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주소 복사
공지가 닫혀있습니다 l 열기
피자에핫소스를촵촵ll조회 10392l 4
이 글은 10년 전 (2013/8/12) 게시물이에요

무장BEST7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조운(趙雲)  ? ∼ 229년

 

유비(劉備) 막하의 용장. 상산 진정(常山 眞定) 사람으로 자는 자룡(자룡). 사람을 대할 때는 부드럽고 의리를 중하게 여겼다. 훌륭한 창법

으로 수많은 싸움에서 전공을 세움. 오호장군(五虎將軍)의 한 사람으로 청홍검(靑紅劍)을 소지 한 것으로 유명. 본디 원소(袁紹) 관할에 있

다가 그의 인품에 싫증을 느껴 공손찬(公孫瓚)을 위기에서 건져주고 그의 막하에 들었다. 거기서 유비와 알게 되고 서로 몹시 흠모하게 되

었다. 공손찬이 망한 뒤 오관참장(五關參將)하고 오는 관운장과 유비, 장비를 함께 만나,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이들과 고락을 같이하였다.

 당양파(當陽坡) 싸움에서는 단기필마로 유비의 부인인 감부인(甘夫人)을 구하고, 미부인(夫人)이 임종에 맡긴 아두(阿斗)를 품에 안고

적진 중을 돌파하여 용명을 떨쳤다. 유비가 서촉(西蜀)에 출병한 사이 손부인이 아두를 데리고 동오(東吳)로 가는 뱃길을 따라가, 이때 역시

아두를 도로 찾아 돌아왔다. 214년에는 성도(成都) 공격의 일익을 담당하여 출진 했고, 219년에는 한중(漢中) 공방전에서 정찰도중 위(魏)

의 주력 부대를 만났으나 뛰어난 전술로 후퇴에 성공하여 찬탄을 받았고 한중에서 황충(黃忠)을 구해냈다. 유비가 관우의 원수를 갚고자 출

병하였을 때도, 반대를 무릅쓰고 강주(江州) 수비에 나서 용감히 싸워 패군 한 유비를 도왔으며, 228년,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위를 치고

자 기산(祁山)에 출전하였을 때는,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건만 참오장(斬五將)이 되어 등지(鄧芝)와 함께 양동작전으로 기곡(箕谷)에 진주

했다가 조조의 대군을 만나 소수의 군대로 잘 싸우고 적장 한덕(韓德)의 5부자, 다섯 장수를 혼자서 싸워 죽여 용맹이 쇠하지 않음을 보였

다. 제갈량이 재차 위(魏)를 치기에 앞서 세상을 떠났다. 일생을 전진 중에 달리면서 번번이 그만큼 큰공을 세우고도 와석종신(臥席終身)하

였음은 진실로 복장(福將)이라 하겠다. 일의 처리에 있어 실수가 없이 거의 완전무결하게 처리한 둘도 없는 충신. 아들에 조통(趙統)·조광

(趙廣)이 있어 촉한에 벼슬하였으나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관우(關羽) ? ∼ 219년

 

하동(河東) 해량현(海良縣) 사람으로, 자는 운장(雲長). 유비와 도원에서 결의한 이래 고난을 같이하였다. 삼국지 연의가 이루어졌을 때는

이미 민간에서 널리 신으로 모셔졌을 때라, 관공(關公)이란 칭호로 등장한다. 작자도 전편을 통하여 충의의 화신으로서 주인공을 삼아 그려

냈다. 사수관(水關) 싸움에서 동탁 수하의 맹장 화웅(華雄)을 단칼에 베어 용명을 떨친 이래, 계속 삼국 명장으로서의 명성을 지녔다. 한

대 곤경에 빠져 조조를 의지했으나, 끝내는 단기로 오관참장(五關參將)하고 유비 가족을 모셔 의기(義氣)를 빛냈으며, 뒤에 형주(荊州)를

차지해 앉아 움직이지 못할 위엄을 보였다. 그러나 지나친 자존심이 화근이 되고 양양(襄陽)을 뺏으려 추병한 사이, 오(吳)의 기습을 받아

궁지에 빠진 끝에 죽음을 당하니 건안(建安) 24년 10월의 일이요, 향년 59세였다. 자주 영검을 보이어 여몽(呂蒙)을 죽이고 아들 관흥(關興)

