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상해 보라,
이곳은 최대의 범죄율을 자랑하는 도시.
살인, 강간, 마약, 절도, 폭행...
매일같이 실현가능한 모든 범죄가 길거리에서 넘쳐난다.
이 도시의 시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빈민층, 혹은 버려진 고아, 노숙자, 범죄자들.
지금 이 도시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범죄자들과 결탁하여 골수까지 썩어버린 검찰이나,
종이조각에 불과한 법이 아닌
도시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짜 수호자'
영웅, 즉 히어로.

그리고 그 중 한명이 바로
당신인 것이다.
낮에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밤에는 악당들을 소탕하는 영웅으로 살아가는 히어로인 여시.
코드네임, 이름하여
'Y'
1.
A급 지명수배자이자 친구의 오빠,
TAYLER

도시를 지키는 것이 사명인 나.
악당을 발견하거나 범죄 현장을 목격한다면, 난 히어로로서 그를 당장 응징해야 마땅하다.
그 소명에 단 한번도 소홀해 본 적 없던 난, 그러나 최근 커다란 딜레마에 빠진 상태.
... 그 딜레마의 이유란 바로 타일러
나의 가장 친한 친구, A의 오빠인 그가
최근 십 수 차례 이어진 폭탄 테러의 용의자로 의심받고 있는 악당,
'B맨' 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의 집요한 수사에도 전혀 밝혀진 바 없는 그의 정체.
그 이유는 그의 얼굴을 보거나, 정체를 아는 이들이 결코 살아나지 못했기 때문.
그는 현재 수많은 악당들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인물이다.
진실을 알게된 이후, 난 한동안 친구인 A를 피해다니며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그리고 몇날 며칠 이어진 고민 끝에,
결국 먼저 A에게 오빠에 대한 정체를 알려야 겠다고 마음먹게 된 나.
그러나 심호흡 후 A의 집으로 향한 내가 현관을 들어섰을 때 마주친 것은,
막 옷을 입는 중이던 타일러였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A는 오는 중이야"
"응....."
방 안을 떠도는 어색한 기류. 그러나 나와 달리 그는 평소와 다름이 없어보인다.
소파에 앉아 뻣뻣하게 굳어진 내게, 갑자기 거울 너머로 고갯짓을 하는 그.

"이리 와 봐."
"......왜?"
"넥타이 맬 줄 알지? 오랜만에 하려니 헷갈려서."
엉망이 된 넥타이의 매듭을 가리키는 그. 난 주저했으나, 결국 다가가 손을 뻗는다.

그가 고개를 숙이자, 얼굴 바로 앞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뜻한 숨.
평소 스스럼없이 그를 대했던 것이 믿겨지지 않을정도로 나는 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있다.
그런데, 내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가 조용히 입을연다.
"대학은 다닐만 하니?"
"...그냥 그래. 오빠는 요즘 바빠 보이네."

".....글쎄, 바쁜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날카로운 지적에 순식간에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으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평했다.
"요즘들어 왜이리 얼굴 보기가 힘이 들까, 응?
소꿉놀이할 나이는 지났다 이거야?"
"......."
"이런, 잘 하다가... 자, 반대로 넣어야지."
긴장에 자꾸만 어긋나는 내 손등위로 그가 부드럽게 손을 겹쳐온다.
그리고 능숙하게 매듭을 매기 시작하는 손길.
그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잇는다.
"앞으론 자주 들러. A만 널 보고싶어하는건 아니니까."
이윽고 완성된 넥타이의 매듭이 주욱, 그의 단정한 목선 까지 당겨지고,
동시에 따라올라간 내 시선끝에 그와 눈이 마주친다.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이지만, 동시에 날카롭게 날 뜯어보는 듯한 그의 눈동자.
난 팽팽한 긴장감에 숨통이 죄여오는 듯 하다. 그는 내가 사실을 알고 있다는걸 눈치챈걸까?
아냐, 설마....
그 순간, 철컥, 현관에서 들리는 열쇠소리.
구세주, A다. 난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나를 돌려세우는 그.
"자주 올거지?"
".........그럴게."
대답을 듣기 전에는 놔주지 않을 것만 같은 기세에, 난 결국 시선을 피하며 작게 대답했다.
A가 방으로 들어오기 전, 미소와 함께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는 손.
난 결국 그녀에게 사실도 말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온다.
난 여전히 그의 정체를 누구에게도 밝히지 못했다.
다만 어떻게든 그가 더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는것을 막아보기 위해
B맨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누구보다 발빠르게 달려가는 나.

