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올해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10편입니다.

1. 질투 (La jalousie, 2013)
올해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걸작은 필립 가렐의 <질투>다. 이 작품은 간단하고 단순해보이지만 볼수록 깊은 심연으로 빠져드는 영화다. 원제 'La jalousie'는 사랑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감정 중 하나인 '질투'와 미늘덧문을 동시에 뜻하는 단어로, 사랑의 확신에 찬 주인공 루이는 미늘덧문을 통한 시선처럼 연인을 가려진 시야로 본 것이라 말해주고 있다. 필립 가렐 감독은 이 작품에서 '감정'을 최우선시하고 시간을 무시하다시피 하는 실험적인 방식을 택한다. 거의 없다시피 한 시간의 틈 사이를 페이드로 연결한다거나, 설정 쇼트 없이 시간을 훅훅 뛰어넘는 식으로 말이다. 감정을 중요시하는 형식은 흑백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인물의 클로즈업을 통해 얼굴의 감정과 그 여백의 공기를 담는 작업을 통해 더욱 심화된다. 이런 감정은 이야기의 근원과 연결되어 더욱 흥미로워진다. 항상 사적인 이야기와 영화 사이 간격을 없애온 가렐은 <질투>에서 이야기의 매우 사적인 근원을 고백하며 시작하고 극이 진행되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임을 인지시켜 거리를 두는 데도 성공한다. 혹시 이 걸작을 놓쳤다면 꼭 추천하고 싶다. 러닝타임도 1시간 10분 정도라 전혀 부담되지 않는 작품이다.

2. 이민자 (The Immigrant, 2013)
두번째 작품은 올해 가장 가슴아픈 영화, 제임스 그레이의 <이민자>다. 제임스 그레이는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가족, 혈통이 때로는 어떻게 구성원을 억압하는지, 혈연의 작용에 대해 근심하고, 이를 자신만의 무드로 그려내며 다른 감독에게서 보기 힘든 감정의 밀집을 담아낸다. 그는 유달리 자신의 혈연을 근심하는 젊은 감독인데, <이민자>는 자신의 기원을 아예 거슬러 올라가 미국으로 이민온 자들을 직접 다루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전작들과 다르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지배하는 또 다른 키워드는 '역설'인데, 여기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가족을 구원하려는 자를 속박하는 혈연의 역설, 구원을 향한 인물들의 비극의 역설, 그리고 영화 아닌 것들을 영화적 언어로 표현하는 언어의 역설이 그에 해당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미묘한 컷들로 감정을 쌓아가는 것이다. <이민자>에서 그레이는 편집 방식을 에바의 심리와 일치시켜 이 작업을 해낸다. 그녀의 첫 매춘만 유일하게 페이드로 시작해 페이드로 끝나는 데, 그녀에겐 정말 납득할 수 없었던 악몽같이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 가장 과소평가되는 미국 영화 감독 중 한명인 제임스 그레이가 이번 기회를 통해 국내에 많이 알려진 것 같아 팬으로써 기쁘다.