을 시켜 원수를 갚게 하는 등, 어디까지나 신격화시켜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재신(財神)의로 신봉되어 민간의 신앙이 대단하다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장비(張飛) ? ∼ 221년

 

촉(蜀)의 무장(武將). 자는 익덕(翼德). 하북성(河北城) 탁군(郡) 사람. 유비와는 동향이나, 선대의 고향을 따져 연인(燕人) 장익덕으로 통

하였다. 유비·관우와 도원 결의한 이래로 계속 고난을 같이하여 용명이 무쌍하였다. 유비나 관우가 독서한 사람으로서 상당한 교양을 쌓은

데 비해, 무식하고 졸직(拙直) 단순한 성격과 인간미로 많은 독자의 공명을 받는다. 술이 과하고 부하에게 혹독하게 대하여 실수가 많았으

나, 관우와 더불어 당대 최고의 용장으로 일컬어지며, 특히 형주(荊州)에 있던 유비가 조조(曹操)의 대군에 쫓겨 형세가 아주 급박하게 되었

을 때 당양 장판(當陽 長坂) 싸움에서 장판교(長坂橋)위에서 "내가 장익덕이다."하고 일갈하여 조조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이래 용명이 전

국에 떨쳤고, 중년 이후는 전술도 제법 원숙하여졌다. 서촉을 취하러 가는 길에는 엄안(嚴顔)을 꾀로 잡아 의로 풀어 주어 귀순시키는 등 큰

공을 세워 파서 태수(巴西 太守)가 되었다. 한중 싸움에서는 와구관에서 술에 묻힌 체 위(魏)의 명장 장합(張)을 유인하여 크게 이겼고,

마초(馬超)와도 좋은 싸움을 벌였다.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거기장군(車騎將軍), 사예교위(司隸校尉)에 임명되었다. 관우가 전사한 뒤로는

 거의 광적(狂的)일 만큼 복수심에 불탔는데, 군사를 움직이려는 전날 밤 수하 장수 손에 싱겁게 목숨을 잃었다(55세). 역시 부하에게 심하

게 대했던 보답이었는데, 그의 성미가 어찌나 급했던 지는 항간(巷間) 속담에 '장비 군령(軍令)이냐?'는 문자가 통용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들 장포(張苞)는 대를 이어 촉한(蜀漢)의 장수로 활약하다 죽었고 딸은 후주(後主)의 황후가 되었다. 오호장군(五虎將軍)의

 한사람으로 시호는 환후(桓侯). 후주 유선(劉禪)의 장인. 벼슬은 거기장군이며 18자나 되는 장팔사모창을 사용.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고순(高順) ? ∼ 198년

 

여포(呂布)의 휘하 장수. 여포가 조조(曹操)·유비(劉備)와 서주(徐州)에서 싸울 때 유비가 근거한 패성(沛城)을 급습하고, 조조가 구원하기

 위해 보낸 하후돈(夏侯惇)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뒤에 여포가 하비성(下城)에서 조조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조조 측으로 배신한 후성(侯

成)에게 잡혀 조조(曹操)가 여포를 죽일 때 같이 죽음.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장료(張遼)

 

위(魏)의 용장. 안문 마읍(雁門 馬邑) 사람으로, 원래 성은 섭(攝)이고 자는 문원(文遠). 본시 여포(呂布)의 장수로서 정원(丁原), 하진(何

進), 동탁(董卓)을 섬기며 동분서주하였으나, 관우와는 전장에서 대하여도 마음이 통하여 서로 아끼었다. 하비성(下城) 함락 때 붙잡혔으

나 버티고 항복하지 않은 것을 유비와 관우가 충의지사(忠義之士)라고 조조에게 간청하여 목숨을 건지고, 그리하여 조조의 막하에 들었다.

