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겠다고 하는 순간부터 멀어져도, 헤어져도, 보이지 않아도 사랑은 여전히 사랑이질 않은가.사랑이어서 일어난 그 많은 일들을 단번에 지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말수가 줄어들듯이 너는 사라졌다네가 사라지자 나도 사라졌다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것은 발설하지 않은 문장으로너와 내가 오래오래 묶여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잊혀진 줄도 모른 채로 잊혀지지 않기 위함이다- 그믐으로 가는 검은 말 中 / 이제니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세계의 어디선가누가 생각했던 것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세계의 어디선가누가 생각하고 있는 것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세계의 어디선가누가 막 생각하려는 것울지 마라 얼마나 기쁜 일인가이 세계에서이 세계의 어디에서나는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얼마나 기쁜 일인가나는 수많은 남과 남으로 이루어졌다울지 마라- 어떤 기쁨 / 고은큰 배가 항구에 접안하듯큰 사랑은 죽을 만큼 느리게 온다나를 이끌어다오 작은 몸이여 ,온 몸의 힘 다 내려놓고예인선 따라 가는 거대한 배처럼큰 사랑은 그리 순하고 조심스럽게 온다가도 가도 망망한 바다풀 어헤드로 달려왔으나그대에게 닿기는 이리 힘들구나서두르지 마라나도 죽을 만치 숨죽이고 그대에게 가고 있다서러워하지 마라이번 생엔 그대에게 다는 못 닿을 수도 있다- 데드 슬로우 / 김해자그래, 사랑을 하자. 사랑을 하더라도 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자.옆에 없는 사람처럼 사랑하는 일. 그것은 사랑의 끝이다. 완성이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당신이 비록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산다 해도 세상 어딘가에는 반드시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라고 하던 말.나는 왠지 평생보다 더 긴 세월을 외로워했을 파타고니아의 그 춥고 흐린 하늘을 계속 올라다보면서 며칠을 지냈다.- 우리 얼마나 함꼐 中 / 마종기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비문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은는이가 / 정끝별내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면 세상은 끝나는 거라고,비록 세상에 단 한 사람일지라도 죽도록 미워해버리면 세상은 그냥 그렇게 고장나버리는 거라고 믿기로 했던 겁니다, 그곳에서.그리고 사랑하고 싶었던 겁니다. 누군가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늘 지켜 보며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네가 울면 같이 울고네가 웃으면 같이 웃고 싶었다깊게 보는 눈으로넓게 보는 눈으로널 바라보고 있다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하기에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모든 것을 잃더라도다 해주고 싶었다- 관심 / 용혜원정말 사랑했던 사람하고는 영원히 못헤어져, 누굴 만나든 그저 무덤 위에 또 무덤을 쌓는 것뿐이지.- 실내인간 中 / 이석원비가 오고 마르는 동안 내 마음에 살이 붙다 마른 등뼈에 살이 붙다 잊어도 살 수 있을까 싶은 조밀한 그 자리에 꿈처럼 살이 붙다 풍경을 벗기면 벗길수록 죄가 솟구치는 자리에 뭔지 모를 것이 끊어져 자리라고 할 수 없는 자리에 그 짐승 같은 시간들을 밀지 못해서 잡지 못해서살이 붙어 흉이 많다- 순정 / 이병률꽃잎의 분홍이 춥다입이 돌아가도록물밑으로만숨는 사람아그대가 없으니 내가 없다고백하지 못하는 기억들이 있다고백은 분홍에 가깝다꽃잎에서 꽃잎까지분홍에서 꽃잎까지분홍이 차오르는 시간분홍은 연못을 일으켜 세우는 색고백은 분홍의 높이에서 터진다상처가 넘쳐도 수련은 넘치지 않는다분홍의 안쪽당신은 수련의 시작이라 읽고나는 끝이라 읽는다- 분홍의 안쪽 / 서안나누군가가 마음에 들어와 있다는 건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날씨처럼, 문득 기분이 달라지는 것.갑자기 눈가가 뿌예지는 것.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진 난 것처럼 흔들리는 것.-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그 집에서의 하루는 그 우물에서부터 시작되었어.엄마가 신새벽에 그 물을 길어올리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지.아버지와 나도 그 우물가에서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어.이제는 그 시골마을도 수돗물을 사용해.우물은 덮개로 덮여있어.그 집에 가게되면 덮개를 걷어내고 우물 속을 들여다 봐.아직도 저 깊은 우물속에 물이 찰랑찰랑 고여있어.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기뻐.내가 본 최초의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는 게 안심이 돼.그 물을 들여다 볼 때만큼 너를 좋아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中 / 신경숙그녀는 자신에게 참을성이 없었던 것을 후회했다.함께 더 오래 있었더라면 그들은 조금씩 그들이 사용했던 단어들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그들의 어휘는 너무도 수줍은 연인들처럼 천천히 수줍게 가까워지고,두 사람 각각의 음악도 상대편의 음악 속에 녹아들 수도 있었을 텐데,그러나 이제 너무 늦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 밀란 쿤데라확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