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날아가는 거리만큼 당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내가 기다리는 시간만큼 당신에게도 기다림이 있으면 좋겠다 새가 되고 싶은 나무들이 부리로 하늘을 쪼아대며 즈믄의 날개짓으로 퍼덕여도 저기 어디쯤 당신이 있으면 좋겠다나무가 되고싶은 새들이날개를 나뭇잎처럼 파다닥 거리며엉겹의 물관을 타고뿌리에서 우듬지까지 거슬러 올라도당신에게 가는 아사한 사랑이나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바람같이 부르는 당신 손짓에이내 들뜨다 긴장하는 전신내가 날아가는 거리만큼당신을 사랑했으면 좋겠다- 솟대 / 권혁재잠에서 깨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꿈은 깨지 않은 채 잠만 깨어 울고 있었다가지가 불인 나무가 아직도 내 내장에 뿌리를 뻗고 두개골을 달구며 활활 자라고 있었다빨갛게 달궈진 잔가지들과 실뿌리들 때문에 내 모든 실핏줄들은 몹시 따갑고 간지러웠다잠에서 깨자마자 내 눈을 뚫고 나온 가지 하나는 아침 공기에 닿자마자 녹아 뺨이 벌겋게 데이도록 흘러내리고 있었다왜 우는지 기억나지 않는데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울다 깨다 / 김기택사회자가 외쳤다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사회자는 흐느꼈다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홀린사람 / 기형도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이 읍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출근 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긴 어둠에서 풀려 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 다닌다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 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 찬다 그 속으로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 입은 몇몇 사내들은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 / 기형도네 꿈을 꾸고 나면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듯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릿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 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 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 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 한 잔의 붉은 거울 / 김혜순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에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 넣고 가도 좋으련만 플라타너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수고로운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 플라타너스 너를 맞아 줄 검은 흙이 먼 곳에 따로이 있느냐나는 길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 그 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 플라타너스 / 김현승택시 운전사는 어두운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불쑥 나타났다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 넘쳤다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부질없는 기다림인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더는 찾아올 회망도 없는 방은 열려진 채로 옛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리움만으로 가득한 밤이 다시 길가로 나아가 부질없는 기다림으로 서 있다지금 어디에 있느냐, 너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기에 너와 나는 만날 수 없느냐 불러도 대답없는 사랑, 숨어서 나누는 사랑은 함부로 슬퍼할 수도 없는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인 것을 그러나 누구나 불렀던 희망없는 시절의 사랑노래를 잊을 수 없어 잊을 수 없어 나는 여기에 서 있는 것이네더는 찾아올 희망도 없지만 