 관우를 일시나마 조조에게 귀순시켰던 것도 그 은의(恩義)에 대한 보답이었고, 전후 수십 차 출전에 무수한 공을 세웠으며, 동오(東吳)와

대항하여 합비(合)를 지켰을 때는, 합비를 에워싼 손권(孫權)의 군대를 8백의 돌격대로 격퇴해, 그의 이름만 들어도 아이들이 울음을 그

친다고 할만큼 용명을 날리었다. 후에도 자주 손권의 군대를 무찔러 오나라 군사를 두렵게 했다. 무력이 탁월하고 도략이 깊으며 식견이 넓

어 어느 일이나 잘 처리 함. 나중에 조비(曹丕)가 대군을 출정할 때 싸움에서 전장군(前將軍)으로 임하던 중, 노장 정봉(丁奉)이 쏜 화살을

맞고 허도(許都)에 돌아가 치료하던 중에 금창(金瘡)이 터져서 죽었다. 시호는 강후(剛侯).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하후돈(夏侯惇) ? ∼ 220년

 

위(魏)의 상장. 초(焦) 사람으로 자는 원양(元讓). 조조와는 사촌뻘로 조조가 그 아버지 대에 조씨에게 양자 갔기 때문에 성만은 달라진 것

이다. 하후연(夏後淵)과 처음부터 조조를 따라 다니며 누차 전공을 많이 세움. 동탁(董卓)을 찌르려다 실패하고 진류(陳留)에 돌아와 의거

(義擧)할 때, 맨 먼저 천여 명 부하를 거느리고 참여하였다. 여포(呂布)를 토벌할 때 맨 먼저 적장 고순(高順)을 만나 싸우던 중 조성(曹性)

이 쏜 화살을 눈에 맞고, 그냥 쑥 뽑아다가 묻어 나온 눈알을 질겅질겅 씹어 삼키며 부모님의 정혈을 어찌 땅에 버리랴 하여 사람들을 놀라

게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의 첫 싸움 지인 박망파에 대장으로도 출전. 여러 차례 전장에 줄곧 용감하게 싸워 명성을 떨치고 조조가 죽은 뒤

 조비(曹丕)가 위왕이 되어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나 몇 달 후에 병으로 죽었다.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강유(姜維) 202 ∼ 264년

 

촉한(蜀漢)의 대장군이요, 제갈량의 계승자. 천수 기현(天水 冀縣) 사람으로 자는 백약(伯約). 천수태수 마준(馬遵)의 부하로 있다가 제갈량

의 제 1차 위(魏) 정벌군을 맞아 잘 싸웠던 때문에, 제갈량은 꾀로 그를 고립시켜 항복 받고 평생을 신변에 데리고 있으며 자기가 터득한 병

법을 모조리 전수(傳授)하였다. 제갈량이 세상을 떠난 뒤 유일한 지주(支柱)로서 촉한의 황실을 버티었으며 역시 뜻을 이어 여러 차례 중원

(中原)을 도모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또 제갈량 때와 똑같이 성공할 만하면 조정에서 환관(宦官)의 농간으로 불러들여 일을 이루지 못했

다. 후주 앞에서 환관 황호(黃皓)를 꾸짖은 것이 화근이 되어, 목숨을 보존하고자 답중(畓中)에 둔전(屯田)하고 있다가, 후주가 항복한 소식

을 듣고 종회(鍾會)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여 뒷일을 도모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종회와 의형제를 맺고 사사건건이 등애(鄧艾)와의 사이를 반

간(反間) 놓아, 둘이 다 지친 틈에 한실(漢室)을 부흥시키려 하였던 것인데, 등애가 패해 죽은 뒤 종회를 꼬드겨 모반시켰다가 실패로 돌아

가자 위(魏)의 장졸을 무수히 죽이고 스스로 목을 쳐서 죽으니 향년 59세였다.

 

모사 BEST7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제갈량(諸葛亮) 181 ∼ 234년

 

촉한(蜀漢)의 승상. 낭야군 양도현(瑯郡 陽都縣) 사람으로 자는 공명(孔明). 한(한)의 사예교위(司隸校尉) 제갈풍(諸葛豊)의 후손. 신장은

 8척이고 얼굴은 구슬 같고 윤건을 쓰고 우선(羽扇)을 들어 마치 신선과 같았음.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솔직하며 담백하고 고요했다. 천하를