"요즘 정말 자주 보는걸. 히어로씨, 내 스토커야?"
그 날도 여지없이 폭발 직전 나타난 내 모습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다.
난 그에게 총을 겨눈 채 소리를 지른다.
"...도대체 왜 이런짓을 하는거야?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잖아!"
"왜냐고? 역할에 충실하는거지, 너와 마찬가지로 말야."
내가 잠시 집중력이 흐트러진 한 순간, 그가 스위치를 눌렀고,

쾅!
동시에 저 편에서 건물이 날아가는 굉음이 들려온다.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날아 닥치는 끔찍한 열기 사이로 들려오는 그의 속삭임.


"난 악당이잖아, 진 히어로 아가씨."
내가 폭발음과 연기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순식간에 내가 든 총을 낚아챈 후, 날 바닥으로 넘어뜨리는 타일러.

"관 둬, Y. 넌 이 일에 적성이 맞질 않는다고. 웨이트리스, 은행직원, 캐셔...
피땀따위 뒤집어 쓰지 않아도 되는 얌전한 직업도 많잖아.
그런데 하필이면 하고많은 것 중에 히어로라니. 왜 사서 고생을 하지?"
"너같은 놈들 때문이지, 왜겠어?"
이를 악 문채 이어지는 내 말에 그는 이해가 안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숨과 함께 말한다.
"그렇다면 생각할 시간을 주지.
한두달 쯤 푹 쉬면서 다른 직업을 가지는걸 재고해 봐"
"그게 무슨......"
그리고 구둣발이 내 손목을 지그시 밟는가 싶더니, 그대로 으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으스러지는 내 손목 뼈.
그는 고통에 손목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는 나를 잠시 내려다보다
유유히 흙먼지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적어도 몇 달은 꼼짝없이 쉬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게된 나.
그러나 TV에서는 여전히 온갖 사건 사고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히어로 Y가 활동을 중지한 후로, 폭발적으로 범죄가 증가했다는 소식들.
...그리고 물론, 'B맨' 에 대한 뉴스도.
난 하루도 그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지 못한다. 점점 더 늘어만 가는 불안감.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에
결국 의사의 경고를 물리치고, 난 다시 히어로 활동을 시작한다.

"어서 대피하세요!"
어느날, 대규모 화재가 일어난 현장.
난 가까스로 건물 외벽을 지탱한 채 사람들을 대피시키던 와중,
마지막 사람이 빠져나간 순간, 우르르 쏟아진 돌덩어리 아래에 깔리고 만다.
아직 완벽하게 회복되지 않은 팔로는 도저히 밀어낼 수 없는 무게의 돌들.
"잠깐 기다려요! 제발, 조금만 도와줘요..."
그러나 내가 구조한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하는 내 모습을 보고도 모두 뒷꽁무니를 빼 버린다.
점점 더 아프게 몸을 짓눌러오기 시작하는 돌들. 곧 있으면 건물은 완전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도무지 제시간에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주마등 처럼 스쳐지나가는 시간들. 결국 내가 모든것을 체념한 순간,

