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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6/3/15) 게시물이에요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

거리에서 배운 바둑으로 세계를 제패한 서봉수란 존재는 한국 바둑사를 장식하는 귀중한 자산이다. 서봉수는 일본 유학파 들이 휩쓸던 시대에 ‘토종’으로는 처음 정상에 올랐고 실전 중심의 그의 바둑관과 잡초적 생명력은 훗날 세계를 풍미한 ‘한국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 

● 자신이 하나의 ‘돌’임을 터득한 사람

바둑은 어떤 스포츠와 비슷할까. 권투처럼 바둑에도 ‘아웃복싱’과 ‘인파이팅’이 있다. 탁구처럼 ‘전진 속공’이 있는가 하면 여자 국가대표 김경아 선수 같은 수비 전문 플레이도 있다. 바둑은 골프처럼 강약의 조절이 전술의 핵심이고 축구처럼 골 결정력이 절실히 요구되며 야구처럼 마무리를 잘해야 승리의 점수를 지켜낼 수 있다. 바둑은 2009년 2월 대한체육회에 가맹하면서 ‘스포츠’가 됐다. 바둑은 앞서 열거한 대로 스포츠의 온갖 요소를 지니고 있지만 ‘바둑’ 하면 떠오르는 스포츠의 이미지는 희미하다. 왜일까. 바둑은 다름 아닌 ‘전쟁’을 닮았기 때문이다. 전쟁 중에서도 미사일이 오고 가는 현대 전쟁이 아니라 병사들이 직접 움직이는 구식 전쟁을 닮았다. 장막 안에서 천리를 내다보는 손자 병법 시대의 전쟁을 그대로 닮았다. 바로 이 대목에 바둑의 매력과 바둑의 난해함과 바둑의 깊이가 담겨 있다. 바둑이 고대로부터 ‘만 가지 게임의 왕’이 된 이유다.

왜 이런 얘기부터 꺼내는가 하면 서봉수 9단의 별명이 ‘야전사령관’이기 때문이다. 한국 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6·25전쟁에 병사로 참전했던 경험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기사(棋士)로서 바둑판 위에선 돌을 주무르는 장수와 같은 존재였는데 막상 전쟁터에 나와 보니 사석(捨石: 버림 돌)이나 폐석(廢石: 용도가 끝난 돌)이 될 수도 있는 수많은 돌 중 하나에 불과했다.”

서봉수는 전쟁터엔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방위 출신이지만 자신이 하나의 ‘돌’임을 생래적으로 터득한 사람이다. 그의 수줍음과 과도한 허리 낮추기,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 토종의 된장 냄새, 지식을 뛰어넘는 본능과 직관, 잡초의 생명력 등은 모두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이것들이 서봉수의 ‘실전적 기풍’과 어울려 야전사령관이란 별명을 만들어냈다. 서봉수 9단 본인도 이 별명을 좋아한다. 탁상 머리에 앉은 사령관이 아닌, 바람 부는 전쟁터에서 먹고 자며 말을 달리는 야전사령관….

● 거리의 강자 모조리 쓰러뜨린 까까머리 서봉수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한국바둑의 대부 조남철 8단의 20년 아성이 혜성처럼 등장한 서봉수 2단에 의해 무너졌다. 사진은 서봉수(오른쪽)가 조남철을 3대1로 꺾은 1972년 명인전 도전기 4국. [중앙포토]


서봉수는 1953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서봉수의 큰형은 80년대 대전 일대를 주름잡던 유명한 ‘주먹’이었다.) 공부를 싫어해서 학교는 거의 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산도 느린 편이고 수학에 특별한 적성을 보인 적도 없다. 출석 미달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장도 어머니가 학교에 가 통사정해 받았다고 한다. 13세 때인가. 아버지가 다니던 영등포 시장통의 어느 기원에서 우연히 바둑을 배웠는데 이때부터 바둑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서봉수를 보면 ‘운명’이란 두 글자가 떠오른다. 프로기사로 대성하려면 7~9세 때는 바둑을 배워야 하고 11~13세쯤엔 프로 입단을 해내야 한다. 최소한 15세 이전엔 프로가 돼야 성공을 기대할 수 있다. 조훈현은 5세 때 바둑을 배웠고 9세에 프로가 됐다. 일본에서 최고의 스승들에게 배웠다. 이창호는 8세에 바둑을 배웠고 조훈현의 제자가 되어 11세에 프로가 됐다. 이세돌은 권갑룡 도장에서 바둑을 공부해 12세에 프로가 됐다. 이에 비하면 서봉수는 너무도 늦게 바둑을 배운 셈이다. 선생도 따로 없었다. 서봉수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고(대방동에서 어머니와 셋방살이를 했다) 그래서 성공의 또 하나의 필수조건인 ‘좋은 선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기재(棋才)는 출중했다. 서봉수는 대성의 3대 요소 중 좋은 선생과 빠른 입문은 구비하지 못했지만 가장 중요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는 바둑 책이나 옛 고수들의 명국 기보를 거의 공부하지 않았다. 대신 길거리 기원에서 짜장면 내기를 하거나 어른들이 주선한 내기바둑을 두며 살았다. 내기바둑의 강자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까까머리 서봉수에게 추풍낙엽으로 떨어져 나갔다. 다음에 만나면 더 강해져 있었다.

