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카니 앉아 있습니다이른 봄빛의 분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발목이 햇빛 속에 들었습니다사랑의 근원이 저것이 아닌가 하는 물리도 생각하고 있습니다이 빛이 그 방에도 들겠는데가꾸시는 매화 분은 피었다 졌겠어요흉내 내어 심은 마당가 홍매나무 아래 앉아 목도리를 여미기도 합니다꽃봉오리가 날로 번져나오니 이보다 반가운 손님도 드물겠습니다행사 삼아 돌을 하나 옮겼습니다돌 아래, 그늘 자리의 섭섭함을 보았고새로 앉은 자리의 청빈한 배부름을 보아두었습니다책상머리에서는 글자 대신손바닥을 폅니다뒤집어보기도 합니다마디와 마디들이 이제 제법 고문입니다이럴 땐 눈도 좀 감았다 떠야 합니다이만하면 안부는 괜찮습니다 다만오도카니 앉아 있기 일쑵니다- 안부 / 장석남오늘 저녁엔 한번 찬찬히 살펴 보시길봄비 스스로 내리는 저녁무렵혹시 당신 양복 뒷단을희고 찬 낯선 손이 몰래 다가와살며시 잡아당기지는 않는지혹시 당신 아파트 문 위에 손톱자욱이 나 있지는 않은지자동 응답기에 숨죽인 흐느낌이 녹음되어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시내로 들어가는 전철을 기다리면서일간지에 코를 박고 있는 동안, 그리곤불밝은 전동차 안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들어가는 동안,혹시, 건너편, 시외로 빠져나가는 플랫폼어두운 한 구석에 숨어서 한 여자가 당신을막막히 애절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그녀가 가슴을 불어가는 바람을 견디느라 입술을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지는 않은지 당신이, 문밖으로 쫓아버린 여자 당신이, 도시에서 살기 위해서 잊어버린 여자그 여자, 당신의 일상이 잊어버린, 그러나어쩌면 당신의 영혼이 아직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건너편의 여자 - 건너편의 여자 / 김정란붉은 글자 위로 눈 내립니다소리 내어 읽어보던목소리도 눈 맞습니다 서성대던 마음이 입 안에 갇혔습니다- 붉은 / 이성미추한 것도 많았지만 아름다운 것도 많았지요미운 것도 많았지만 예쁜 것도 많았지요가난하지만 힘껏 살았소짧았지만 오래 살았소오래 살았지만 꿈같은 시간이었소후회한들 무엇하랴힘이 닿는 데까지 살았다오이제 아주 나쁜 것도 좋소모든 게 좋소추한 것도 아름답소모든 게 아름답소후회도 소망도 없이,아쉬움도 충만도 없이그냥 담백하고 맑게 가라앉은 심정으로모든 것과 조용히 화해한 심정이오- 미리 써 본 유서 / 박이문나, 지금 덤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 것만 같아 나, 삭정이 끝에 무슨 실수로 얹힌 푸르죽죽한 순만 같아 나, 자꾸 기다리네 누구, 나, 툭 꺾으면 물기 하나 없는 줄거리 보고 기겁하여 팽개칠 거야 나, 지금 삭정이인 것 같아 핏톨들은 가랑잎으로 쓸려 다니고 아, 나, 기다림을 끌어당기고 싶네- 나, 덤으로 / 황인숙나는 등이 가렵다 한 손에는 흰 돌을한 손에는 우산을들고 있다 우산 밖에는 비가 온다 나는 천천히어깨 너머로 머리를 돌려등 뒤를 본다 등 뒤에도 비가 온다 그림자는 젖고나는 잠깐슬퍼질 뻔한다 말을 하고 싶다피와 살을 가진 생물처럼실감나게 흰 쥐가 내 손을떠나간다 날면,나는 날아갈 것 같다- 천사 / 신해욱가슴 위로 이맘때쯤 배 한 척 지나가는 일은숨겨두었던푸른 눈물에 상처를 내는 일이다거품처럼 요란한 그 길에서기억은 포말처럼 날뛰고 뒤집어지는데,그 위를물그림자가 가고 있다눈물 속에서 뿜은 용암 덩어리가 스러지면모든 길은 떠나거나 흐르거나칼날 지나간 자국마다그것을 견딘 힘을 본다어느새 지워지는 흉터의 길들처럼아무 일 없던 것처럼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그 길의한순간이 잘 아물어 있다낯선 세계에서 잠시 다녀온 듯낮잠에서 깨어난 듯- 회복중이다 / 이사라여기를 떠날 수 없다여기서 너를 잃었기에내 눈은 쉼 없이 헤매고내 발은 