 휘두르는 재주를 가지고 신출귀몰한 계략을 씀. 진법에 통달함. 천하가 크게 어지러움을 보고 남양 땅에 엎드려 밭 갈며 나아가 은거하며

벼슬하지 않아 사람들은 복룡(伏龍)이라 부름. 사마휘가 말한 소위 와룡·봉추(와룡·봉추) 가운데 와룡선생으로서, 처사(處士)인 서서(徐庶)

의 추천으로 유비는 그를 삼고초려(三顧草廬)하여 맞아들이고, 스스로 고기가 물을 얻은 것과 같다(水魚之交)고 비유해 말했다. 유비의 은

의에 감동해 일어선 것이 나이 이십 팔 세 때. 관우와 장비의 무례를 누르고 그를 군사로 받들어 재기를 꾀하는데, 삼국지를 크게 셋으로 가

른다면 중간 부분은 순전히 그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한다. 한 평생을 유비·유선(劉禪) 두 주인을 섬기며 촉나라 기업의 일등공신임.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의 동남풍(東南風), 10만개 화살, 화용도의 예언, 형주(荊州)를 계교로 취한 것, 주유(周瑜)를 계교로 죽인 것, 서천을

점령, 한중을 점령, 팔진도(八陣圖), 칠종칠금(七縱七擒), 만두, 읍참마속(泣斬馬謖), 수어지교, 목우유마(木牛流馬), 축지법, 출사표(出師

表), 모사재인(謀士在人) 성사재천(成事在天), 죽은 뒤 사마의를 달아나게 한 것, 위연(魏延)을 금낭으로 참한 것 등 너무 유명함. 214년, 유

비가 촉으로 돌아와 교전을 하자 장비, 조운 등과 함께 성도(成都)를 공격했다. 220년, 조조가 위(魏)나라를 세우자, 다음해에 유비도 한나

라의 황제라 칭함과 동시에 그는 승상이 되었다. 223년, 유비가 병으로 죽자 후주(後主) 유선을 받들어 촉나라를 다스리는데 전념하였다. 법

가를 바탕에 두고 안국(安國)의 선정을 실시. 225년, 남쪽 변방을 치러 갔다가 남방의 수령 맹획(孟獲)을 일곱 번잡아 일곱 번 놓아주어 남

방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 227년, 위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유선에게 출사표를 바쳤는데 성충(誠忠)이 오히려 본받을 점이라, 그의 출사표를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일렀다. 228년, 군대를 이끌고 기산(祁山)으로 나아가 위나라의 군사와 접전을 하는 중  참모인

 마속의 실수로 첫 번째 위나라 정벌은 실패로 끝났다. 이 해에 손권과 위나라 대사마인 조휴의 군사를 크게 무찌르고, 진창(陳倉)을 공략했

으나 적의 단단한 수비로 인해 후퇴했다. 다음해, 위나라의 3군(郡)과 싸우는 전과를 낳았으나, 그 후 두 번에 걸친 정벌에서는 위의 사마중

달이 편 지구전의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234년 오장원(五丈原)에서 대패하고 병으로 죽었다(54세). 관직은 군사(軍師), 승상(丞相), 무향

후(武鄕侯), 익주목(益州牧). 시호는 충무후(忠武侯). 아들 첨(瞻)과 손자 상(尙)이 모두 촉한(蜀漢)이 망할 무렵 등애(鄧艾)의 침입을 막다

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삼대가 모두 충의로 이름을 남기었다.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주유(周瑜) 175 ∼ 210년

 

손권의 장수요, 동지. 여강 서성(廬江 舒城) 사람으로 자는 공근(公瑾). 도략이 밝고 장수재목이었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수전(水

戰)에 능했다. 손책(孫策)과 같은 나이로 어렸을 때부터 그와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동서간으로도 교공(喬公)의 두 딸을 나눠 얻으니 모두 절

세의 미인이었다. 손책이 강동을 차지했을 때 이미 건위중랑장(爲中郞張)이었다. 손책이나 오태부인(吳太夫人)-손권의 생모-의 유언에,

 모두 군사에 관해서는 공군에게 물으라던 유능하고 신임 받던 장수다. 208년에 조조가 형주(荊州)를 공략하고 남하했을 때는, 조조와의 강

화를 주장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은 가운데 노숙(魯肅)과 함께 단호히 싸울 것을 주장하고 필승의 이유를 들어 손권으로 하여금 싸움에

