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20권, 1년(1609 기유 / 명 만력(萬曆) 37년) 9월 24일(임인) 3번째기사
궁궐의 건축 중지를 사헌부에서 건의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물력(物力)으로 2년 이내에 양궁(兩宮)을 이미 거의 다 지었으니, 밑빠진 항아리에 끊임없이 들어가는 비용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지금 다시는 남은 재물이 없어 공사간에 빈털털이로 서 있는데, 공사는 끊이지 않아 장인(匠人)과 일꾼들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
"진실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크고 작은 토목 일을 모두 중지하소서.”
전교하기를,
“궁궐의 역사는 거의 끝나가니, 이때에 모두 중지할 수는 없다. 이 뜻을 도감에게 말하여, 관원이나 공장(工匠) 가운데 줄일 수 있는 사람은 줄이도록 할 일을 의논하여 아뢰라.”
광해 21권, 1년(1609 기유 / 명 만력(萬曆) 37년) 10월 22일(경오) 2번째기사
창경궁 수리에 사용할 재목·요포 및 재료의 준비에 대해 궁궐 영건청이 건의하다
“내년에 창경궁을 수리할 때 쓸 재목을 지금 미리 조치해야 하는데, 나무를 베고 끌어내리는 데 있어서 백성들을 억울하게 부릴 수는 없습니다. 전라도 부안(扶安), 충청도 서산(瑞山) 등지에 낭청으로 하여금 목수들을 데리고 내려가서 벌채하게 하고, 6, 7동(同)의 포목을 경비로 하여 민가의 소를 고용해서 끌어내리게 하여 이른 봄에 배로 운반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강원도의 수로에 가까운 6, 7읍에는 포목 7동으로 재목을 사서 뗏목을 만들어 얼음이 풀리는 즉시 떠내려보내게 하면 제때에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서까래로 쓸 재목도 한 사람의 낭청을 장연(長淵)에 보내어 포목 2동을 지급하여 인부를 사서 벌채하게 하고 본도로 하여금 금년에 한 예대로 실어보내게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이에 소요되는 포목의 통계는 17, 18동인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올 데가 없습니다.
광해 24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월 7일(갑신) 2번째기사
행궁의 추가 건립 중지에 대해 사간원에서 연계하다
"전쟁으로 모두 불타버려서 행궁(行宮)이 오래도록 누추한 여염에 있으므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항상 민망해 하고 근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함께 미약한 힘을 다하여 쌀과 포목을 애써 모아 형세의 어려움을 헤아리지 않고 큰 역사를 일으켰는데, 다행히도 옛터를 다시 개척하여 법궁(法宮)이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비록 어쩔수없는 일이었다고는 하나 어려운 시기에 큰 역사를 거행함이 이보다 심한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크고 화려한 미관은 평소보다 한층 더하고 전각의 건립은 거의 옛 제도를 회복하였으니 충분히 중국 사신을 접대하며 신하들을 조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삼가 비망기를 보니, 목재를 수송하고 돌을 다듬으며 기와를 굽는 일을 봄이 오면 시작하라는 하교가 있으니, 보고 듣는 이마다 온통 번민하고 절박해 합니다."
"난리를 겪은 뒤 살아 남은 민생은 모두가 조금은 쉬어야 하는데 국가의 불행으로 산릉(山陵)의 역사를 겨우 마치자 조사(詔使)가 겹으로 도착하니 한푼이라도 은혜를 베푸는 것은 없고 백 가지 노역만 모여들어 탄식하고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칩니다. 게다가 지난해의 흉년은 전에 듣지 못하였던 바라 안팎의 굶주린 백성이 노인과 어린이를 이끌고 사방으로 흩어지며, 천재와 시변이 겹겹이 출현하고 변방에는 염려스러움이 많아 변란에 대비하기가 다급하니, 백성들을 구제하고 미리 대비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이 정녕 어떠한 시기라고 또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힘을 거듭 곤궁하게 한단 말입니까. 설령 더 건립하여야 할 곳이 있다 하더라도 이어(移御)하신 후에 힘을 비축하고 시기를 기다려 점차적으로 이루어 갈 것이지 하필 일시에 아울러 거행하여 덩달아 급하지 않는 역사까지 하려 하십니까."
