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알다 보면 이상한 사람도 많고 신기한 사람들도 많은데
주관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을 꼽으면
바로
정조(正祖)
입니다.

(정조 상상도)
조선을 대표하는 왕을 꼽으라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조선 전기에 세종과
조선 후기에 정조와 영조를 생각할 것입니다.
당연히 그럴 정도로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의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실제로 정조는 선왕 영조를 계승하여
탕평책을 추진하여
정치세력의 균형을 꾀하였고,

정조시대의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을 설치하고,

개혁 정치의 꽃이라 불리는
화성 건설의 꿈까지 꾸었지만
(정조는 실제로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획기적인 도시를 꿈꿨습니다.)
1800년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정조가 실시한 정책
문체반정(文體反正)
: 문체를 바른 곳으로 되돌린다.
“문체와 사상의 오염은 중국 서적에 그 원인이 있다”
는 슬로건을 내걸고 실행된 이 정책은
정조의 개혁적인 면모와는 다르게
조선 후기에 흐트러지는 성리학적 사고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함이었습니다.
정조가 문체반정을 시행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이 이전에 있던 성리학적인 질서가 잡힌 세계로
되돌아 가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리학적 세상을 구현하지 못하게 하는
새로운 문체들을 탄압하기 위해 문체반정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조가 참지 못했던 새로운 문체는
바로 소품체 였습니다.

<패관소품체 문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이옥의 시화집 '예림잡패'>
소품체란 쉽게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을 다 글로 표현하는 문체입니다.
예전에는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도와 이치가 있었고
그 도는 당연히 하나밖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물'하면 자연스럽게 '인(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소품체는 보는 사람마다 '물'에 대한 의미와 해석이 다른,
성리학적인 '물'과는 너무나 다른 '물'이 글로 쓰여지는 문체였습니다.
이렇듯 성리학적 질서가 잡힌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품체 등의
새로운 문체를 탄압해야 했다는 첫번째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 즉 탕평을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조가 즉위 이후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등용에 힘썼던 남인은
성리학적인 세계관을 지닌 세력과 대항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서학을 수용합니다.
더나아가 남인은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의 학문과 함께
서양의 종교까지 접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 모여서 천주교 교리를 토론하고, 천주교의 의식을 거행하고
나중에는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기까지 합니다.
기존의 성리학적인 질서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 할 행동이죠.
성리학을 기반으로 질서가 잡힌 조선 사회에서
정조는 이것을 바로 잡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남인만을 벌하자니 정치적 기반이 무너질 것 같아서
중국에서 굉장히 많은 서양의 책들이 들여오고,
새로운 문체를 사용하는 노론을 함께 처벌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문체를 바로잡았던 문체반정은
후대에 와서 모처럼 싹트려 하던 문학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조선 후기 문학의 저미(低迷)를 가져왔다고 평가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문체반정을 주도했던
정조가 금지하고자 하는 글들은
정조의 글에서 가장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자신과 반대되는 견해를 가졌던 노론의 수장에게 보내는 편지글입니다.

한글로 해석해 보자면
1797년 4월 11일
요사이 벽패가 탈락한다는 소문이 자못 성행한다고 하는데,
내허(內虛)외(外)실(實)에 견주어 본다면 그 이해와 득실이 어떠한가?
이렇게 한 뒤에야 우리 당의 열성 당원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인데,
지금처럼 벽패의 무리들이 뒤쥭박쥭이 되었을 때에는 종종 이처럼 근거 없는 소문이 있다 해도 괜찮을 듯하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만 줄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뒤쥭박쥭'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문자에 도와 이치가 들어있지 않은 한글로 쓰여진 단어이며,
대체로 일반적인 상민들이 쓰는 흔히 말해 '속된' 말이었습니다.
다음의 글을 더 보도록 하죠.
1797년 6월 5일
대관에게 따져 묻게 하는 일로 말하자면, 풍문은 풍문이요 사면(事面)은 또 사면이니,
사면에 관계된 곳을 조사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재상이 대관에 버금간다고는 하나,
지금의 꼴은 모두 거간꾼이나 다름없다. 설령 전하는 말이 지나치더라도
이 무리들이 항상 말하는 것이 바로 이 두 글자이니, 하고 말고는 따질 것이 없다.
조사하여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은 서용보가 힘써 하고 있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 중 남공철의 얼굴을 봐서라도 공적인 중에서도 사사로운 정을 특별히 유념하여
어제 이익운으로 하여금 좌의정을 일으켜 즉시 차자를 올리게 하였다.
나의 지시로 좌의정이 욕을 한 사발이나 먹게(중국에는 없는 표현) 만들었구나, 쯧쯧, 무슨 말을 하랴
1799년 11월 23일
필시 말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날뛰는 모습이 처음에는 놀랍고 우습더니 중간에는 가만히 탄식하였으며,
이어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노려보게 되었다 이른바 김매순처럼 입에서 젖비린내나고 사람 모습도 갖추지 못한 자와,
김이영처럼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서간과 발문으로 감히 선배들의 의론을 비방하려 하니,
참으로 망령된 일이다.
김인순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백성과 서직수처럼 무지하고 천한 무리들은 또 그들을 본받아 소란을 일으키니
만고천하에 어찌 이런 때가 있었단 말인가?
이렇듯 상민들이 쓰는 구어를 자주 사용하며 쯧쯧 등의 의성어도 사용하고,
우리말식의 말들을 한글을 빌려 쓰기도 하였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문체반정을 주도했던 정조의 글에서 말이죠.
개인의 감정을 풍부한 문체로 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정조가 문체반정에서 금하려 했던 것이자
바로 자신의 글이었던 것입니다.
'보지 않은 책이 없다' 라고 스스로 자부할 정도로 학식이 넓었고,
'뒤죽박죽', '호래자식'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하는 다혈질의 왕
정조.
정조는 개인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세상이 올 것을 예상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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