나서도록 했다. 적벽대전을 앞두고 조조에게서 파견된 장간(蔣幹)을 역이용하여 처음에는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을 죽게 하고, 나중에는

 연환계(連環計)를 성공시키는 등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대승을 거둔 후 남군태수(南郡太守)가 되었다. 유비를 경계하여 미인계(美人計)를

쓰기도 하고 제갈량(諸葛亮)과 대립하다 익주(益州)의 유장(劉璋)이 한중(漢中)의 장노(張魯) 공격을 고심하고 있는 것을 보고 익주를 쳐서

 장노를 평정하고 이어서 마초(馬超)와 동맹하여 조조를 멸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고, 남군에서 조조군에게 맞은 화살의 상처가 터져 시

상구(柴桑口)의 진중에서 죽으니 그때 나이 삼십 육 세였다. 후임으로 노숙(魯肅)을 천거하였고, 이남 일녀를 두었는데, 위는 순(循), 아래

는 윤(胤)이었다. '하늘은 왜 주유를 탄생시키고 또 제갈량을 탄생시켰나?'라는 말이 유명함.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순욱(荀彧) 163 ∼ 212년

 

조조(曹操)의 모사(謀士). 영천 영음(潁川 潁陰) 사람. 자는 문약(文若). 왕좌(王佐)의 재질을 가졌다. 본시 원소(袁紹)에게 있었으나 조조가

청주(淸州)의 황건적(黃巾賊) 잔당을 치고 위세를 떨쳤을 때, 그의 막하에 참여하였다. 조조가 황제의 부름으로 중앙에 서게 되자, 이호상식

지계(二虎相食之計)로 유비(劉備)와 여포(呂布)가 서로 싸워 자멸하게 하려다 이루어지지 않으매, 구호탄랑지계(驅虎呑狼之計)로 원술(袁

術)을 움직여 둘을 치게 하였다. 조조를  위하여 평생을 진력하였으나, 스스로 위공(魏公)이 되어 권세를 누리려 할 때, 이를 반대한 이유로

 노염을 사, 더 부지 못할 것을 깨닫고 자살하니, 이때 나이 50이었다. 조조는 그에게 경후(敬侯)라 시호를 내렸다. 아들 순혼(荀琿)이 있으

나 드러나지 않았다. 관직은 시중(侍中), 광영대부(光榮大夫).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가후(賈) 147 ∼ 223년

조조(曹操)의 모사(謀士). 무위 고장(武威 姑藏) 사람으로 자는 문화(文和). 어려서부터 장량(張良), 진평(陳平) 등에게 재사로 인정받았고,

권모술수와 정치에 능했다. 처음 동탁(董卓) 막하에 있다가 동탁이 패하여 잔당이 지리멸렬하려 할 제, 이들을 이끌어 도성을 회복하고 서

량태수(西凉太守) 마등(馬騰)과 병주자사(幷州刺使) 한수(韓遂)의 근왕병이 이르렀을 때는, 지구전(持久戰)을 건의하여 이들을 물리쳤다.

이각(李)과 곽사(郭)를 도와 장안을 회복하였으나 서로 화목치 못하고 자신의 건의를 듣지 않으매 단신을 빼쳐 도망하였다가, 장제(張

濟)의 조카 장수(張繡)를 도와 완성(宛城)에서 조조(曹操)를 크게 파하였다. 나중에 패하여 유표(劉表)에게 있을 때도 조조의 토벌군의 계책

을 역이용하여 크게 파하니, 오합지졸을 이끌고도 군사 부림이 이와 같았다. 뒤에 조조가 유엽(劉曄)을 보내어 권하는 바람에 장수(張繡)와

 함께 귀순하였고, 조조도 그전 일을 혐의 두지 않고 중하게 썼다. 마초(馬超)가 장안을 빼앗고 동관(潼關)에서 장시일 대전하였을 때, 상대

편 강화 안을 묵살하고, 마초·한수 둘 사이에 반간계를 놓을 것을 건의하여, 그 바람에 마초는 결국 패하고 말았다. 조비가 즉위한 지 얼마

안 있어 병을 죽었다. 관직은 태위(太尉).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육손(陸遜) 183 ∼ 245년

