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 상류층 가정에 오페어로 가게 된 여시.
그리고
KEVIN

아버지는 잘나가는 사업가, 어머니는 의사,
머리가 영특해 명문 사립고를 진학했다는 고등학생 아들과, 귀엽고 사랑스러운 다섯살짜리 딸.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 마치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정같은 모습이다.
"안녕, 케빈."

"안녕."
오늘부터 오페어로 일하게 될 가정집. 다행히도 가족들은 모두 친절하고 점잖은 것 같다.
오전에는 일을 하고, 부부가 돌아온 저녁이면 어학원에서 공부를 한다.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돈을 모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청소는 생각보다 고되지 않고, 월급은 꼬박꼬박 어학원비와 더불어 통장으로 입금된다.
난 오래도록 이곳에서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든것이 다 수월한 듯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고등학생인 큰 아이가 조금 이상하다.

"누나, 수학을 전공했다면서? 내 방으로 와서 숙제좀 도와줄 수 있어?"
가족들은 똑똑한 학생을 오페어로 두게 되어 케빈도 좋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며 기뻐했지만,
난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었다.
좁은 방 안, 그와 내가 단 둘이 된 순간이 되면 모든것이 달라진다.

문을 열자 그가 날 한없이 느긋한 표정으로 돌아본다.
수학숙제는 커녕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빈 책상.
"... ... 질문이 없는거면 난 다시 내려갈게."
"여기 앉아."
"...내게 그런식으로 명령 하지마."
"왜?"
그는 정말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천진한 표정이다.
난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휙 뒤를 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지금 나가면, 엄마한테 네가 내 코트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말할거야."
"지금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날 협박하는거야?"
"일어나지도 않은 일?"
그가 천천히 내 말을 반복했고, 나는 단박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당장 옷걸이에서 회색 코트를 하나 빼내어 바닥에 던지더니,
제가 들고 있던 음료수를 망설임없이 그 위에 쏟아부어버린다.
그러더니 엉망으로 축축해진 그것을 발로 지그시 밟기 까지 하고는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는 것이다.
"이 옷, 저번주에 산거야."
난 이를 악 문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만 띄고는 옆으로 비켜서더니 제 옆자리를 툭툭 친다.
마지못해 그곳에 걸터앉으면, 그는 나를 뜯어보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기 시작한다.
그의 시선은 불에 타는 듯이 뜨겁고, 집요하다.

"말해봐."
"뭘? 케빈, 도대체 뭘 말이야?"
"뭐든지. 네 이야기든 내 부모님 흉이든, 아무거나 그 예쁜 입술로 지껄여보란 말이야."
그러나 그는 가족들 앞에서는 그렇게 착한 아이가 따로없었다
흠 잡을 데 없는 성적, 언사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온갖 범생이같은 동아리 활동과 봉사활동,
주말 교회 생활에도 충실한 소년.
그러나 나는 그가 결코 똑똑하고 말 잘듣는 착한 아이가 아니라는것을 안다
언젠가부터 나와 그 만이 집에 남게되면, 그는 먼저 담배부터 꺼내들었다.
막 빨아놓은 시트를 마구 구겨놓으며, 굳이 그 위에 털썩 주저앉는 케빈.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면서도 별 주의를 주지 않는다.
화를 내 봤자 나만 손해라는 것을 알기때문이다.
"이봐."
"........."

"여기 봐. 여기 좀 보라니까?"
난 시선한번 주지 않은 채 그를 무시한다.
내 주변을 얼쩡거리던 그는,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끝내는 기어코 담배를 카펫 위에 비벼끈다.
"... ..."

