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납북되었던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탈출한뒤 기자회견에서
1978년 1월 14일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영화배우 최은희가 납치되고 최은희를 찾으러 온 신상옥 감독까지 동년 7월 19일에 납북된 사건.
당시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과 이혼[1] 후 안양예술학교의 교장직을 역임하며 후학 양성 중이었다. 그 때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북한 사람들과 조총련 관계자들이 최은희에게 합작 작품 및 지원을 의논하고 싶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초청한다. 신상옥 감독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후원 교섭을 수상하게 생각했지만 최은희는 학교의 발전을 생각하며 홍콩으로 갔는데, 며칠 일정대로 움직이더니 뜬금없이 배에 태우고 '우리는 지금 장군님 품으로 가는 중입니다'라고 하더란다. 최은희는 울며불며 내려달라고 외쳤다가 결국 이들이 준비한 마취제에 의해 기절했다고.[2] 신상옥 감독은 홍콩에서 실종된 최은희를 수소문하다가 자신의 지인과 친한 사이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까지 정황 자문을 구했는데, '납북이 틀림없다'는 말에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아무리 이혼한 사이지만 수십년을 같이 지내온 동반자가 사라졌으니….
결국 최은희를 찾으러 홍콩에 갔던 신상옥 감독도 납북되고 만다. 홍콩의 영화관련 사업을 하는 현지인이 사실은 북한의 공작원이었던 것.
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북한에 끌려왔지만 비교적 환대를 받으며 생활했다. 도착하자마자 김정일이 인사하러 직접 나와서 기다렸고,[3] 비싸고 맛있는 음식만 주지, 벤츠에 기사까지 붙여준 것도 모자라[4] 심지어는 아무나 못 간다는 김정일 생일파티에 김정일 본인이 초대해줬다고.[5][6]
아무리 환대를 받고 배가 부르고 김정일하고 같이 놀 수 있었다고 해도[7] 가족들이 한국에 있는 마당에 억지로 끌려와서 경험하게 된 거지(…)같은 북한에서의 생활은 굉장히 힘들었다고 한다. 사상 교육과 개조를 한다며 김일성 교시와 주체사상 학습을 강제로 시켰으며, 늘 도청과 감시를 받고 있었다. 언제라도 자신들이 필요없다고 여겨지면 제거될 지 모른다는 스트레스에 최은희는 이동만 시켜도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고….
최은희는 밤 11시에 남한의 라디오 방송을 몰래 들으면서 자신의 실종 소식을 안타까워하는 라디오 진행자[8]의 울먹이는 목소리를 듣고 수도꼭지를 틀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이와 달리 신상옥 감독은 북한으로 온 후에도 수시로 탈출을 시도, 수용소에 끌려가서도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단식 투쟁도 불사했으며,[9] 죄수들과 간수들에 대한 것까지 눈여겨보고 후일 수용소 생활을 영화에 반영하겠다며 이것저것 관찰하기까지 했다. 멘탈짱짱맨
여차저차 하던 와중에 목적을 가지고 이들을 납치했던 김정일의 권유를 받고 전폭적인 지원 아래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촬영소를 차리게 된다.[10] 김정일은 문화, 특히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영화분야를 발전시키고 싶어 이들을 납치했다고 직접 이야기했다.