내기바둑은 프로를 지망하는 소년들에겐 금기와 같다. 내기바둑을 두면 승부에 지나치게 연연하여 시야도 좁아지고 바둑을 망친다는 게 바둑세계의 오랜 통념이다. 조훈현 9단이 일본에서 수업시절 딱 한 번 선배 프로기사와 100엔짜리 내기바둑을 두었다가 스승 세고에 겐사쿠 9단으로부터 파문까지 당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더구나 서봉수는 내기바둑이 생계와도 밀접한 의미를 띠고 있어서 승부에 더욱 절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론대로라면 그의 바둑은 꽁꽁 굳은 하급의 바둑으로 전락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서봉수는 실전의 가혹함 속에서 본능적으로 ‘생존’을 배웠고 자기 나름의 독특한 승부호흡, 즉 실전적 직관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서봉수는 훗날 ‘야생의 표범’으로 불리고 ‘실전의 대가’라는 칭호를 거쳐 ‘야전사령관’에 이르게 된다. 그 원동력 속엔 이 시절의 헝그리 정신과 함께 내기바둑 특유의 실전감각이 녹아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


잠시 이야기가 옆으로 가지만 1960년대 일본의 전설적 강자 사카다 에이오 9단은 어린 시절 부친이 내기바둑으로 잃은 재산을 내기바둑으로 되찾아온 일화를 갖고 있다. 그 역시 화려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실전적 기풍’으로 전성기 일본 바둑을 완벽하게 제패했다. 또 프로 초단이 된 뒤 미국으로 이민 가 포커의 대가가 된 차민수 4단은 어느 날 느닷없이 미국대표로 후지쓰배 세계대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조치훈 9단까지 꺾고 세계 8강에 오른다. 깜짝 놀란 일본 사람들 앞에서 그는 “포커만 했지만 바둑이 늘었다. 안목과 승부호흡의 문제에서 모든 승부는 동일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내기바둑이든 그 무엇이든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3승1패로 명인 타이틀 … 신문 1면 장식

서봉수는 1970년 9월 입단대회를 통과해 프로 초단이 된다. 17년7개월이니까 늦은 나이다. 첫해에 4승2패. 신예로서는 주목받기 힘든 그저 그런 성적표였다. 대방동에서 버스표 두 장과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짜장면 한 그릇 값을 들고 종로 관철동 한국기원까지 출퇴근하는 새로운 일상이 시작됐다. 그리고 71년 4월 제4회 명인전이 열렸다. ‘서봉수=명인’이란 등식을 만들어낸 바둑사에 남을 드라마틱한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예선을 5연승으로 통과한 서봉수는 이 무렵 하루아침에 바둑의 묘리를 터득한 사람처럼 연승가도를 달렸다. 승단대회서 전승하여 연말엔 2단이 됐고 조남철 1인 독주시대를 마감시킨 당대의 최강자 김인 7단(당시)마저 꺾고 명인전 도전자가 됐다. 명인 타이틀 보유자는 다름 아닌 50세의 조남철 8단(당시)이었다. 비록 6년 전 김인에게 국수 타이틀을 내주며 1인자의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이때까지 그는 무려 20년간 한국 바둑의 절대 강자였다. 비록 이제 50세의 장년이 되었다고는 하나 갓 입단한 서봉수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승부는 그러나 의외로 쉽게 끝났다. 첫 판을 불계로 이긴 서봉수는 2대1로 리드한 가운데 열린 제4국(72년 5월)에서 불과 176수 만에 불계승을 거두며 3승1패로 타이틀을 따냈다. ‘단=실력’이던 시대였다. 일본 유학을 하지 않은 기사는 타이틀의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다(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등 예전의 타이틀 보유자는 모두 일본유학파였다). 한데 일본 유학도 하지 않은 데다 입단한 지 1년8개월밖에 되지 않은 19세 무명 기사가 한국 바둑의 태산 조남철 8단을 꺾으며 우승한 것은 당시만 해도 진정 놀라운 사건이었다. 당시 주최사(한국일보)는 이 전대미문의 사건을 1면 기사로 대문짝만 하게 실었고 주간지에도 서봉수가 표지 모델로 등장했다.