"네가 목숨을 걸어가며 애쓴 결과가 이거야?"
"........."
"저런 쓰레기들로부터 버림받는것?"
내 몸위로 드리운 그림자. 타일러, 그가 빤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 그의 등 뒤로 날 내버려두고 도망치던 이들이 미동없이 쓰러져 있는것을 눈치챈다.
손쉽게 돌을 치운 후, 날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는 그. 난 지친목소리로 묻는다.
"저 사람들, 당신이 한 짓이야?"
"그래."
"......왜?"
그러자 그는 내게 바싹 얼굴을 붙인 채 속삭인다.
"여시, 널 버렸으니까."
난 그의 한마디에 경직된다.
그는 상관없다는 듯이 내 마스크를 향해 손을 뻗는다.
천천히, 코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밀려 올라가는 천.
"이까짓 마스크 한장 썼다고 내가 널 못알아볼줄 알았어?"
그는 내 상처를 보더니 얼굴을 미미하게 찌푸린다.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그러니 기회를 줬을 때 그만 뒀어야지."
"...오빠가 먼저 테러리스트를 그만 두는건 어때. 그럼 나도 히어로를 그만 둘게."
그는 내 말에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속삭인다.
"히어로를 그만 둬? 거짓말쟁이 같으니."

"난 네가 생각하는 것 보다 널 더 잘 알아.
넌 내가 이 짓을 그만둔다고 해서 결코 영웅놀이를 포기하지 않을거야.
범죄 현장을 본다면 아마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또 뛰쳐나가고 말테지.
넌 예전부터 언제나 같이 착해서, 불쌍한걸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했으니까..."
"......."
"내가 더 간단한 해결 방법을 제시해 볼까?
간단해. 네가 다신 손목을 쓸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거야.
그럼 넌 다시는 영웅놀이는 할 엄두도 내지 못하겠지."
"타일러, 잠깐....."
내 손목의 상처를 꾹 눌러오는 그의 손.
날카로운 아픔에 비명이 튀어나온다.
"그래, 그게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을 지도 몰라.
정의감 넘치는 멍청이 짓을하며 날뛰다, 다른 놈 손에 개죽음을 당하는 꼴을 볼 바에는..."
"오빠, 제발...... 악!"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와 그의 소매안으로 타고 흘러들어갈 무렵,
내 눈물 고인 얼굴을 바라보던 그가 갑자기 힘을 푼다.
난 아찔한 정신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듯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다.
귀 옆으로 한숨처럼 들려오는 속삭임.

"말해봐."
난 기진맥진 해 대답한다.
"........뭘?"
"내 짐작이 맞는지. 정말로 A때문이야?
내 정체를 밝히지 않은 이유?"
".....오빠는 어떤데? 내가 정체를 알고 있는걸 알았잖아? 왜 날 죽이지 않은건데?"
한참의 침묵끝에 그가 낮게 대답한다.
"정말이지, 전혀 악당답지 않은 이유지, Y.
그건 말야,"
마스크가 다시 턱 밑 까지 끌어내려진다. 그리고, 그 위로 순간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
난 그가 마스크 위로 입술을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떨리는 속눈썹이 서로 마주닿고,
얇은 천 위로 들려오는 자조같은 속삭임.
"널 해치기에는,
내가 오래전 부터 널 너무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참고영화: 스파이더맨, 파이트 클럽, 조 블랙의 사랑
2.
히어로인 여시를 동경하는 소년,
SIMON

Y로서 히어로 활동을 시작한지 n년째.
여러번의 위기가 있었으나, 난 지금껏 도시의 수호자로서의 명성을 잘 지켜왔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일까,
내 팬임을 자처하는 괴상한 소년이 한명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시몬.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오래 전 건물에서 추락할 뻔 했던 그의 목숨을 내가 구해 주었던 모양으로,
그 날 부터 한시도 나를 잊어본적이 없다는 그.
그는 매번 존경으로 빛나는 얼굴로 나를 응시하며 말한다.

"Y, 당신은 내 영웅이에요."
사춘기 소년이 히어로를 동경하는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난 어린애들이 만화나 영화의 캐릭터에 열광하듯, 그의 행동이 잠깐에 불과할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수그러들기는 커녕 점점 심해져만 가는 그의 행각들.
화재현장, 폭탄테러, 폭력단 검거 등 내가 가는 곳이 어디든지 간에 보이는 그의 모습.

하루에도 수백장씩 사진을 찍는것은 기본이요,
찢겨져 나간 옷자락을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간직하고, 흘린 핏자욱을 채취해 가는 등
이건 보자보자 하니 그야말로 스토커가 따로 없다.
".....시몬, 너 학교는 가고 있는거야?"
내 질문에 볼을 상기시키는 그.