북한은 오랫동안 공산주의, 그리고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주체사상이 고착되면서 문화예술 부분으로는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락해 있었다. 6.25 이전 남로당이 불법화하면서 각 분야의 수많은 예술인들이 월북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대부분은 주체사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숙청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를 찬양하고 숭배하던 북한의 김정일이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력하지 않는 북한의 예술 관련 인민들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력하고 경쟁하는 예술인들이 더 뛰어나더라"는 사실을 본인의 입으로 인정하게 된다. 분명 깨닫기는 잘 깨달았는데 갈수록 더 막장을 만들었지
김정일은 대외 선전용으로 영화 예술의 힘을 빌리고 싶었으나, 북한 내부의 인력들은 수많은 제약에 길들여져 있고 이런 분야로는 워낙 인재가 없었기에 두 부부를 일찌기 점찍어 놓고 납북을 계획했다고….[11]
신상옥 감독과 남한 언론에서는 김일성에게 바치기 위해 최은희를 납북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최은희도 이미 50대, 김일성 역시 칠순을 앞둔 노인이어서 그랬는지 그런 시도는 전혀 없었다고. 애초에 기쁨조가 있는데 뭐….[12] 김정일은 오히려 최은희를 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모셨으며[13] 나중에 신상옥 감독에게는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렇게 깨끗이 최 여사를 돌려드립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리하여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북한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고, 유럽 쪽의 영화제에 여러 편의 작품들을 출품한다. '돌아오지 않는 밀사', '탈출기', '소금' 등을 출품, 그 외에도 '춘향전', '불가사리' 등 여러 작품을 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14] 하에 제작했다. 최은희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타고, 신상옥 감독은 감독상 타고…이러던 와중에 런던의 영화제에서 한국의 영화배우 남궁원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고 한다.[15] 아이러니하게도, 북한 측 감시원들에게 신뢰를 주고 훗날 계획해둔 탈출을 쉽게하기 위해 남궁원에게 북한 체제 찬양과 김일성의 찬양을 했다고.(…)[16] 한편 한국 정부는 이들의 납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이들의 활동이 대외적으로 알려지게 되자 결국 납북 6년 후인 1984년에 와서야 이 사실을 공개하게 된다.
이 공개 사실만해도 상당히 충격인게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과 배우가 동시에 사라진후에 난데없이 북한에 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지금 예를 든다면 박찬욱이나 이영애가 실종되었다가 6년만에 북한에서 잘 먹고 잘산다는게 공개된 것이나 같은 일, 사실 박찬욱이나 이영애 이상으로 60~70년대 신상옥 최은희의 비중은 컸다.
1986년 3월 13일에 영화 촬영과 관련하여 오스트리아의 빈을 방문하던 중 미국 대사관으로 기습 입장하는데 성공하여 자유를 찾아 미국 망명을 하게 된다.[17]
당시 신상옥 감독은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 교도통신 순회 특파원인 에노키 아키라(榎彰, えのき あきら) 기자가 마침 빈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그와 연락해서 함께 점심을 들자며 불러냈다. 그리고 북한 감시원들의 감시를 따돌린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에노키 기자가 탄 택시가 도착하자 같이 동승하여 숙소를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숙소에서 멀리 떨어졌음을 확인한 이들은 택시 기사에게 미국 대사관으로 방향을 바꿔 줄 것을 요구했고, 에노키 기자에게 자신들은 자진 월북한 게 아니라 납북당했으며, 자신들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털어놓았다. 그리고 빈 주재 미국 대사관 앞에 도착하자마자 택시에서 뛰쳐나와 뒤도 안돌아 보고 미국 대사관 안으로 뛰어들었다.[18] 이렇게 망명에 성공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곧장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거주하였다. [19][20]
말 그대로 영화처럼 탈출에 성공한 이 부부는 미국으로 망명하는 길을 택해서 북한의 암살공작원들이 자신들을 해꼬지하고 죽일지도 모른다는 걱정, 그리고 한국 정부(정확히는 국가안전기획부)가 자신들을 북한의 영화발전에 기여하고 동조했다면서 추궁하거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책임을 물을 걱정들을 영화처럼 일거에 날려버린다.
천조국의 CIA는 자국에 망명한 이들 부부의 목숨에 50만 달러의 현상금이 북한에 의해 걸려있는 상황에 맞서 언제나 그들을 경호해 주었으며 LA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집도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국가안전기획부? 미국에 망명한 사람한테 한국 정부가 맘먹고 시비를 걸 가능성같은 건 그야말로 없는거고….
이들 부부는 CIA에 중요한 정보로 활용될 수 있는 김일성, 김정일의 일상적인 대화[21]를 녹음해 왔는데 그야말로 희귀한 육성 테이프를 미국 정보기관 CIA에 제공하는 대가로 미국정부는 이들 부부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한다. 정말 영화도 이런 영화가 없다. 해피엔딩.