걸음을 잊었다이대로 백골이 되리더 이상 시간은 숨을 쉬지 않는다어떤 우연이 내 손에네 손을 쥐어주기 전에는- 이 시간 밖으로까지만이라도 나를 데려가다오 / 황인숙어리고 약한 것들이조금씩 퍼져나가 말도 없이우글우글하다아무라도나를 발견해주기를 바라면서기도를 했던 적이 있다이 이상한 자국은 어디서 온 것일까엷어지고 엷어지고나는 우주 건너편에서 빛나는 항성의새로운 생명체가 된 것만 같다우리는 우리가태어나기 전의 나라에서주민이었던 적도 있을까밤이 너무 까매서 잠들지 않으려고응애응애우는 애기처럼울어도 울어도사라지지 않는 게 있다는 듯흰 눈이 내린다따뜻한 손에 닿아녹아없어지려고자꾸 자꾸내린다- 몽고반점 / 하재연깊고 깊어라행동 뒤의 나의 생각내 혀는 마음보다정직했으니- 후회 / 황인숙서러움에 어떤 거리가 생겼다모든 사물은 어떤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그때 비가 쏟아졌다 어디였을까내가 자세히 그리워하지 않았던 곳이택시에서 문득 울고 싶은 대낮이 있다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성당이나 철길을 보고 서러워지는 것도 이유가 없다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어디선가 들깨 향이 났다꺳잎을 보면 야구공이 생각나는 건 개인적인 일이다오래된 커피 자국을 본다- 이준규 / 거리교탁 위에 리코더가 놓여 있다불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그 아이의 리코더를 불지 않았다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보고 있었다섬망도 망상도 없는 교실에서였다- 레코더 / 황인찬유리는 내용이 없어 투명하다유리처럼 다 담을 수 있어마음은 아프기도 하다 가자상처가 몸뚱이가 되는 유리야상처가 문이 되기도 하는 마음아- 유리 / 함민복느티나무 잎사귀 속으로 노오랗게 가을이 밀려와 우리 집 마당은 옆구리가 화안합니다그 환함 속으로 밀려왔다 또 밀려나가는 이 가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한 장의 음악입니다누가 고독을 발명했습니까 지금 보이는 것들이 다 음악입니다나는 지금 느티나무 잎사귀가 되어 고독처럼 알뜰한 음악을 연주합니다누가 저녁을 발명했습니까 누가 귀뚜라미 울음소리를사다리 삼아서 저 밤하늘에 있는 초저녁 별들을 발명했습니까그대를 꿈꾸어도 그대에게 가 닿을 수 없는 마음이 여러 곡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저녁입니다음악이 있어 그대는 행복합니까 세상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도 음악이 되는 저녁,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누워서 그대를 발명합니다- 그대의 발명 / 박정대누가 쪼개놓았나저 지평선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나오는 저녁누가 쪼개놓았나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내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상처와 상처가 맞닿아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누가 쪼개놓았나흰 낮과 검은 밤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우리 만남의 저녁- 지평선 / 김혜순말하지 않는 말로 말할 때, 말하지 않은 말로 말할 때,서로에게 서로를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그때, 우리를 우리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다만 희미한 암시로. 다만 흐릿한 리듬으로.뜻 없은 것들. 뜻 없는 것들. 뜻 없는 것들.무한을 보고 싶다. - 이제니확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