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최초 단계는 그 사람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는 것이다.사소한 인사든, 문자든, 메일이든 말을 건네는 데서 사랑의 발화가 시작된다.이 최초의 발화 이후 설렘의 시간이 얼마나 지속되는지는 알 수 없다.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국 사랑은 그 말 건넴으로 시작되고 그 말 건넴의 좌절로 끝난다는 것이다.이를테면 '안녕하세요'나 '오랜만이에요'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로 시작해서'그만 말하자'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로 끝나는,말을 둘러싼 진부한 사랑의 파국 말이다.- 사랑의 미래 中 / 이광호우리는 서로의 몽타주다 나는 세계를 지우는 일을 했고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구멍에 빠졌던 가난 의붓아들과 의붓딸의 만남우리를 낳지 않은 우리의 부모들을 탈각했다가진 적도 없던 것을 지키려고 애썼고서로 악수하면서 서로의 손을 혼동해서 침묵했다우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게 되었음에도거울로 방을 가득 채웠으며서로의 혈액형도 모른 채 피를 섞었다 나는 녹슨 문 앞에 앉아고드름을 부러뜨리는 부랑아너는 너에게도 어울리지 않아서하염없이 누군가를 치환하지우리가 살찌고 행복해서 질려버릴 때잊을 수 있겠지만 잊지 않겠다는 주를미신처럼 읊조릴 거야내가 없었던 세상을 가장 근처에서 만지는 일네가 없는 꿈을 꾼 적이 없다 우리는 유기되었다세계와 거의 비슷해지는 중이다없애러 간 곳에서 얻어서 돌아올 것임을 안다갑자기 부끄러워져서 몸이 부풀어 오른다예쁜 예감이 들었다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연인, 이이체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누구의 부드러운 혀 끝에도 닿지 못했다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모래 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어다그는 나를 지워준다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멜랑콜리아, 진은영가장 지독한 기다림은 기다림의 기척을 내지 않는 것,기다린다는 것을 절대로 알리지 않는 기다림이다.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가장 순수한 기다림이다.그러나 그것은 기다리지 않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랑의 미래 中 / 이광호눈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었다 눈은 그치고 보름달은 환히 떠올랐는데 눈사람 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자꾸 나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불을 켜고 맨발로 달려나가 대문을 열었다 부끄러운 듯 양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사람 한 사람이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새도록 어디에서 걸어온 것일까 천안 삼거리에서 걸어온 것일까 편지 겉봉을 뜯자 달빛이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는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 꿈 / 정호승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 한다.- 모순 中 / 양귀자그는 나의 연인이었습니다.당신이 그리워하고 있는 그는 제 기억 속에서 살아있습니다. - 러브레터 中연애는 자유라지만 그건 거짓말입니다.연애는 강제예요. 그렇죠?누군가가 좋아지는 것은 스스로 결코 말릴 수가 없으니까요.- 9월이 영원히 계속되면 中 / 누마타 마호카루이십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존재하는 시간이다.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모순 中 / 양귀자나는 사랑에 빠진 거예요.그건 틀림없는 연애 였어요.자나 깨나 그 사람만 생각하는 거예요.늘 몸이 달아올라 있고,그 사람을 생각하면 울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팠어요. - 도시전설 세피아 中 / 슈카와 미나토우리는 어떤 것이 없어서 아쉬움을 느낄 때라야 비로소 그것이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나무 中 / 베르나르 베르베르이 모습과 저 모습을 겹쳐놓으면 한 사람이 된다 저 모습과 다른 모습을 겹쳐놓아도 한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다른 모습과 또다른 모습을 겹치면서 나는 한 사람이다 나는 한 사람을 안다 그의 모습을 알고 그의 다른 모습을 알고 그 또한 그라는 걸 알고 손을 내민다 언제든지 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다 너는 손을 내밀었다가 멈추었다 다른 사람이란 걸 확인하고 다른 모습을 떠올리다가 마저 내밀었다 손은 다른 사람과 인사하고 있다 손은 다른 모습과 악수하고 있다 그게 한 사람이란 걸 알 때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흘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갔고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는 나의 모습을 의아해할 것이다 나는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쨌든 한 사람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고개를 가로졌다가 미쳐 못 챙겨온 나의 모습을 생각하다가 잠들었다 한 사람이 자고 있다 얼굴이 너무 많이 변했다 잠자는 모습도 그가 아니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자고 있다 나의 한평생 동반자라는 사람이 방금 전까지 누워 있다가 나갔다 내가 잠든 모습을 보고 - 모습 / 김언너를 잃고 싶지 않다. 당신은 말하지만 나를 잃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 - 제비꽃 설탕절임 中 / 에쿠니 가오리너를 기다리며 줄을 돌린다 나비야 나비야 줄을 넘어라 너를 기다리며 줄은 돌아가고 나비는 정신없이 뛰어오르다 뒤로 한 바퀴 돈다 한낮 골목의 적막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너를 기다리며 줄은 돌아가고 너를 기다리며 돌리는 줄은 멈춰지지 않는다 저만치 갔던 시간도 다시 돌아올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그립다 너를 기다리며 돌리는 줄은 끊임없이 돌아서 온다 눈물 나도록 그리운 것들이여 나는 지금 이 비루한 기억의 기차역 뒷골목 하꼬방에 앉아 언제까지라도 너를 기다릴 것이다 너를 되 끌고 오는 손길이 아무리 늦더라도 나는 지금 무작정 너를 기다리며 기다릴 것이다 무개화차에 실려 떠났던 석탄들이여 모든 것을 팽개치고 달아난 세월이여 나는 이 기억의 기차역 뒷골목에 되돌아와 언제까지라도 너를 기다릴 것이다 너를 기다리며 줄을 돌린다 나비야 나비야 줄을 넘어라- 그리운 골목 / 금기웅아무도 찾지 않는 강가를 걸었다바람을 업고 포도나무 반대편으로 몇 걸음 떼었더니당신이 젖은 손을 흔들던 쪽에서꽁지깃이 유난히 붉은,푸른 머리를 가진 새가 날아올랐다 새들은 모두 푸른 영혼을 가졌을 거라고그래서 하늘이 푸른 거라고일렁이는 손으로 강물 위에 새를 그렸더니금세 물결이 데려갔다 내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나는 포도나무에 필 꽃들을 기다리고영영 돌아오지 않을 소식을영영 기다릴 수밖에 없는 폐허의 심정으로천천히 저녁을 걸었다 포도넝쿨은왜 한사코 서쪽으로만 뻗어 가는지포도밭에서 건너온 노을이흐르는 강물을 다 건너가기 전에 포도나무도 모르는포도나무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당신도 모르는당신의 배후가 되고 싶었다 - 저녁이 다 오기 전에 / 고영별빛들이 여기에 와 닿는, 헤아릴 수 없이 아득한 시간에 비하면, 지금 눈빛의 흔들림은 얼마나 짧은가?- 사랑의 미래 中 / 이광호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