이듬해 1987년에 《김정일 왕국》이라는 납북수기를 동아일보의 김일수 특파원의 도움을 받아 출판한다. 8년간의 북한생활 + 뽀그리우스 김정일과 고위층들과의 만남, 여러가지 북한에서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소망하던 탈출을 이루기까지 적나라하게 밝혀낸 서적이지만 앞서 말한대로 시기가 시기인지라…1989년 노태우 정부의 방한을 권유받아 일시 귀국하였다. 이 때 국가보안법에 따라 안기부에서 21일간 조사를 받았다. 역시나….
이후 신상옥 감독은 1990년에 북한의 858기 테러사건을 영화화하여 마유미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개봉한다. 영문 제목은 《Virgin Terrorist》.[22] 마유미의 촬영은 한국에서도 이루어졌는데, 김현희가 김승일과 머물던 부다페스트의 호텔 씬을 현재 그랜드 힐튼호텔이 된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촬영했다. 이후에도 미국에서 계속 활동한다. 후일 신 감독은 1994년 '증발'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이름은 다르지만 노골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디스하는 영화로서 지금까지 말이 많은 김형욱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과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실상을 전달하려 했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한국에선 흥행엔 실패했지만 깐느 초청작에 오를 정도였다.[23][24]
미국에 살던 신감독은 2000년에는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하였다. 그리고 2006년에 신상옥 감독이 지병으로 인해 사망한다.
후일담으로 최은희는 신상옥 감독을 납북 5년만에 대면했다고 한다. 파란만장했던 북한에서의 생활 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상옥 감독이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북한에 똑같이 끌려왔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 모든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고….[25]
…여러모로 영화같은 삶을 살던 사람들이다. 실제로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탈출 계획을 짤 때도 신상옥 감독이 직접 영화 시나리오처럼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탈출했다고 직접 이야기했다. 오오오!
덧붙여 그들의 납북과 탈출에 대한 논픽션 영화를 만든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기는 하다..훗날의 성사여부는 둘째치고 정말 영화와도 같은 이야기인지라…기승전결에 해피엔딩까지 있으니.
1995년 MBC에서 방영된 제4공화국 19화, 20화가 이 사건을 다루는 에피소드다. 다만 위에 서술되었던 내용과는 약간씩 다른데 신상옥 감독이 탈출 시도를 하는 건 최은희를 만나기 이전 딱 1번만으로 묘사되었고 김정일·김일성과 대화할 때 녹음기를 켜는 모습도 생략되었으며 나중에 오스트리아에서 탈출할 때는 지인인 에노키 아키라 기자가 직접 몰고 온 승용차를 타고 미국 대사관으로 가는 내용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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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상옥 감독은 배우 오수미와의 불륜으로 두 아이를 낳았고, 최은희는 끝내 이혼한다. 여담이지만 오수미는 신상옥이 납북되자 홀로 아이들을 키우다가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했으나 1992년 교통사고로 요절했고 오수미의 동생이자 유명 모델이던 윤영실은 1986년 갑자기 실종되어 2013년 현재까지 생사 불명 상태다.
- [2] 그리고 배 안의 침대에서 깨어났는데 벽에 걸린 거대한 김일성 사진을 보고 또 기절….
- [3] 최은희가 도착하자마자 크게 반가워하며 악수를 청했지만 최은희는 정신이 없어 그 악수를 받아주지 못했는데, 김정일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지금 정신이 없으신가보다, 차 타고 평양 구경 좀 시켜드려라.'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고.
- [4] 하지만 아무데나 가고 싶은 데로 갈 수 있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당연히 벤츠 시동용 열쇠도 안 줬다고 하는데, 후에 신상옥 감독은 벤츠를 탈취해서 한국(…)으로 도망가려다가 잡혀서 한동안 고된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 [5] 당시 김정일은 북한의 공식 후계자로 아버지 김일성에 못지 않은 최고의 실권자였다. 당연히 김정일의 생일파티에는 북한에서도 엄청난 상류층이 아니면 절대 갈 수 없었다.
- [6] 바로 이 자리에서 당시 7~8세였던 김정남과 성혜림까지 만났다고 한다. 최은희가 김정남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자 "남의 이름은 왜 물어?"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는데(이런 를 봤나) 곧바로 김정일이 "정남아, 어른이 물어보시면 대답을 똑바로 해야지."라고 말했다고.