3. 폭스캐처 (Foxcatcher, 2014)
올해 개봉한 영화를 언급하며 <폭스캐처>를 빼먹을 수 있겠나. <폭스캐처>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캐릭터 중심의 차갑고 서늘한 비극이다. 영화의 중심인 세 주체간의 관계를 묘사하며 오이디푸스적 심리와 동성애적인 기류의 암시가 분명히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사건이 일어난 이유라고 딱 잡아 말하진 않는다. 처음 극이 진행될 때 부터 형의 그늘 아래 있는 마크, 기차 모형를 팔 때도 어머니의 허락이 필요한 듀퐁 등 결핍된 자아가 그보다 완전한 데이브를 보며 질투한 것일수도 있고, 아버지의 부재에서 남의 아버지이자 주인이 되고자 한 (어머니와 말의 관계와 상응) 욕구가 실패해서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이렇게 왜 듀폰이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지만, 베넷 밀러 감독이 마크의 떠남과 사건의 간격을 일부러 없다시피 하도록 줄인 것은 결국 영화가 이 사건의 이유를 알아내려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밀러 감독은 애초에 이들은 함께 공존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거의 모든 쇼트에서 같이 등장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이 한 화면에 나오니 포커스를 흐리는 쇼트가 있을 정도다. 결국 그가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자아와 미국이다. 예전 듀폰 가문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상에서 그들은 스포츠로 여우를 풀어준 뒤 사냥하며, 조지 워싱턴의 승전터에 세워진 집이라 한다. 이는 영화 속 중요한 그림인 '델라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과 연결되고, 백악관을 연상시키는 듀폰가의 자택은 무덤 위 세워진 제국인 것이다. 그의 조상들의 상류 사냥 스포츠 처럼 존 듀폰은 말 위에 있고 두 레슬러는 여우이며, 그들의 농장은 미국이다. 그림과 구도의 섬세한 배치로 미국 사회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계급 차이와 결핍된 자아를 지배하는 미국의 애국주의/성과주의를 통해 미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그려낸 베넷 밀러의 최고 걸작이다.

4.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Mad Max: Fury Road, 2015)
네번째 영화는 올해 단연코 가장 압도적인 블록버스터라 할 수 있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이다. 아니, 올해 가장 뛰어난 서부극이다. 기존 서부극 서사의 틀을 빌려 존 포드의 <역마차>에 아드레날린 주사를 놓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엔 몸과 몸, 차와 차가 직접 부딛혀 만들어낸 무성영화적 리듬과 쾌감이 넘쳐난다. 액션 시퀀스와 고요한 사막의 풍경은 번갈아 등장해 완벽한 완급 조절로 자신만의 운율을 형성한 시가 된다. 이 뿐만 아니라, 혹스의 세계에 만연한 공동체의 연대를 계승하는 데 멈추지 않고 현 시대에 맞는 가치관을 곁들여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해낸다. 이 결과물은 정말 보기 힘든 완결적인 이미지와 운동의 결합으로서 조지 밀러가 '영화'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그는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의 세계를 경유해 '구원과 자유'를 외치는 자신만의 비전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5.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 2015)
다음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다. 이 영화는 시대에 억압되는 신념,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한 윤리를 다루는 작품이다. 스필버그 감독은 지난 몇 년간 고전 감독들을 바라보며 역사를 소환해 현재 시점에 적용시키는 영화들을 만들었고 이 작품도 이런 움직임의 연장선이다. <링컨>이 존 포드의 반대 지점에서 오바마에 대한 지지 선언이라면, <스파이 브릿지>는 혼란과 파시즘적 정서를 지닌 현재 미국을(더 나아가 세계) 성찰하며 이 시대가 요구하는 윤리를 하워드 혹스에 빙의해 끄집어내는 걸작이다. 표면적인 거울로 인물을 바라볼 뿐만 아니라, 쇼트를 영화의 구조 속에서 거울처럼 배치해 다른 이념을 올바르지 못한 방식으로 대립하는 미국과 소련을 대비시키고, 자신을 정의하는 신념을 오뚝이처럼 지키는 두 남자를 연결시킨다. 또한 빛과 어둠으로 인물의 심리를 대변하는 동시에 그들을 경계에 놓는 역할을 해 존 포드 세계의 인물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는 쇼트와 쇼트, 장면과 장면의 유기적인 연결이 빛난다. 매카시즘의 구름이 미국을 덮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을 간단한 쇼트의 이어붙임으로 보여줘 단순하고 고전적인 방법으로 영화를 주무르는 스필버그의 솜씨는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스필버그는 이제 가장 간단한 정의의 '좋은 영화'를 만들고 있다. 말 그대로 쓸데없는 장면 없이 단순하고 유기적인 방법으로 쇼트들을 연결해 관객을 사로잡는 영화들 말이다. 그가 90년대 쥬라기 공원,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들 때 보다 지금 더 발전한 거장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극장에서 빨리 내린 것이 너무 아쉽다.