"괜찮겠어? 청소가 더 힘들어질텐데."
.....매번 이런 식 이었다.
가족과 이웃들, 주변사람들에게는 흠 없는 모범생처럼 행동하면서,
그는 내 앞에서 만큼은 천하의 불량배가 따로없다.
부모님이 집을 나서고 난 뒤의 그는, 정말 언제나 깜짝 놀랄정도로 솔직하고 저돌적이었다.
그는 날 자기 바람대로 인형처럼 앉혀놓고 나면, 커튼을 모두 친다. 낮 임에도 방 안은 캄캄하다.
그러면 그는 한참을, 어두운 방 안에 선 채로 감상하듯 나를 뜯어보다가,
천천히 머리카락이나, 어깨, 손 같은 것을 만져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혹은 코를 들이밀고는 짐승처럼 냄새를 맡아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손길 어디에도 저질스러운 욕정은 없다. 날 괴롭히면서 내숭을 떠는 그가 가증스러우면서도,
그 순간, 그 조심스러운 접촉에서 그의 순수한 애정을 엿볼때 나는 어딘가 동정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낮 시간, 커튼 뒤의 어둠 속에 숨어 일어나는 접촉은, 은밀하면서도 천진한 호기심에 가득 차 있다.
그럴때면, 그는 꼭 온기를 그리워하는 아이같다.
"네 앞에선 발가벗은 것 같아. 당신이 이 집에 온 이후로,
저 문턱을 넘은 이후로 내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것 같다고"
어느날, 넋을 놓은 표정으로 내 종아리를 쓰다듬는 그에게, 난 조용히 애원한다.
"그렇다면 제발, 날 괴롭히지 마."
"어째서?"
그는 또다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동정심은 사라지고, 난 다시금 그가 미워졌다. 왜 그는 내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걸까. 왜.
"난 네가 우는게 좋아. 네 얼굴이 순수한 감정으로 일그러지고,
오롯이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이 좋아."
"넌 미쳤어. 미이야."
내 치를 떠는 듯한 어투에, 그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어차피 어떻게해도 넌 내게 웃어주지도 않잖아."
시간이 흐를 수록, 그는 내가 다른 것에 관심쏟는것을 못견뎌했다.
그릇, 청소, 잔디 깎는 것 부터, 공부까지 모두 내가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난 다음에야 허락한다.

내가 어학원 같은 반의 남자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돌아오는걸 보기라도 한 날에는
돌아보는 눈길은 다소 조급함까지 엿보인다.
인사를 나누고 문을 열자마자, 날카롭게 날 추궁하는 케빈.
"... ... 누구야?"
"그냥 친구들이야. 학원 친구들."
그는 날 최대한 집 안에 가둬놓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난 그럴때마다 뭍 위로 나온 물고기처럼 절박하게 퍼덕였다.
그럴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놓아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집 안에서 날 괴롭힐 수는 있어도,
그는 날 완벽하게 속박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케빈은 그것에 대해 언제나 강박적인 불안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언니, 언니. 동화책 읽어줘!"
그러나 분명, 내가 돌봐야만 할 아이는 케빈 뿐만이 아니었다.
실리아는 내게 고향에 두고 온 여동생을 생각나게 한다. 난 그애가 한없이 사랑스러웠지만, 많은 관심을 써주지는 못했다.
가족들과 있을때 완벽하기 짝이 없는 오빠였던 케빈은,
셋이 남겨졌을때면 여지없이 돌변하곤 했다.
그녀가 내게 놀아달라 칭얼거리기라도 하는 찰나에는,
케빈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내게서 떼어놓았다.

"실리아 오빠가 말 했잖아? 언니는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고.
그녀를 귀찮게 하지 말랬잖아, 응?"
그러나 나는 사실 케빈보다는 무구한 애정으로 매달리는 실리아 쪽이 훨씬 편했다.
난 그렇게 조금씩 실리아와 있는 시간을 늘여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은 그저 케빈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할 곳이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애에게 쏟는 애정이 깊어질 수록 케빈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리고 어느날,
"실리아, 맙소사, 무슨 일이야? 어디 다친거야?"
"언니, 언니. 눈이 너무 아파."
화장실 바닥에서 울고 있는 실리아의 모습에, 난 다급히 그애를 안아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초조한 기다림 속에 이루어진 검사. 마치내 의사는 그애가 각막에 손상을 입었고
시력에는 다행히 이상이 없지만, 한동안 입원한 채로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까딱했다가는 실명까지도 유발할 수 있었던 상황에, 난 거의 패닉상태가 되고야 말았다.
"실리아가 실수로 세제를 엎었어요.
죄송해요. 제 부주의에요. 제가 함께 집에 있었는데도..."

