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4년 동학농민운동

같은 해 청일전쟁

1905년 러일전쟁

대일항쟁기 34년 11개월 18일 (1910~1945)

해방 후 좌우대립
(여수, 순천 반란사건, 4.3 사건, 38선에서의 교전 등 약 10만 명이 희생됐다고 추정)

한국전쟁 (1950~1953)

1.21 사태 (1968)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1996)

그리고 연평도 포격전 (2010)

"내가 태어난 1970년대 남한은 레바논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전쟁(비록 휴전이긴 해도)중인 나라였다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사는 이 세계란 지금까지 몇 백 년 동안 평화롭게 유지됐으며, 앞으로 몇백 년 동안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식의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경제는 위기였고 안보는 흔들렸다. 그게 바로 '다이내믹 코리아'의 본질이다. 언제라도 뒤집힐 듯한
이 다이내믹의 원천은 바로 정지된 상태의 전쟁이었다. 19세기 이래 한반도는 늘 이런 상태였으니까 이 원천은
우리의 무의식을 잡고 쉽게 놔주지 않는다.
그러니 한국인들의 심연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자리잡고 있으리라.
'네가 누구든 얼마나 되롭든'을 쓰느라 자료를 조사할 때,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한국인의 식기와 수저가
쇠로 돼 있는 건 늘 피난다니는 사람들이니 쉽게 부서지는 나무나 사기를 쓸 수 없기 때문이며,
여자들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는 건 언제라도 도망칠 수 있는 자세가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돈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글을 읽으며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 생각하던 그날도
군복을 입은 노인들이 도로를 점거하고는 나라가 망하게 됐다며 시위하는 장면이 뉴스에 나왔다.
한국인들이 말하는 정치는 이 공포에 기반한다. 한국의 정치가 타협할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공포를 대면하면 그저 죽이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지, 타협이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이 공포를 결코 이길 수 없다. 왜냐하면 공포는 우리를 노예로 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우리는 공포의 노예일 뿐이다. 예를 들어 다른 집 애들에게 자기 아이가 영영 뒤쳐질 것이라는
공포가 없다면 어떤 부모가 세 살배기를 영어학원에 보내겠는가?"
-김연수, 소설가의 일 [문학동네, 2014] 207~208p-

입시 전쟁의 치열함 아니 광기를 '내일신문 2003년 7월 21일자 [내일만평]'은 섬뜩하게 묘사했다.
어느 엄마가 극심한 생활고를 비관해 두 어린 자녀를 먼저 아파트 14층 난간 위에서 던져 숨지게 하고
한 명은 품에 안고 뛰어내린 사건을 다룬 만평이다. 이 만평에 따르면, '정말 무서운 건' 같은 아파트에 사는
집의 엄마가 어린 자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저런 거 첨봐? 영어학원 늦겠다 어서 가"
터무니없는 과장인가? 아니다. 다소의 과장은 있을망정 기본적으론 타당한 지적이다.
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이다. 지금 우리는 6.25를 맞아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다. 다른 집 사람들이 폭격을 맞아
쓰러지건 물에 빠져 죽건 신경 쓸 겨를이 있을 리 만무하다. 나와 내 가족부터 건너고 볼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라 전체로 볼 때에 우리의 '전시체제 체질'은 이제 더 이상 강점이 아닌 것 같다.
'니가 죽건 말건 나부터 살기'식의 경쟁이 과거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엔 기여했을망정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강준만(전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인 코드 [인물과 사상사, 2006] 15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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