6. 택시 (Taxi, 2015)
5년 전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이란 정부에 비판적인 영화를 만드려 했다는 혐의로 20년간 영화 연출과 각본 집필을 금지당했다. '예술 사형선고'를 받은 그는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고 집에서 그는 카메라를 들었다. 여기서 그는 머리를 띵하게 만드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를 말할 수 있다면, 영화를 왜 만드는가?" 그는 '영화 아닌 영화'로 자신의 물음에 답한다. 그의 카메라는 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찍는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진행되지만, 정작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픽션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란 사회의 광경이다.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라는 제목은 눈 앞에 보이는 허구같은 이미지들이 현실이자 실재라는 가슴아픈 자각에서 오는 것이다. <택시>는 그의 근작들처럼 이란 사회와 그 구성원에 대해 성찰할 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예술 매체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이 깃들여진 작품이다. 그의 영화세계에 항상 등장한 현실과 허구,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의 탐구에 대한 색채는 더욱 짙어져 간다. <택시>의 놀라운 점은 카메라가 단 한번도 택시 안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선의 근원은 항상 내부이다. 이런 카메라의 시선이 창문 너머 외부를 향한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로셀리니가 외부인을 데리고 차 안에서 이탈리아의 거리와 맞닿이게 했을 때 벌어진 놀라운 영화적 순간들을 계승해 세상과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온 자신의 스승처럼 적용하는 동시에 더 나아간다 (택시에서 바깥을 향한 스틸 카메라가 놓인 장면들은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는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계속해 흐리는데, 관객에게 이것이 허구라고 자각하게 하는 부분이 딱 하나 있다. 바로 인위적인 배경음악이다. 이 음악이 흐르는 순간은 세 번인데, 이때 모두 카메라는 택시 운전사나 택시 탑승객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창문 너머 밖,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파르 파나히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배경음악을 통해 이것은 영화고, 우리의 시선은 밖을 향해야 한다고.

7. 인사이드 아웃 (Inside Out, 2015)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는 의식과 무의식으로부터 나온다'고 했고, 영화는 '뇌의 스크린'에서 상영된다고 했다. <인사이드 아웃>은 이 비유를 직접적으로 밀고 나가는 픽사의 새로운 걸작이다. 여기엔 보는 이의 공감을 진실되게 유도하며 이 중심엔 영화는 결국 감정의 것이고, 상상력이 인간을 살릴 것이라는 픽사의 굳건한 믿음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영화라는 매체와 본격적으로 연결시키면 더욱 와닿는다. 우린 스크린을 영화를 '보고', 라일리는 세상을 '보며', 감정들은 라일리의 기억을 '본다'. 우리가 라일리의 보편적인 이야기를 '보는' 행위는 감정들이 그녀의 기억을 '보는' 것과 같고, 이를 확장시키면 우리 삶의 보편적인 일상과 기억이 결국 영화라는 것이다. 픽사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정말 각별한 곳이다.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영화도 <토이 스토리>였고, 부모님과 함께 울게 만든 것도 <업>이었다. 난 <인사이드 아웃>을 보며 정말 여러번 울었다. 처음엔 기쁨과 동화되고, 후에 이르러 슬픔도 감싸앉게되며 결국 모든 감정이 조화를 이루게 되어 라일리 자신이 이뤄낸 성장과 구원은 이 작품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할 것이다.