 

손권 막하의 장수. 오군 오현(吳郡 吳縣) 사람으로 자는 백언(伯言). 소패왕(小覇王) 손책(孫策)의 사위. 병법에 능통했고 기계(奇計)를 잘

썼다. 그는 일족을 이끌고 손권(孫權) 휘하에 들어가 회계산(會稽山)과 파양호(破陽湖)에 근거하던 도적을 무찔러 명성을 얻었다. 219년에

는 여몽(呂蒙)을 대신하여 형주(荊州)에 주둔, 탁월한 전략으로 관우를 무찔러 형주를 오나라의 영유로 삼았다. 그 공으로 진서장군(鎭西將

軍)이 되고 누후(누侯)에 봉해졌다. 촉나라의 유비는 관우가 죽고 형주를 빼앗긴 일로 곤권에게 원한을 품고 221년에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진격해왔다. 이때 육손은 오나라 병권의 책임자로서 이릉(夷陵)에서 맞아 싸웠다. 역전노장(歷戰老將)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침착하게 작전

하여, 그의 40여 진지를 불살라 역으로 승리를 이끈 것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온 것이다. 유비를 추격할 때, 어복포(魚腹脯)에 이르렀을

때는 제갈량이 남긴 돌로 쌓은 팔진도(八陣圖) 속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을, 가까이 살던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黃承彦)이 그

해 주어서 살았다. 이것이 유명한 <이릉(夷陵)의 싸움>으로서 그 결과 육손이 대승했다. 그 후 육손은 보국장군(輔國將軍) 형주목(荊州牧)

으로 승진하고 강릉후(江陵侯)가 되었다. 그 뒤에도 계속 형주에 남아 위·촉의 동향을 살피며 손권에 대해 헌책 했다. 손권 역시 내정·외교면

 에서 중대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리하여 244년, 형주에 주재한 채로 정승에 임명되는 등 오의 중신으로 군림했다.

 이에 앞서 손권은 왕부인(王夫人) 사이에서 태어난 손화(孫和)를 태자로 삼았으나, 한편으로는 그 동생 손패(孫覇)를 사랑하여 노왕(魯王)

으로 봉하고 태자와 같이 대우하고 있었다. 그러자 조정에서 태자 파와 노왕 파가 대두되어 서로 다툼을 벌였다. 형주에서 이 소문을 들은

육손은 상서를 올려 태자에게 더 비중을 두도록 요구했다. 이에 겁먹은 노왕 파는 21개 군에 달하는 육손의 죄상을 들어 손권에게 제출했다.

이에 손권이 일부러 형주에까지 문책의 사신을 보내자 육손은 분노 끝에 죽고 말았다. 나중에야 손권도 그의 무죄를 알고 후회했다.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곽가(郭嘉)

 

조조(曹操)의 모사(謀士). 자는 봉효(奉孝). 순욱(荀彧)과는 동향인 영주 영음(潁州 潁陰) 사람으로, 정욱(程昱)의 천거로 그의 막하에 들었

다. 여포(呂布)와 복양(陽)에서 싸워 패했을 때는 조조가 화상(火傷)으로 죽었다고 거짓 발상(發喪)하여 여포의 추격군을 크게 파하였다.

 원소(袁紹)를 멸한 후 잔당을 소탕하기 위하여 멀리 사막까지 침공하였을 대 종군하여 계책을 들였으나, 도중 풍토가 맞지 않아 병이 들어

 역주(易州)에서 요양하다 진중에서 죽으니 때는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관직은 군제주(軍祭酒)이고 시호는 정후(貞侯).