"무,물론이죠."
"언제?"
"한가할때요. 난 머리가 좋거든요!"
..난 그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제 생활을 내팽개치고 있는 그에게도, 내게도 결코 좋지 않은 일인 것이다.
결국, 난 어느날 여느때와 다름없이 내 사진을 찍어대고 있는 그를 붙들고
단호하게 내 뜻을 밝힌다.
"시몬, 더이상 날 쫓아다니지 마."
"알겠어요."
"...정말? 알겠어?"
너무나 쉽게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미심쩍어 되묻는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뿌듯한 얼굴로 말하는 그.
"당신 일이 끝나고 난 뒤는 괜찮죠? "
"아니, 아니. 시몬. 일이 끝난 뒤는 더더욱 안돼. 난 더는 네 얼굴을 보고싶지 않다고.
알아 듣겠어? 네가 방해가된다는 말이야."

"하지만........"
그 어느때 보다 당황한 듯이 보이는 그.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에 나는 잠시 마음이 약해졌으나,
여기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결국 그를 더욱 상처입히게 될 거라는 생각에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그를 두고 매몰차게 등을 돌린다.
..그 이후로도 시몬은 여전히 나를 쫓아다닌다.
그러나 예상했던 바. 난 능숙하게 그와의 접촉을 피한다.
계속해서 사라진 나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그. 그의 풀죽은 표정을 보며,
난 마치 잘 따르던 애완동물을 버린 듯 하여 마음이 좋지 않다.
일주일, 이주일... 그리하여 그를 피해다닌지 한달째가 되던 어느날,

"당장 그 무기를 버리지 않으면 이 새끼 목을 따버릴거야!"
마약 밀매가 이루어지고 있다던 현장을 급습하던 도중,
마지막 조직원의 체포만을 남겨둔 순간. 난 멈칫 굳어버리고 만다.
남자의 손에 붙잡힌 인질은 분명 새하얗게 질린 시몬.
그가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내게 중얼거린다.
"Y...... 미안해요."
나는 이를 악 문채 결국 무기를 놓았고,
조직을 소탕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던 남자는 도망쳐 버리고 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 앉아 숨을 몰아쉬는 그.
난 그를 향해 다가가 차갑게 묻는다.

"너, 도대체 왜이러는거야?"
"......"
"난 네 아이돌이 아니야. 알겠어? 난 나쁜놈들을 해치우는데만 해도 바쁘단 말이야.
널 상대해줄 시간이 없다고."
그는 상처를 받은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
난 그를 향해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는다.
"다신 네 얼굴 보고싶지 않아. 내 눈앞에서 꺼져버려."
..그 이후로 그는 정말로 내 눈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따금 내가 그에게 내지른 말들이 가시에 박힌 듯 생각이 나기는 하였으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점점 흐르는 시간에 묻혀 잊혀지는 기억.
그리하여 그의 얼굴마저 가물가물해 졌을 무렵,


도시에는 새로운 형태의 악당이 출몰했다.
바로 컴퓨터를 해킹하고 시스템을 조작하여 도시를 엉망으로 만드는 악당,

통칭, 'C맨'.
완벽하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범죄 수법.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탓에 수사기관은 아직까지 C맨의 윤곽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교통신호, 카메라, 암호코드, 심지어는 위성까지 기계로 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조작하기 시작하는 그.
국가 안보마저 걸린 문제에, 모두가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그리고 놈이 미사일 코드를 조종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나.
난 최고의 해커들이 역추적을 통하여 알아낸 그의 아지트로 숨어든다.
그곳은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버려진 저택.

잔뜩 긴장한 채 저택 안으로 발을 디디는 나.
그런데 그곳에서 마주친 것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Y, 오랜만이에요."
"너....."
어딘가 변한 듯한 분위기였으나,
그가 시몬임을 한눈에 알아본 나. 난 당황하여 소리를 지른다.
"너 지금 여기서 뭘하는거야?"