더는 실망하지 않기 위해 별안간 방 안으로 들어왔을 적에 대문 밖의 불빛 아래에서 어울렸던 사람들은 자정이 훨씬 지나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주고 받던 잡담과 불렀던 노래만 각자의 집으로 흩어져 가는 것이었다- 다시 그리운 사랑 / 박상봉이사온 그는 이상한 사람이었다그의 집 담장들은 모두 빛나는 유리들로 세워졌다골목에서 놀고 있는 부주의한 아이들이잠깐의 실수 때문에풍성한 햇빛을 복사해내는그 유리담장을 박살내곤 했다그러나 애들아, 상관없다유리는 또 갈아끼우면 되지마음껏 이 골목에서 놀렴유리를 깬 아이는 얼굴이 새빨개졌지만이상한 표정을 짓던 다른 아이들은아이들답게 곧 즐거워했다견고한 송판으로 담을 쌓으면 어떨까주장하는 아이는, 그 아름다운골목에서 즉시 추방되었다 유리담장은 매일같이 깨어졌다필요한 시일이 지난 후, 동네의 모든 아이들이 충실한 그의 부하가 되었다어느 날 그가 유리담장을 떼어냈을 때, 그 골목은가장 햇빛이 안 드는 곳임이판명되었다 일렬로 선 아이들은묵묵히 벽돌을 날랐다- 전문가 / 기형도여느때 처럼 오늘도약속은 한개도 없었어늦게서야 자리에 누웠을때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두눈은 말똥거렸어스쳐 지나갔던 너의 두 눈 속에 있지도 않았던 눈물이 생각났어난생 처음 봤던 너의 얼굴 뒤에 숨지도 않았던 옛날이 보였었어 나정말로 없었는지 한번만 더 보고싶었어- 정말 없었는지 中 / 장기하와 얼굴들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손으로 꾹꾹 눌러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봄을 옮기지 않겠노라고 원래 있었던 자리가 그대가 있었던 자리였노라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 윤성택 피는 발굴하는 것이다나는 오래된 책에서 그것을 배웠다백지장처럼 하얀 백사장에서파도소리가 인다파랗고, 빨갛고 노란 점들이일그러진 원호를 그리며 번지고바다에서도 건지지 못한 물고기를소금기 어린 모래 속에서 찾는다텅 빈 소라껍데기가 옹알이하는 소리,신생아는 늘 징그럽고 하얀 느낌나는 빨갛고 노란 점들도 있었는데왜 파란 몽고반점만 남았지그마저도 잃었지여러 혈관들을 헤집고 다니는 상상을 한다붉은 갈매기가 버리고 간둥글고 넓은 거북이등껍질익사하지 않은 책을 그 위에 싣고 나는 떠난다- 가족의 탄생 / 이이체잘 가라, 내 사랑너를 만날 때부터 나는네가 떠나는 꿈을 꾸었다저문 해가 다시 뜨기까지의그 침울했던 시간,그 동안에 나는 못질을 한다다시는 생각나지 않도록 서둘러내 가슴에큰 못 하나를 박았다잘 가라, 내 사랑나는 너를 보내고 햄버거를 먹었다아무 일 없었다는 듯 뒤돌아 서서햄버거를 먹다가목이 막혀 콜라를 마셨다잘 가라, 내 사랑네가 나를 버린 게 아니라내가 너를 버린 게지네가 가고 없을 때 나는 나를 버렸다너와 함께 가고 있을 나를 버렸다- 추억에 못을 박는다 / 이이체아이들은 풀밭에서 성장했다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머리카락이 풍성해서 감사한 나날들이었다계절마다 바뀌는 꽃들 속에서 아이들은 컴퓨터를 바라보았고 마우스를 손에 꼭 움켜쥐었고박수를 치며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당신네 이름은 풀, 네 이름은 꽃, 네 이름은 컴퓨터, 네 이름은 모니터당신이 주던 박수소리가 흥겨워 몇 번이고 클릭했다클릭, 클릭, 클릭 모니터가 기면증으로 픽 픽 쓰러져 잠드는 틈바구니에서 엄마를 찾아내던 아이들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꽃씨를 하나하나 심어놓은 화분처럼, 가지런한 키보드 버튼들시간마다 뒤바뀌는 건 당신의 박수소리였다. 짝짝 짝 짝 짝짝짝 짝엄마를 모르니까 사랑해요 당신에게서 뻗어 내린 수많은 뿌리들이 풀밭의 기저를 도배했다날이 갈수록 아이들은 컴퓨터만 바라보기에 바빴고, 모니터의 기면증도 무용지물이 되었다아이들은 차츰 머리가 커졌으며 머리숱은 지워져 갔다 나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허전해진 머리끝을 아이들은 기쁘게 매만졌다 그러나 한 손에는 여전히 마우스를 쥐고 클릭, 클릭, 클릭손가락만큼이라도 꿈꾸었으면! 당신은 더 크게 박수를 쳤다엄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무서워요 아이들이 메아리처럼 목소리를 차례로 흩뿌리며 말했다꽃들이 계절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순서에 맞춰 시드는 것이었음을 아이들은 키보드 버튼을 하나씩 손에 안았다당신이 나를 불렀다 나는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나는 메말라 버린 꽃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당신이 나를 부르는데 왜 내 이름이 아닌지 궁금해졌다- 고아 / 이이체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 / 기형도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