내가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사죄했을때,
난 분명 그들의 등 뒤로 어딘가 묘한 미소를 짓는 케빈을 보았다.
그 때 집에는 분명 나와 케빈이 함께 있었다.
..그러나, 심증만으로 내가 내밀 수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다.
실리아를 부주의하게 내버려둔 사건으로 신뢰를 잃은 나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당장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실리아를 온 종일 보육원에 맡기려 한다며 돌려 말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해고나 다름 없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이곳에서 나가도 머물곳도, 돌아갈 곳도 없다.
"케빈. 부탁이야. 그 때 너도 함께 있었잖아? 부모님께 말해줘."
밤을 지세우며 고민한 나는 결국 케빈에게 애원했다.
그 애는 이 집안에서 분명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분명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애절한 부탁에 가만히 등을 기대어 앉아있던 그가, 상체를 일으켜세워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내게 뭘 해줄건데?"
"뭐든지. 뭐든지 해줄 게. 제발 부탁이야."
눈물을 뚝 뚝 흘리기 시작한 내 앞으로 그가 다가온다.
그는 내 턱을 잡더니 눈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그럼, 널 만지게 해줘."
"하지만, 그건, 그건 언제나 네가 하는거잖아."
그러자, 갑자기 바닥으로 밀어붙여지는 몸. 케빈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깜짝 놀란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내려는데,
내 허벅지를 크고 뜨거운 손이 덥썩 붙잡아 왔다.

"이런식은 아니었지."
난 숨을 멈추었고,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의 눈 안에서 번민하는 동물적 갈구를 엿보았다.
난 거부해야만 했다. 싫다고, 그것만은 싫다고. 그러나 무언가 내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난 망설인다. 그리고 영리한 그는 그 짧은 순간 내가 내비친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뜨거운 입술이 도무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부딫혀온다.
"걱정 마."
난 정신없이 밀어붙여지는 와중에 그의 웃음섞인속삭임을 듣는다.
"네가 이 집에서 나갈 일은 없을테니까."
난 이 상황이 모두 그의 계략 아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 한다.
그러나 이미 모든것은 늦고 말았다. 그리고, 어째서 일까.
난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몸에 혼란스러웠다.
나 또한 실리아를 핑계삼아 이 방에 올라온걸까.
그토록 싫었던 케빈의 손길은
지금, 왜 이토록 짜릿한걸까.
2.
우연히 살인현장을 목격하게 된 여행객 여시와
그 살인마,
HANNIBAL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휴가차 떠난 미국여행.
첫날 초보 관광객 답게 가이드를 졸졸 쫓아다니던 나는,
3주째에는 홀로 자유여행을 하고자 큰 마음을 먹고 렌터카를 빌리기에 이르렀다.
지도도, 네비게이션도 완벽하다. 만발의 준비를 갖춘 후, 옆 도시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지고, 추적추적 빗줄기가 창을 때리기 시작한다.
안개가 끼어 유독 음산한 도로를 미끌어져 내려가던 도중, 난 자동차 전조등이 껌뻑거리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린다.

"뭐야? 아씨...."
어디선가 털털거리는 소리까지 나자, 난 튀어나오는 욕설을 참기가 힘들었다. 당황한 나는 갓길에 차를 세운다.
경비탓에 싸구려 차를 빌렸던 것이 문제였을까. 제발 엔진에 문제가 생긴게 아니어야 할텐데.
몹시도 운이 없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온 나는,
문득, 이 인적드문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있는 것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것을 깨닫는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온통 새카만 차 한대가 등조차 키지 않고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혹시나 사고라도 난 것인가 싶어, 난 조금 더 다가간다.
트렁크 뒤 편에 누군가가 허리를 숙이고 서 있었다. 소리내어 그를 부르려던 나는,
트렁크 바깥으로 비죽 튀어나온 발 한쪽을 보고는 얼음처럼 굳어버린다.
"맙소사....."
남자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는가 싶더니,
지체없는 발걸음이 성큼 성큼 내게로 향해 온다.

그렇게 눈 앞이 아찔해 지는가 싶더니,
난 도망칠 겨를도 없이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걸까,
깨질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나는,
두 발목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고
그 고리는 단단히 벽과 연결된 속박장치로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난 당황한 채 주변을 둘러본다. 커다란 밀실, 언뜻보면 평범하기 이를데 없는 방 같았으나 어디에도 창문은 없었다.
여긴 도대체 어디지? 난 패닉 상태에 빠진채로 마구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사슬은 아무리 잡아당겨도 꼼짝을 않는다.
"누구 없어요? 여기 사람살려! 제발 도와주세요!"

