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환, 전명운 의거


(당시 사건을 재현한 현지 언론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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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럼 스티븐스
주일 미공사관에서 근무 후 일제와 친분을 쌓다가 1차 한일 협약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외교고문으로 들어옴.
이후 일본의 입맛에 맞춰 2차 영일동맹, 포츠머스 조약 등에서 한일 합병을 위한 물밑작업을 펼침.
을사조약 이후에도 자국언론을 상대로 한일합병의 당위성을 강조하며 끊임없이 친일발언을 쏟아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 등 이어진 일제의 탄압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임.
사건 개요
1908년 3월 20일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기자회견을 열고 조선인 대부분이 조선정부의 학정때문에
일본을 환영하고 한일합병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를 지껄임.
이틀후인 22일 저녁 한인대표단 4인이 스티븐스의 숙소를 찾아가 그 주장을 취소하고 바른 사실을 언론에 말할것을 종용
스티븐스가 거절하자 나무의자등을 던지며 항의하다가 호텔 직원들에 의해 쫓겨남.
다음날인 23일 오전 9시 30분경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부두를 찾은 스티븐스를
기다리고 있던 전명운이 준비한 권총으로 저격했으나 오발로 의거에 성공하지 못함. 그러자 전명운은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스티븐스의 머리를 가격하던중 이를 발견한 장인환이 스티븐스를 쏴 사살에 성공함. 이과정에서 전명운 역시 총상을 입음.
영화처럼 신기했던 점은 전명운과 장인환은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의거도 사전에 둘이 모의한것이 아님에도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방법의 의거를 계획.
결과
스티븐스는 총상으로 수술중 사망. 전명운과 장인환은 살인죄로 기소됨. 하지만 당시 현지 언론들이 각각 몇면에 달하는 특집기사
등을 통해 전명운과 장인환에 호의적인 기사를 썼고 한인들이 당시 웬만한 집값의 두배가 넘는 8천불을 모금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잘나가는 변호사인 네이던 코플란을 변호사로 선임. 이후 일제의 로비에도 불구하고 전명운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장인환은 2급 살인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0년 복역후 모범수로 가석방됨.

장인환 의사 출소후 만난 전명운,장인환 의사
슬프지만 두 의사의 말년은 썩 좋지 못했는데 전명운 의사는 미국 귀화후 LA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47년 심장병으로 생애를
마쳤고 장인환 의사는 출소 이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30년에 투신자살함.
의의
당시 소극적으로 움추리고 있었던 독립운동이 두 의사의 의거가 알려지면서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특히 미주지역에서
대조선 국민군단, 흥사단 등 교민들이 구성한 단체들이 독립운동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발판을 제공함.
두 의사는 1962년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 대통령상이 추서됨.
+)추가로 논란이 될수도 있겠지만 사실관계만 말하면 당시 이승만은 재판과정에서의 통역을 맡아달라는 교민들의 요구를
자신은 기독교신자라 살인자들을 도울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함
내가 그를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뭐요? 수십만명이 그의 계획 때문에 죽어갔소. 나는 내 조국을 위해 그를 쏜 것이요.
나는 투옥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순국하고 싶소. 나는 조국에 대한 나의 의무를 다했고 법이 나를 어찌할지는 관심이 없소.
- 장인환 의사
일부 내용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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