조남철은 이로써 마지막 타이틀을 잃으며 승부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서봉수는 19세에 우승컵을 따내 ‘최연소 타이틀 획득’의 기록을 세웠고 동시에 최저단(2단) 타이틀 획득 기록에다 입단 후 최단기간 내 타이틀 획득 기록도 세우게 된다. 최연소 기록은 훗날 이창호에 의해 깨졌지만 나머지 두 개의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남아있다.

서봉수는 그러나 ‘밑천’이 짧았다. 조훈현이 후지사와 슈코 같은 훌륭한 스승 아래서 연구를 하고 그 옛날 본인방 가의 명국에서부터 우칭위안, 기타니, 사카다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명국을 섭렵하며 팁바둑을 충실히 다진 것과 달리 서봉수는 ‘실전’이 스승이었고 거기서 터득한 동물적인 승부감각과 끈질긴 생존력이 전부였다. 서봉수는 이제 막 정글에 발을 디딘 새끼 표범이었다. 명인이 되었건만 약한 상대에게도 자주 졌다. “서봉수의 명인은 우연”이란 소리도 나왔다. 필생의 적수가 될 ‘조훈현’이란 청년이 아직 일본에 머물며 현해탄을 건너오지 않았을 때의 상황이었다.

‘바둑황제’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에게 자신의 모든 타이틀을 차례로 넘겨준다. 무려 310번을 싸워 119승 191패를 기록한다. 그러나 조훈현이 가장 많이 상대한 기사는 이창호가 아니라 서봉수다. 만년 2인자 서봉수는 조훈현의 절대적인 파워에도 굴하지 않고 무려 366번을 싸워 119번을 이겼다. 조훈현과 서봉수의 30년 애증을 돌아본다. 

1973년 백남배 본선서 숙적 첫 대결

“조훈현이 돌아왔다!”는 소식이 관철동 바둑동네에 퍼져나갔다. 1963년 일본에 유학을 떠났던 조훈현이 10년 만인 73년 3월 군 입대를 위해 귀국한 것이다. 그 소식은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처럼 서늘한 전율을 품은 채 프로기사들 사이에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당시 바둑계는 조훈현보다 10년 연상인 김인 9단의 시대가 막바지를 향할 때였고 윤기현·하찬석·강철민·정창현 등이 그의 적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제 조훈현이란 절대 강자의 말발굽 아래 이슬처럼 사라질 참이었다. 그리고 또 한 명, 막 프로가 된 조훈현과 동갑내기 서봉수가 있었다.

조훈현은 100년에 한 명 나올 천재라는 찬사 속에서 9세에 프로가 됐고 최고의 스승 밑에서 배웠다. 서봉수는 늦게 입문해 18세에 프로가 됐고 저잣거리의 내기바둑과 더불어 성장했다. 고수들이 득시글거리는 ‘일본 바둑’이라는 풍요로운 터전에 비하면 서봉수가 자란 대방동 단칸 셋방과 영등포의 기원은 짜장면 냄새 물씬 풍기는 후진 뒷골목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서봉수도 다른 강자들과 마찬가지로 조훈현에게 무수히 패배했다. 그러나 서봉수는 완패하진 않았다. 이 점이 ‘승부사 서봉수’의 다른 점이다. 다른 기사들은 조훈현에게 연패하면 그걸로 포기하고 정신적으로도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밀려 멀리 시베리아까지 쫓겨갔다가도 어느새 만리장성을 넘어 돌아와 조훈현 왕국의 일각을 매섭게 물어뜯곤 했다. 조훈현이 중원의 ‘황제’라면 그는 배고픈 북방의 몽고족이었다.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1인자 조훈현과 2인자 서봉수의 격돌은 치열하고 고통스러웠다. 동시에 이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바둑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고 한국 바둑의 세계 제패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큰 사진은 서봉수(오른쪽)와 일본에서 귀국해 공군사병이 된 조훈현의 1976년 왕위전 도전기 모습. 오른쪽 작은 사진은 (위쪽부터) 80년대 국수전과 최고위전 도전기, 2001년 삼성화재배 8강전.