"이 집의 건축가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죠.
당신에게는 안타깝게도 이곳은 완벽하게 방음처리가 된 구조입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깜짝놀라 돌아본 등 뒤에는 키가 큰 남자가 서 있다.
말끔한 얼굴, 그러나 나는 소름이 머리끝까지 달리는것을 느낀다.
그 남자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살인마.

"이틀을 꼬박 굶었으니 허기가 질 겁니다. 아침을 가져왔습니다."
한없이 정중한 어조로 내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
그의 태도는 내 발목의 쇠사슬도, 이 상황도 모두 거짓말 인 것 처럼 침착하기 짝이없다.
그러나 그의 태연함은 내게 숨이 넘어갈듯한 공포로 다가올 뿐이었다.
점잖게 내 발 앞에 내려놓아진 그릇들. 난 그것이 끔찍한 벌레라도 되는 양 발버둥을 치며 멀어진다.
"아저씨, 제발요. 살려주세요.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을게요
경찰에 신고 안할게요 제발 날 내보내줘요.
나 어차피 이곳 사람도 아니에요. 그냥 조용히 우리나라로 돌아갈게요."
그러나 울부짖는 나를 한참동안 정말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그냥 방을 나가버리는 남자.

그 이후,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의 방문이 이어진다.
남자의 차림새는 언제나 기가 질릴 정도로 완벽한 정장이다. 손에 든 것은 호화로운 음식.
그는 이곳이 호텔이고, 매우 정다운 친분이 있는 고객에게 서비스를 하는 듯한 태도로
내게 먹을 것과 옷가지들을 제공한다.
"내보내 줘요."
"제발."
그는 헨젤과 그레텔의 마녀라도 되는것일까.
그러나 이러다가 아궁이에 고스란히 처박히는 신세가 되는건 마녀가 아니라 나일텐데
밥상을 집어던지며 화를 내고 울부짖을때면, 그는 조용히 침묵으로 주의를 준다.

그리고 내 반항은 그의 권고를 넘어서는 일이 없다.
난 결국 그 호화로운 음식들을 그가 보는 눈 앞에서 다 먹어치운다.
가끔 그는 날이 선 톱과 용도를 모를 약 같은걸 가져오기도 했다.
그럴때면 겁에 질려 말도 못할 정도로 떠는 나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마치 고민하듯, 자신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단 듯이,
가져온 기구들은 얌전히 내버려둔채로 가만히 날 바라보기만 한다

아주 드물게는 바들거리는 내 뺨을 쓰다듬기도 한다.
그 손길은 피부의 얕은 온기만 스쳐 지나가며,
마치 내 생기만을 확인하려는 듯이, 약동하는 목의 맥박까지 흘러내리다 주저하며 떨어진다.
"내게 왜 이래요?"
애원도 해보고 화도 내보고 욕도 하고 회유도 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매한가지.

"당신은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며칠이 지났는지, 혹은, 몇 주가 지났는지도 모를 시간 속에서
어느날 난 결국 반항이 체력소모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날카롭게 남자의 기분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한꺼풀 뒤집어 씌운 듯한 무표정이나,
내가 고분고분 할때면 그의 입매가 부드럽게 가라앉는다는 것을 안다.
감출 수 없는 혐오감을 꾹 목 아래로 눌러붙이고,
나는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얌전히 그의 모든 속박을 수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상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면적으로 돌아왔다.
나는 숨을 죽이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뜨거운가요?"
가끔 남자는 정말 끔찍할정도로 다정했다.
내가 뜨거운 수프에 익숙하지 못해 수저를 달칵거릴때면, 그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그것을 입으로 후후 불어 내 입가에 떠 담아 준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그 숟가락을 노려보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먹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순종적인 태도를 고수할 때면,
남자의 가면같은 얼굴은 부드러운 미소를 띈다. 나는 그 순간 남자의 눈가에서 드러나는 애정을 읽는다.

