서 소피 마르소 특집으로 라붐 1과 2, You call it love가 방영해주었으니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랄까...
1981년, 그녀는 프랑스 가수 프랑수아 발레리(François Valéry)와 같이 델라노에(Delanoë) 작사의 곡인 "Dream in Blue"로 가수 데뷔
1982년, 16세가 된 그녀는 고몽과의 계약을 100만 프랑스 프랑으로 올려 계약하고, 대부분의 돈을 받게 되었음
라붐 2를 비롯한 여러 영화에 주연이 된 그녀는 1984년에 Fort Saganne(제라르 드파르디외와 카트린 드뇌브와 공동출연),
Joyeuse Pâques(행복한 부활절)에 출연하며, 1985년에는 영화 "L'Amour Braque"와 "Police",
1986년에는 "Descente aux Enfers"(한국 개봉명 : 지옥에 빠진 육체)에 출연
여담이지만 이 영화에서 라붐에서 아버지역으로 나왔던 클로드 브라쇠르(Claude Brasseur)와 부부로 나오며
전신누드가 포함된 정사신을 펼쳐서 그녀의 청순한 모습을 기억하던 한국팬들을 데꿀멍시킨 적이 있음
이 때 나이가 만 20세. 라붐의 성공으로 "아이돌"로 각인되었던 그녀의 이런 노출연기는 매우 이례적이고 충격적이었음
1988년, "L'Etudiante"(한국개봉명: 유콜 잇 러브)과 Chouans에 출연
노르웨이의 여가수 카롤리네 크뤼거(Karoline Krüger)가 부른 'You call it love'가 잔잔히 깔리는 오프닝은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드러내는 소피 마르소의 자태는 클로즈업에도 아름다운 얼굴선과 함께
깨끗한 피부를 자랑하며 뭇 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음. 소피 마르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아닐까싶음
Chouans에서도 그녀의 역할로 국제 로맨틱 영화 페스티발에서 최고의 로맨틱한 여배우로 이름을 굳힘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나면 당시 미인 여배우로는 만렙의 위치인 미국의 여배우인 브룩 실즈(Brook Shields)에 대한 대항마 취급
하지만 브룩 실즈가 90년대 들어서 철저하게 잊혀진 거와 달리 그녀는 꾸준히 연기를 하며 헐리웃까지 진출하여 계속 활동중
1989년, 그녀의 남자친구인 안제이 주와프스키(Andrzej Żuławski, 1940.11.22- )가 감독한 영화
"Mes nuits sont plus belles que vos jours"(내 밤은 네 낮보다 더 아름다워)에 출연
1990년, 그녀가 만든 회사의 3번째 필름인 "Pacific Palisades" 와 "La Note Bleue"에 출연
1991년, 마르소는 유리디체(Eurydice)의 극장에 투자해 최고의 신인 여배우를 위한 상인 몰리에르 상을 받았음
1993년 영화 팡팡(Fanfan)과 1994년의 "La Fille de D'Artagnan"(달타냥의 딸)을 기점으로 덜 드라마틱한 영화를
만들게 된 마르소는 유럽과 해외에서 유명해졌으며 그녀는 피그말리온의 엘자 돌리틀 역으로 연극으로 돌아옴
마르소는 1995년 멜 깁슨 감독, 주연의 "브레이브 하트"에서 이사벨 공주 역으로 미국을 포함한 국제적 인지도를 얻게 되었고
유명한 프랑스 영화감독인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Michelangelo Antonioni)와
빔 벤더스(Wim Wenders)와 함께 영화 Beyond the Clouds에서 국제적 배우로서 호흡을 맞췄음
1997년, 그녀는 영국에서 윌리엄 니콜슨과 영화 "Firelight"를,
프랑스에서 베라 벨몽드와 영화 Marquise을 촬영하고 버나드 로즈와 안나 카레리나(Anna Karenina)를 찍었음
1999년 한여름 밤의 꿈에서 히폴리타를 연기했으며,
007 영화 "The World Is Not Enough(국내에는 007 언리미티드)"에서 악당 본드걸인 엘렉트라 킹을 연기
2000년에 그녀는 남자친구인 안제이 주와프스키와 팀을 이뤄 영화 "La Fidélité(한국개봉명: 피델리티)"를 찍었음
그녀보다 26살 연상인 폴란드 출신의 영화감독, 안제이 주와프스키와 17년간 관계를 맺어왔으며 1995년 6월에 아들 뱅상(Vincent)이 태어남
2001년 마르소는 그와 이혼해 프로듀서 짐 렘리와 사귀면서 그녀의 두번째 아이인 줄리엣이 2002년 런던에서 태어남
그녀는 현재 미국계 프랑스 동료배우 하이랜더 크리스토퍼 램버트와 연애중
2002년 영화 <사랑한다고 말해줘/Parlez-moi D'amour> 를 감독하여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감독상을 받기도 했고
2007년에 2번째 감독 영화 <트리비알>을 감독하며 크리스토퍼 램버트와 주연도 맡았음
이처럼 청순하기만한 얼굴과 달리 직접 영화감독을 맡기도 하고 '거짓말장이'라는 제목의,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한 반자전적인 소설을 쓰기도 하는 등 지적인 면도 많이 갖추고 있기도
그가 출연한 영화중에는 영어로 된 작품도 많은데 영어대사를 완벽히 소화해 내는것으로 보아 언어능력도 수준급인 듯
2009년에는 디올의 화장품 광고 모델로 발탁. 참고로 1989년에 이미 국내 화장품 광고(드봉)로 티브이 모델로 나온 바 있음 이 때 한국 스탭들과 같이 뒤풀이를 했는데 한국인들은 소피 마르소가 술을 못하거나 아니면 한두잔 할 줄 알았는데, 매실주를 한병 다 마시고도 전혀 술기운이 돌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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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무싸 여주 이런식으로 소비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