"토목의 역사는 비록 풍성함을 누리는 태평 시대라도 오히려 가벼이 거행하기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지금은 즉위 초년의 어려운 때이니 더욱 주의하여야 합니다. 바라건대, 궁궐을 더 축조하라는 명을 거두시어 백성의 힘을 덜어줌으로써 하늘의 꾸중에 답하소서.”
광해 24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1월 7일(갑신) 3번째기사
행궁의 축조 중지를 사헌부에서 건의하다
"지난해의 흉년으로 백성들은 굶주리고 남쪽의 방어는 크게 붕괴되었는데 북쪽의 소식은 매우 급하니, 근심스럽고 위험한 현상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오로지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돌보아 미연에 대비하는 것이 급선무인데 어찌 다시 토목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원성과 하늘의 노여움을 더하여서야 되겠습니까."
"더구나 대내의 전각은 이미 대략 갖추어졌는데 하필 다시 경영하여 무익하고 급하지 않은 공사를 하려고 하십니까. 그리고 지금은 국가나 민간의 저축이 바닥난 상태이므로 장인들이 쓸 재료의 비용을 앞으로 백성에게서 거두어 내어야 할 형세이니, 그 백성의 폐해를 어찌 이루 말로 다하겠습니까."
광해 26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3월 20일 6번째기사
차관을 해서에 보내 궁궐 지을 재목을 감독케 하다
광해 26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3월 26일(임인) 1번째기사
경연에서 여악 설치 등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다
"또 신이 사사로운 일로 전라도를 왕래하였었는데 처음 보는 그곳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궁궐 재목을 또 배정하니 다시 새 궁궐을 세울 모양이다.’라고 합니다."
광해 31권,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7월 16일(기미) 15번째기사
호조에서 은의 수집에 대해 아뢰다
전교하기를,
“십분 강구하여 바람직한 쪽으로 시행하라. 곧 끝날 궁궐의 공사는 정지시킬 수 없다."
광해 111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1월 29일(을미) 1번째기사
선수 도감이 새 궁궐 짓기의 곤란함을 아뢰다
"도감에 남아 있는 얼마 안 되는 쌀과 포목으로는 몇달의 지공도 지탱해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전(殿) 하나를 먼저 짓고자 하더라도 반드시 터를 닦고 담장을 쌓은 뒤에야 전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남아 있는 이 자본으로는 반드시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백방으로 생각해 보아도 몹시 답답하기만 합니다. "
광해 116권, 9년(1617 정사 / 명 만력(萬曆) 45년) 6월 28일(신유) 4번째기사
영건 도감이 도성내에 궁궐이 많음을 지적하다
“신들이 삼가 생각건대, 이미 창덕궁·창경궁·경운궁 등의 궁궐이 있는데 신궐을 또 짓고 있는바, 한 도성 안에 궁궐이 지나치게 많은 듯합니다. 그런데 지금 또 서별궁에다 전우(殿宇)를 조성해서 궁궐 모양을 만들 경우, 철거를 당한 무지한 백성들이 어찌 국가의 사세상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하소연하면서 원망하는 소리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민정(民情)이 관계된 바로, 이 역시 염려하여야 합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금 생각을 더하시어 결단을 내리셔서 편의한 데 따라 잘 처리하소서. 그러면 몹시 다행스럽겠습니다.”
광해 126권, 10년(1618 무오 / 명 만력(萬曆) 46년) 4월 26일(을묘) 10번째기사
영건 도감에서 번와소의 땔나무 문제로 아뢰다
광해 139권, 11년(1619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4월 27일(경진) 2번째기사
영건 도감이 두 궁궐의 역사 중 하나를 중지할 것을 청했으나 불윤하다
광해 138권, 11년(1619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3월 17일(경자) 2번째기사
양사가 영건과 친경의 중지 등의 일로 체직을 청하나 윤허하지 아니하다
광해 144권, 11년(1619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9월 1일(경진) 3번째기사
신궐 영건 도감이 궁궐 공사를 중지하고 처소를 옮기도록 아뢰다
"경덕궁은 이미 지은 칸 수가 1천 5백 칸에 달합니다. "
나중에 경복궁도 욕심이 나는지 찾아오긴 하는데,
분위기가 정말 여기까지 손대면 큰일 날 분위기라 "그냥 구경 한번 와본거 ㅇㅇ" 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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