8. 이다 (Ida, 2013)
<이다>는 정말 아름다운 영화다. 많은 영화들이 굳이 영화라는 매체가 아니어도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다>는 시각 매체의 본질을 꿰뚫는 작품으로서, 영화이기에 가능한 작품이다. 이야기와 형식의 환상적인 조합인 이 작품은 4:3 비율의 프레임을 영리하게 구성했다. 극 내내 인물은 아래나 구석, 혹은 프레임에 걸친 상태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는 그들의 심리적 상태를 대변하기도 하며 동시에 종교의 압박과 역사의 무게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걷거나 움직일 때 피사체의 동선을 따라가지 않고 카메라를 고정시켜 프레임에거 벗어나도록 내두기도 한다. 그러나 믿음과 자아에 대한 확신을 얻은 후 마지막 장면이 되서야 카메라는 일반적인 프레임에 그녀를 담고 걷는 모습을 따라가며 담는다. 이 외에도 섬세한 소품/의상의 배치, 흑백의 대비와 시적인 이미지로 극을 탁월하게 진행시키는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이다'의 이야기는 자아와 믿음을 향한 한 여성의 여정이자 감독과 폴란드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여정으로서 영화이기에 가능한 영화다.

9. 내일을 위한 시간 (Deux jours, une nuit, 2014)
다르덴 형제는 소외된 인물들을 진실된 연민으로 카메라에 담는 동시 우리에게 윤리적 질문을 던지는 감독으로서, 연대와 윤리가 그 어느때보다도 중요시되어야 할 이 시대에 참으로 중요한 감독이라 생각한다. <내일을 위한 시간>은 피사체의 존엄성을 지키며 연대의 가능성을 묻고 설득하는 작품이다. 사실 이런 내용의 작품은 소설로도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는 여기서 '영화'라는 매체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산드라와 동료' 사이 설득을 '영화와 관객'으로 전이시킨다. 그녀에게 설득당하지 않는 사람들은 1:1 구도의 프레임 사이 문, 벽 등으로 뚜렷한 경계를 긋지만 그녀의 편에 서는 이들은 이런 시각적 경계가 없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르덴은 더 나아가, 반복에 조금씩 차이를 둬 '연대'를 영화적으로 표현해내는 아름다운 모습을 선사하기에 이른다. 이런 변주가 뚜렷한 대표적인 장면은 후반부에 세탁소에서 동료를 설득하려는 모습이다. 처음에 망설이는 동료와 그녀 사이 배경의 수직 벡터가 작용하는데, 그가 그녀를 이해한다 하는 순간 뒤의 선반만 등장함으로서 뜻을 같이한 연대처럼 느껴지는 수평 벡터가 등장한다. 이것만으로도 참 대단한데, 다르덴 형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외화면을 활용해 마법같은 순간들을 창조해내고, 경제적-효율적으로 쇼트를 구성해 관객을 영화에 사로잡히게 하는 능력까지 (겸손하게) 선보이니 뭘 더욱 바라겠는가. 투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더욱 강인한 인간이 된 산드라의 마지막 뒷모습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10. 나의 어머니 (Mia Madre, 2015)
마지막은 난니 모레티 감독의 <나의 어머니>다. 여기서 모레티는 감정으로 관객을 선동시키지 않는다. 어머니의 죽음을 앞둔 자식의 모습을 그리는데 다른 많은 영화들은 그렇게 했을 테지만, 모레티는 불가피한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슬픔과 불안이 서서히 스며드는지를 보여준다. 주인공 마르게리타는 정치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오프닝 부터 등장하는데, 그녀는 사적인 문제로 시달리고 있다는 점은 영화에서 모레티의 노동자에 대한 견해를 엿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빔 벤더스로 시작해 펠리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화적 차용을 시도한다. 마지막으로 마르게리타가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어머니의 수많은 책들, 그녀가 죽은 후엔 어디로 가는 걸까? 모레티는 이 질문를 죽은 언어인 라틴어와 연결짓는다. 역으로 사라짐으로서 영원해지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삶의 본의미가 아닐까.
개봉하지 못한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았던 3편입니다.
(올해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들만 뽑았습니다. <언어와의 작별>, <도원경> 등은 올해 관람했지만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들이라 제외했습니다)