"날 기억해요?"
눈에 띄게 기쁜 기색을 보이는 그.
난 정신없이 그의 팔을 잡고 이끈다.
"빨리 여기서 나가!"
"Y, 저기, 있잖아요. 내가 한것 좀 봐요. 여기...."
"여긴 위험하다고. 어서 피하란 말야!"
그런데 다급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발을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그러더니 곧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당신은 여전히 열심히군요. 그렇죠?"
난 도무지 말을 알아먹을 생각을 않는 그에게 호되게 야단이라도 칠 생각으로 입을 여는데,
순간, 철컥, 내 손목을 감아오는 감촉.

"......잠깐, 지금 뭐하는거야?"
"당신이 자꾸만 날 내보내려고 하니까요."
난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내 손목을 감싼 수갑을 내려다본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에게 설명하듯 천천히 내게 말하는 그.
"C맨을 찾는거라면, 여기있어요."
"....네가?"
"예전부터, 당신 관심을 한몸에 받는 놈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어.
게다가 당신은 항상 바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활짝 양 팔을 벌려 보이는 그.
"내가 제일 쎈 악당이 되면 되겠더라구요!"
"........"
"정말이지, 고생한 보람이 있었네요. 당신이 먼저 날 만나러오다니..."
난 화를 참지 못하고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그의 뺨을 후려갈긴다.
짝 소리와 함께 세차게 돌아가는 그의 얼굴.
그는 내 반응을 전혀 예상치 못한 듯, 얼이 빠진 표정이다.
" 겨우 그런 이유때문에 이 모든 짓을 벌였단거야?"
"...지금 화를 내는거에요?"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낮게 중얼거리는 그.

"Y, 난 정말 애썼어요. 그런데 왜 아직도 내게 퉁명스러운거죠?"
"당장 미사일 장치부터 꺼!"
"싫어요."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는 것을 본 나는 분노를 꾹 억누른다.
지금 당장 그의 화를 돋구어 좋을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좀 더 차분한 태도로 그를 향해 묻는다.
"좋아, 알겠어. 뭘바라는데? 내가 뭘 해주면 좋겠냐고?"
난 그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킨다.
그러나, 한참동안 입술을 짓씹던 그에게서 흘러나온것은
완벽하게 예상치 못했던 대답.

"나한테 좀더 다정하게 대해줘요."
"......"

"네? 내게 다정하게 해줘요. 날 좋아한다고 해줘요, Y."
난 황당한 심정을 감추며,
커다란 개처럼 졸라대는 그의 이마를 밀어낸다.
"....내가 다정하게 대해주면, 그럼 악당짓은 그만 둘거야?"
내 말에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미소를 짓는다.
"그건 생각해 볼게요. 당신은 거짓말 쟁이니까. 당신 하는 것 봐서."
"...좋아. 알겠어."

".........정말요?"
"그래. 네가 원하는대로 해주겠다고."
좋아 죽을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그.
난 당장 그에게 미사일 장치부터 끄라고 단호하게 명령한다.
그러자 그는 알겠어요, 알겠어요 하며 간단히 정지 코드를 적어넣는다.
벌써부터 그에게 '다정하게' 대해줄 생각에 지끈거려오는 머리.
"그래서, 네가 바라는 '다정' 이란건 도대체 어디까지가 한계선인건데?"
"그,그럼, 그럼, 지금은, 일단,"
"일단?"
내 물음에, 그가 또 한참을 벌겋게 얼굴이 달아오른채 안절부절을 못한다.
그러더니, 곧 못견디겠다는 듯이 확 내 팔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난 반항할 새도 없이 그에게 끌려간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알면서도 당해주었다는 것이 맞다.
흥분에 고조되어 박치기나 다름이 없는 그의 입맞춤은 서툴기 짝이없었다.
잠깐 얼굴을 뗀 그가, 다시 한번 입맞추기 전
황홀하다는 듯이 내게 속삭인다.
"일단, 입술까지요..."
참고영화/드라마: 보드워크 엠파이어. 007스카이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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