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녹슨 문 앞에 앉아
고드름을 부러뜨리는 부랑아
너는 너에게도 어울리지 않아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치환하지
우리가 살찌고 행복해서 질려버릴 때
잊을 수 있겠지만 잊지 않겠다는 주를
미신처럼 읊조릴 거야
내가 없었던 세상을 가장 근처에서 만지는 일
네가 없는 꿈을 꾼 적이 없다
- 연인 中 / 이이체

별 기억이 아닌데도 한 사람의 기억으로 웃음이 날 때가 있다.
돌아보면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닌데도 배를 잡고 웃게 되는 적이.
하지만 우리를 붙드는 건 그 웃음의 근원과 크기가 아니라, 그 자세한 기억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차곡차곡 남아 주변을 깊이 채우고 있는 그 평화롭고 화사한 기운이다.
인연의 성분은 그토록 구체적이지도 현명하지도 않는 것으로 묶여있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좋아지면 왜 그러는지도 모르면서
저녁이 되면 어렵고, 밤이 되면 저리고,
그렇게 한 겨울을, 한 사람을 앓는 것이다.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中 / 이병률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 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 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어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 멜랑콜리아 / 진은영

존재의 기본 원칙은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임을 깨닫는다.
사랑은 불가항적인 것이지만, 때로 명확하지도 않고, 분명치도 않고, 즉각적이지도 않다.
- 파이이야기 中 / 얀 마텔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예고없이
그대와
마주치고 싶다
그대가
처음
내 안에 들어왔을 때의
그 예고 없음처럼
- 헛된 바람 / 구영주

만나지 않는다고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곁에 있다고 거리가 없는 것은 아닐진데
같은 집이거나 같은 장소가 아니라
같은 도시,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거라고
이 세상 어딘가에 당신은 살아가고
나는 그 어딘가의 당신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 뒤나 일 년 뒤가 아니라
십 년이나 이십 년 뒤면 어떻습니까.
언젠가는 만날 당신, 그 당신을 사랑하는데요.
- 안녕 다정한 사람 中 / 은희경

찾아나서지 않기로 했다
가기로하면 가지 못할 일도 아니나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다
그리움만 안고 지내기로 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그대가 많이 변했다니
세월따라 변하는 건 탓할 건 못되지만
예전의 그대가 아닌 그 낭패를
감당할 자신이 없기에
멀리서 멀리서만
그데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 멀리서만 / 이정하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길이 있었다
다시 길이 끝나는 곳에 산이 있었다
산이 끝나는 곳에 네가 있었다
무릎과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고있었다
미안하다
너를 사랑해서 미안하다
- 미안하다 / 정호승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서로 만나 사귀고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 너와 나 / 김춘수

오늘은 아무 생각 없고
당신만 그냥 많이 보고 싶습니다
- 푸른 하늘 / 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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