1. 릴 퀸퀸 (P'tit Quinquin, 2014
개인적으로 올해의 영화를 뽑는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브루노 뒤몽의 <릴 퀸퀸>이다. 그의 초기작 <휴머니티>와 비슷하게 다가오는 <릴 퀸퀸>은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종합하는 동시에 새로운 도약을 이뤄낸 걸작이다. 프랑스 한 시골 마을에 살인 실종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정작 이에서 관심이 멀어진 어른들을 제치고, 영화는 아이들의 눈으로 잔혹한 현실을 바라본다. 이 마을 속엔 프랑스와 세계의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뒤몽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는 것은 이런 잔혹성, 폭력성 속에 내포되있는 아이러니를 유머로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릴 퀸퀸>은 수사극으로 시작하다 풍자극으로 변해간다. 수사극은 원인을 찾아 규명하는 장르다. 여기서 이 장르는 역으로 얼마나 어불성설한 일들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역설적인 변주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르의 주체인 두 형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 작품에서 두 형사의 이름은 화가로부터 따온 것이다. 로저 형사는 로히르 반 데 웨이던에서 따온 이름인데, 그의 그림들은 영적인 동시에 그로테스크하며 허구인 것을 풍경을 활용해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화가다. 이 문장을 쓰면서 이 영화를 묘사하는 듯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안티리얼리즘이라 볼 수도 있겠다.

2. 자객 섭은낭 (刺客聶隱娘, 2015)
후 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은 간단한 이야기를 움직임, 잔상, 흔적으로 돌려말하는 새로운 걸작이다. 우리의 주인공 섭은낭은 자객에게 있어선 안될 인간의 정을 끊기 위해 스승으로부터 사촌을 죽이라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사실 이때부터 우린 알 수 있다. 후 샤오시엔은 인간됨을 대의 앞에 두는 사람으로서 이 임무는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이런 기대에 맞게 섭은낭의 주춤함, 예견된 실패를 영화적으로 그려낸다. 자세히 보면 그녀가 임무에 성공하는 장면은 수평→수직의 구도라면, 그녀가 실패하는 장면들은 수직→수평의 구도이기 때문이다. 후 샤오시엔은 인간됨을 택한 그녀의 결정을 영화 속에서 긍정한다. 결국 짝을 찾게 되는 섭은낭은 영화 내내 유지하던 무표정의 포커페이스를 처음으로 버리고 미소를 띄운다. 영화를 다 보고난 후,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쇼트에서 떠오른 일화가 있다. 영화가 발명되고 조르주 멜리에스는 뤼미에르 형제의 <아기의 저녁식사>를 보며 뒤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매혹되어 감독이 되고 싶다 했다. 후 샤오시엔은 그 시점으로 돌아가 같은 사유를 하는 것 같다.

3. 인히어런트 바이스 (Inherent Vice, 2014)
폴 토마스 앤더슨은 아마도 젊은 미국 작가들 중 가장 '미국'에 대한 영화를 찍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신작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70년대 대항문화가 주류문화에 흡수되기 전, 히피 운동이 끝나가는 시대를 '닥'의 시점으로 본 작품이다. 점차 기존의 서사를 탈피하고 인상주의적인 영화를 만드는 그의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진 건 <마스터>부터 인데,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더 나아가 복잡하기 없는 플롯을 아예 존재하지 않을 듯한 내레이터로 전한다 (주인공과 내레이터가 대화하는 장면에서 닥의 시점으로 역쇼트가 등장할 때 아무도 없는 걸로 보아, 그녀는 허구일 확률이 높다). 또한 영화를 보면 이 작품은 처음으로 극의 중심인 인물에게 '아버지'의 그림자가 없다. 다만, 그는 사건을 조사하다 알게된 한 아버지를 집으로 귀환하게 한다. 히피가 자신의 임무가 아닌 일들을 맡는 이유는 뭘까? 단순한 '정'일까, 아니면 대항문화의 끝자락에 놓인 이의 '죄의식'일까. 히피들을 보며 감독은 잃어버린 것들, 지나간 것들에 대한 특유의 연민을 비춘다. 그러면서 말한다; '닥'에게도 희망은 있다고, 마지막 쇼트에서 등대의 빛은 닥의 눈을 향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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