 

몇만명이 참여한 삼국지 인기투표 | 인스티즈

사마의(司馬懿)

 

하남성 온현(河南城 溫縣) 사람. 자는 중달(仲達). 매의 눈초리에 이리와 같이 돌아보아 그 생김부터가 범상하지 아니하였다. 조조 밑에서

 승상부 주부(丞相府 主簿)로 있으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때때로 좋은 의견을 드렸다. 제갈량이 기산(祁山)을 나갈 때도 그를

 꺼려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조정에서 멀리 보냈었는데, 뒤에 복귀하자 과연 좋은 적수로서 대전하였다. 호로곡(葫蘆谷)에서는 화공을 받

아 삼부자가 함께 꼭 죽게 된 것을 갑자기 비가 내려서 살아났으니, 이 또한 천운이라고나 할까? 오장원(五丈原) 전투에서는 천문을 보아 지

연작전으로 제갈량이 죽기를 기다렸고, 공손연(公孫淵)을 쳤을 때도 침착하게 적이 동요하기를 기다렸으니 그의 담략이 이와 같았다. 그 밖

에 남방의 오(吳)나라에 대처하여 회하(淮河) 유역에 광대한 군둔전(軍屯田)을 설치하여 국방을 튼튼히 한 일도 큰 업적이다. 위주(魏主) 조

예(曹叡)가 죽은 뒤 조방(曹芳)이 서고, 조상(曹爽)이 병권을 쥐게 되자 병을 핑계하여 그의 눈을 속이고 갑자기 거사하여 모든 권력을 손아

귀에 쥐었다. 승상이 되어 구석(九錫)을 가하였으며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뒤에 사마염(司馬炎)이 나라를 뺏은 뒤 선제(先帝)라 시호하

였다.

추천  4

이런 글은 어떠세요?

 
★제갈량★ 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 ͡° _ ͡°)
♥관우찡♥워더
10년 전
제갈량...정말 잘생긴 훈남을 기대했었는데 어떤 중국 영화?보고 나서 깨짐....
10년 전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카테고리
  1 / 3   키보드
닉네임날짜조회
유머·감동 가오가 몸을 지배한 남돌의 일상패션496 게터기타05.22 11:02112942
유머·감동 30대 중반인데 전재산 700 있다는 사람 논란203 단발머리 소05.22 10:3595473 0
이슈·소식 와..정준영 양심 어디에ㅋㅋㅋㅋ134 쥐방울이05.22 19:3361571 9
이슈·소식 강형욱의 논란들에 대한 정리 feat.설채현167 널 사랑해 영05.22 18:2657815 32
유머·감동 썸네일 교체한 피식대학106 쇼콘!2305.22 22:5330075 1
최근자 그 은색 의상 입은 카리나 체급 3장.gif 똥카 2:32 395 0
뉴진스 다니엘, '2024 코리아 온 스테이지' 단독 MC 풀썬이동혁 2:32 134 0
재재, '두시의 데이트' 1년 만에 하차 세훈이를업어 2:30 427 0
오늘 틈만나면 게스트.X 환조승연애 2:27 82 0
Horizon: An American Saga 칸영화제 시사회 레드카펫 참석한 윤아.. S.COUPS. 2:27 225 0
족발을 노리는줄 아니었다 따온 2:23 358 0
현재 의견이 반반으로 나뉘고 있는 제로베이스원 앵콜 무대 판콜에이 2:23 448 0
떡볶이에 가장 잘어울리는 면은?5 Wannable(워너 2:20 931 0
인터넷에서는 죽어라 까는데 솔직히 맛있을듯 킹s맨 2:19 1246 0
"기적의 하나님, 김호중 위해 기도해주세요"…팬들 반응이 언더캐이지 2:18 437 0
현재 미국 극성 유튜버가 야동 보다 걸려서 난리남.pg1 훈둥이. 2:18 1824 1
베를린시장, 日 외무상에 소녀상 철거 시사…재독단체 "압력에 굴복한 것” 쿵쾅맨 2:18 200 0
지진과 고영이 탐크류즈 2:18 421 0
손 쉽게 그리는 법 gif 950107 2:18 225 0
한국 감독 역사상 가장 추했던 감독 가나슈케이크 2:17 529 0
잡초의 미학 우Zi 2:15 296 0
사장님이 깜짝 놀란 배민 리뷰.jpg 남준이는왜이 2:15 475 0
인류 역사상 큰 실수들 랭킹 wjjdkkdkrk 2:13 784 0
청주동물원, 국내 제1호 거점동물원 지정 담한별 2:08 282 0
암컷을 향한 수컷복어의 노력1 218023_return 2:04 2656 2
전체 인기글 l 안내
5/23 2:32 ~ 5/23 2:34 기준
1 ~ 10위
11 ~ 20위
1 ~ 10위
11 ~ 20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