"Good Girl."
그것은 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애정이라니. 그러나 분명, 날 대하는 그의 손길은 부드러우며 다정하다.
난 그간 아주 예민하게 남자를 살펴본 탓에 그가 아주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정말로 날 개 처럼 길들이는것을 즐기고 있는걸까?
거실까지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을 즈음에는 난 방안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당신이 날 애완동물 취급한다면, 기꺼이 동물이 되어주리라 반항적인 심리가 작용하기도 했다
그는 쉽게 자기의 사적인 영역을 내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책을 꺼내고 부엌을 휘젓고, 마음껏 어지럽히는 내 태도에도
그는 어디 할테면 해 보라는 듯이 대응했다.

"난 버릇없는 개를 길들이는걸 좋아하죠. "
그러나 내 반항은 그 한마디에 멈추었다. 그가 식사용 나이프를 들고 있기에 더 위협적으로 들렸는지도 모른다.
단숨에 창백해져 고개를 숙이는 나를 바라보며 그는 웃었다. 내게 지어 보이는 남자의 웃음은,
대체로 진심에 가까웠다. 난 그럴때면 언제나 기분이 이상해진다.

"왜 나를 가둬두는거에요? 왜 날 죽이지 않죠?"
어느날은 정말, 너무나 궁금해서 견딜 수 없어 물어본 내 말에,
한참을 생각하던 남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대답한다

"...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나도 편하겠군요"
무슨 뜻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그 이상으로 물어보지 못했다. 나 또한 그 답을 아는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한달이 지난 날에는, 겨우 창문이 있는 방 까지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나는 옆집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때 즈음 나는 집요하게 이어지는 속박과 훈련에, 집에서 나가기를 반 쯤 포기한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집의 주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이야길 나눌 수 있는 남자.
그를 통해 나는 나를 납치해 온 남자가 아주 유능하고 저명한 정신과 의사라는 것과
주변의 평판이 놀라울 정도로 좋다는걸 알게되었다. 누구도 그를 살인자라고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의 대외적 모습이란 정말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난 혼란스럽다. 그를 알수록, 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남자가 집을 비울 때면 발의 사슬이 허락하는 범주까지 방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옆집 남자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이후, 난 다시 탈출에의 의지를 불태우며
반토막난 희망이라도 끌어안고 집안을 다. 혹시, 혹시라도 증거가 남아있을지 몰라.
그러나 그 날 있었던 일이 꿈 인것 마냥,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한 집안 어디서도 살인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사슬의 길이는 점점더 늘어나고,
그와 반대로
서서히 남자에게 길들여져가는 나.

"당신이 예의만 갖춰준다면 오늘 저녁식사는 거실에서 함께 하기로 하죠."
어느날 저녁 몸에 맞는 드레스를 함께 들고 방으로 온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의아했지만 군말없이 그의 말에 따른다
"요즘따라 옆집의 남자와 자주 대화를 나누더군요. 무슨 이야기를 했죠?"
"... ... 별것 아니에요. 그냥 시시한 잡담. 날씨나 지나가는 행인들, 다른 이웃들에 관한거."

언제나와 같이 그 미묘한 표정에서 나는 아무것도 집어낼 수 없다.
그러나 어딘가 평소와는 다른 불쾌함이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음식은 어떻습니까?"
"맛있어요."
고민하던 나는 작게 덧붙였다
남자가 오늘 유난히 친절했기때문에 마음이 누그러진 탓일까.
"... ... 고마워요."

그러자 어딘지 모르게 흡족한 미소를 짓는 남자.
"당신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시선을 맞출 상대는 나 하나면 충분합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식사도 마치지 않았는데,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일어나 뒷걸음쳤다.


벽까지 내몰린채로,
몸을 기울인 남자는 내 귓가에 한숨같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 디저트는 침대에서 먹기로 하죠."
치마를 부드럽게 걷어올리는 손길은 마치 수십번은 더 해보았던 것 마냥 자연스럽다.
나는 당황한채로 몸을 뒤로 빼면서도, 그를 만류하지는 않는다.
어째서 반항할 수 없는걸까? 목덜미로 다가오는 그의 향이 기분좋게 느껴진다.
정말로 나도 모르게 그에게 길들여져 버린걸까?
입술 안으로 감싸오는 숨결과, 허벅지를 파고드는 뜨거운 손바닥을 느끼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어제부터 옆집 남자가보이지 않던데.
이사라도 간 걸까?
참고 영화/드라마 : 케빈을 위하여, 한니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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