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이미 완결난 작품의 주관적인 추측과 해석을 담고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에 새로운 견해가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다시 말하지만 이 글은 원작자 다카하시 루미코의 실제 의도와는 무관합니다.
또한 이 작품에 대한 인물분석은 모두 상대적인 평가입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작품을 접하고 싶은 분들은 이 점을 숙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누야샤>의 주인공, 사혼의 구슬
전편에서 말한 적이 있지만 이누야샤는 이 만화의 주요인물 세 명 중에서 가장 평범한 인간군상을 나타낸다. 그것은 이누야샤의 작은 그릇과 비좁은 아량을 뜻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사와 악마 사이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범인(凡人)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려는 것이다.
이누야샤는 ‘인간도 요괴도 아닌 반요’라는 정체성을 가진 캐릭터다. 작가는 작중 내내 인간의 마음은 선한 것이고 요괴의 성질은 악한 것이라는 의식을 흘리는데 그것은 독자에게 요괴와 인간에 대한 고정된 선입견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누야샤가 가진 정체성을 통해 사혼의 구슬을 ‘인격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 이누야샤는 만화 <이누야샤>를 인간의 형상으로 밀집시켜 놓은 최대의 노림수인 것이다. 선도 악도 아닌 사혼의 구슬, 인간도 요괴도 아닌 반요. 이것이 앞에서 말한 선과 악의 대결구도 한 가운데 위치한 무(無)다.
사혼의 구슬이 그러하듯, 인간이란 존재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무(無)의 영역이다. 세계관은 인간을 대변한다. 어떤 사람에게 소유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사혼의 구슬과 어떤 마음을 먹고 어떤 인생을 다짐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모습을 이누야샤는 자신의 정체성 안에 모두 집약한 것이다. 이것이 이누야샤가 <이누야샤>의 주인공일 수 있는 유일한 이유임과 동시에 그 자신의 존재 결정권이 되는 것이다.
미도리코를 투영하는 존재, 키쿄우
키쿄우는 ‘사혼의 구슬’을 만들어낸 미도리코를 투영하는 존재다. 극 중에서 미도리코가 등장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키쿄우를 통해 작중 내내 미도리코의 환영과 마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누야샤>에서 나타내는 미도리코의 정신은 키쿄우가 지향하는 절대적 선과는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악에 물든 혼을 씻겨주고 타인을 구제하는 ‘정화’의 개념 앞에서 미도리코는 냉정하고 잔인할 정도의 엄격함을 드러낸다.
미도리코가 위치한 선은 키쿄우가 나타내는 선과 차별을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키쿄우가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성장시켜 나가며 구현한 절대적 선과는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키쿄우는 단순히 미도리코의 선(善)의 의지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주의의 한 방법으로서 자신만의 선(善)을 완성한 것이다. 그것이 ‘정화’이다.
키쿄우와 이누야샤; 정화와 사혼의 구슬.
이 작품에서 ‘정화’라는 개념은 중요한 축을 지탱하고 있다. 이 개념은 <이누야샤>의 세계관을 가장 넓고 가장 크게 관통한다. 이누야샤의 세계관을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그것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 메타포는 ‘사혼의 구슬’에 밀집되어 작중 내내 등장인물들을 괴롭힌다.
<이누야샤> 세계관에서는 세 부류의 인간군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선, 악(惡), 그리고 선도 악도 아니면서 한편으로는 선이기도 하고 악이기도 한 무(無)다. 이 선과 악은 무(無)를 사이에 두고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대결구도를 형성하는데 그 중 선을 은유하는 것이 바로 ‘완전한 키쿄우’였다.
이쯤 되면 우리는 키쿄우가 사혼의 구슬을 정화하는 무녀였다는 사실을 잘 곱씹어봐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혼의 구슬은 앞서 말했듯이 <이누야샤>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것이고 그 세계관 안에서 선을 담당하는 키쿄우는 당연하다는 듯이 ‘정화’라는 메타포를 머금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혼의 구슬을 은유하는 이누야샤는 필연에 의해 키쿄우와 연인관계를 맺게 된다.
미도리코를 계승하는 존재, 이누야샤.
사혼의 구슬과 같은 특성을 가진 이누야샤는 과연 무엇이 될까, 이것이 이 만화가 던지는 가장 큰 주제이자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 초반, 키쿄우에게 배신당했다고 믿었을 때 이누야샤는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버리고 요괴가 되기를 마음먹는다. 키쿄우가 나라쿠에 의해 선의 위치를 잃고 타락했듯이 이누야샤도 마찬가지로 자신을 정화시켜주는 존재를 잃고 사악한 기운에 물든 것이다. 그러나 소멸한 ‘완전한 키쿄우’의 자리를 카고메가 대신하게 되면서 이누야샤는 다시 그 무엇도 아닌 반요만의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이렇게 선에 기대는 이누야샤의 성질은 사혼의 구슬 안에 있는 ‘미도리코’의 의식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강렬한 선의 의지를 피력하는 미도리코의 의식은 이누야샤가 의도한 것이건 의도하지 않은 것이건 자신이 불태우는 열정과 같다.
사혼의 구슬 안에 깃든 선의 의지, 키쿄우를 운명적으로 연모하는 이누야샤. 키쿄우와 이누야샤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운명을 같이하는 존재인 것이다. 작가는 그 관계를 사랑으로 묶어두었고 이누야샤는 그 유대 안에서 키쿄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라쿠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이것이 이누야샤가 무(無)의 영역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운명적으로 선(善)에 이끌리는 이유이다.
이누야샤는 키쿄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정의를 확립해나간다. 그것이 미도리코의 의지 그 자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사혼의 구슬’을 대표하는 인격으로서 사혼의 구슬 안에 존재하는 선을 추종하는 모습으로 우리는 그 변화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본체 키쿄우, 카게무샤 이누야샤
우리가 <이누야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점은 수동적인 성격을 가진 주인공의 자리다. 소유하는 존재에 따라 변한다는 사혼의 구슬의 특징이 <이누야샤>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된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역할 또한 피지배적인 성격을 계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이 만화의 주인공의 자리는 사실, 어떤 활동성을 기대할 수 없는 상징의 그것이다.
이 메타포 때문에 히어로의 권위는 ‘정화’를 매개하는 능동적 성격의 키쿄우에게 넘어간다. 극의 스토리를 끌고나가는 것은 결국, 주인공이 아닌 히로인 키쿄우였던 것이다.
이 만화에서 진히어로는 자신의 앞에 꼭두각시인 주인공을 세워두고 뒤에서 묵묵히 히어로의 역할을 수행해낸다. 그것은 작품 속에서 흘러가는 주인공의 역할과도 비슷하다. 이누야샤는 철쇄아와 함께 나라쿠만을 질리도록 쫓아다니지만 사실, 나라쿠의 치명적인 결함을 밝혀낸 것도, 그것을 이용해서 나라쿠의 존재자체를 위협한 경험 또한 전무하다.
이누야샤는 작품의 히어로적 특성을 가진 히로인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카게무샤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가여운 히로인을 숨겨서 확실히 감춰야하는 것이야말로 카게무샤인 이누야샤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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