- [7] 김정일은 42년생, 최은희·신상옥 부부는 두 분 모두 26년생이다. 김정일이 한참 어리다. 띠동갑보다 더한 나이차…. 김정일이 영계!
- [8] 성우 고은정이었다고 한다.
- [9] 자신이 죽거나 문제가 생기면 간수들이나 수용소 간부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그랬다고 한다…. 정말 대담한 성격이다.
- [10] 한국에서 신필름이 허가 취소를 받은 지 얼마 안되는 시점에 신상옥 감독이 납북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북한에서 신필름을 차리게 된 것. 여러 가지로 영화같은 이야기다.
- [11] 최은희·신상옥 부부가 김일성·김정일과의 면담을 한 적이 있는데 최은희가 목숨을 걸고 카세트 플레이어의 녹음 버튼을 몰래 누르고 녹음한 육성이 있다. 들켰으면 어떡하려고….
- [12] 다만 김일성은 김정일에 비해서는 그다지 엽색 행각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나마 알려진게 여성 안마사와의 사이에서 김현을 낳은 것 정도밖에 없으니…. 게다가 사망하기 직전에는 김정일에게 "넌 주변에 여자가 너무 많아!"라고 꾸짖기까지 했다고.
- [13] 김정일은 생모 김정숙이 사망한 이후로는 어머니라는 존재 없이 살아왔는데 특히 계모 김성애와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최은희를 어머니처럼 생각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북한의 최고 실권자라 할 수 있는 김정일이 하루가 멀다하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는 최은희를 직접 어르고 달래느라 쩔쩔맸다는 점을 생각하면….
- [14] 특히 영화 '탈출기' 제작 과정에서의 일화가 유명하다. 신상옥 감독이 김정일에게 '열차를 폭발시키는 장면을 연출하고 싶다'고 제의하자,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진짜 열차를 폭파시켰다고 한다.(참조)
- [15] 이 일 덕분에 남궁원도 귀국후 강도 높은 조사를 받게 된다
- [16] 김정일과 최은희의 전화통화가 녹음된 육성 테이프에 의하면, 김정일은 최은희가 한국측 인사들과 만난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이걸 갖고 뭔가 불쾌감을 내비치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최은희의 안부를 묻는 수준에 그쳤다고.
- [17]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으나, CIA의 한국인 직원과 미리 이야기를 맞추었기 때문에 수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18] 미국 대사관으로 이동하는 중에도 혹시나 북한 감시원이 따라붙지 않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했다. 당시 숙소에서 미 대사관까지는 약 10분 거리였는데, 그 10분이 마치 10년처렴 느껴졌을 듯.
- [19] 바로 한국으로 갔다간 워낙 북한과 지척이라 배신자를 처단하라는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추격자나 스파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고도 한다.
- [20] 또한 북한의 이름으로 영화제에 영화를 출품하여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아서 한국에서는 이들이 배신, 변절했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또는 영화사 허가 취소를 받은 신상옥 감독이 최은희를 찾을 목적 겸해서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진 월북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납북수기에서 살기 위해서 한 행동들이라고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다.
- [21] 주로 면담할 때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했다고 한다.
- [22] 일본어, 영어, 한국어가 짬뽕이 되어있다. 자막이 없으면 보지 못할 정도. -_-;
- [23] 이전 버전에는 북한의 실상과 증발이라는 영화를 연결했지만 그 반대이다. 오히려 "북한도 있는데 어디서 데모질이나"고 중앙정보부에서 여대생 강리나를 고문하고 강간 하는 장면이 나오고 북한을 빌미로 독재를 시행하는 군사정권을 리얼하게 보여준다.
- [24] 초기 시놉은 아시아의 어떤 국가라고 하지만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고 한국어를 쓰며 무엇보다도 마지막 장면 뉴스 영상에서 대통령 유고후 미국은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항모를 파견한다는 대사가 나온다.
- [25] "그럼요. 시간이 갈수록 더 그리워요. 요즘도 꿈을 많이 꾸는데, 항상 제 곁에 있어요. 촬영하는 장면이라든지…."(노배우의 목소리가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