서봉수와 조훈현은 1973년 1월의 어느 추운 겨울 날, 백남배라는 지금은 사라진 기전의 본선에서 처음 만난다. 이때로부터 2011년 11월의 맥심배까지 38년 동안 두 기사는 무려 366번 대결한다. 바둑사에 이처럼 줄기차게 싸운 숙적은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서봉수는 119승 247패를 거둔다. 승률 32.5%. 거리의 무사 서봉수가 ‘바둑황제’와 싸워 세 판 중 한 판을 이겼다. 바로 이 점에서 서봉수의 재능도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봉수의 바둑은 ‘생존’이란 기본적인 틀 안에서 만들어졌기에 화려함이 없고 때로는 누추한 감마저 준다. 바둑의 품격을 누구보다 중시하는 김인 9단은 바로 그런 이유로 초창기 서봉수 바둑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봉수가 이런 바둑으로 조훈현과 치른 71번의 결승전에서 14번이나 승리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역사에 가정은 필요 없다지만 가끔은 서봉수가 조훈현과 비슷한 수업 과정을 겪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당시엔 아는 게 없었다. 지금 보면 너무 엉터리여서 깜짝 놀라곤 한다.”(서봉수 9단)

적어도 프로기사가 되려면 일본의 우칭위안 같은 유명기사 기보나 본인방전 전집, 그리고 사활문제집 정도는 공부하던 시절이다. 하지만 서봉수는 이런 책들을 본 적이 없다. 생각하면 온갖 고전들이 가득 꽂혀 있는 조훈현 9단의 서가와 책이라고는 바둑 잡지만 보이는 서봉수의 집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조훈현, 모든 게임 잘 해 … 서봉수, 계산 느린 편

성격도 많이 달랐다. 조훈현은 머리 회전 속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여서 카드 게임이나 마작 등 모든 게임 속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필자는 조훈현보다 빠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공부를 했어도 필경 수재였을 것이다. 서봉수는 계산이 너무 느리고 서툴러서 이런 사람이 어떻게 바둑의 고수가 됐을까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걸음 걸이도 의사 결정도 조훈현은 빠르고 서봉수는 느리다. 조훈현은 약속하면 칼 같고 예스와 노도 분명하다. 남들에게도 그걸 기대한다. 서봉수는 다르다. 타인과의 관계나 세상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 깜깜할 때가 많다. 두 사람 사이가 드디어 물과 기름처럼 멀어지게 된 것, 특히 조 9단이 서 9단을 멀리하게 된 것도 이런 성격 차이에 기인하는 바 크다.

돌아보면 처음 일본에서 돌아온 조훈현은 약간 수줍어하면서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었다. 일본보다 물가가 싼 한국에서 그는 동료기사들과 어울려 돈도 잘 썼다. 하지만 70년대 한국은 당시 번영하던 일본에 비해 어려웠고 당연히 각박하고 무서운 구석이 숨어 있었다. 특히 선배 기사에게 사기를 한번 당한 뒤 조훈현도 예민한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보게 된다.

“서봉수가 조훈현과 100원짜리 내기바둑을 두어 많이 졌으나 그걸로 조훈현을 연구해 도전기에선 이겼다”는 유명한 얘기가 있다. 풀이하자면 이렇다. 당시 기사실에선 재미 삼아 내기바둑도 뒀다. 서봉수는 조훈현과 한번 겨뤄보고 싶었을 것이고 갓 귀국한 조훈현도 아무 경계심이 없던 때라 흔쾌히 응했을 것이다. 치수는 호선은 아니고 일본기원 5단인 조훈현에게 한국기원 2단인 서봉수가 선(先) 또는 선상선(두 번은 흑, 한번은 백) 정도로 접혔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과는 물론 조훈현의 승리. 당시로서는 분명 수준 차가 있었다.

73년 7월, 조훈현이 명인전 도전자가 되면서 둘 사이의 첫 도전기가 열렸다. 세인의 관심이 집중됐던 이 대결에서 서봉수는 1, 2국을 잇따라 승리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3국은 졌으나 4국에서 이겨 결국 3대1 승리. 이로써 서봉수와 명인과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고 김인·조훈현·이창호가 ‘국수’로 불리는 것과 달리 서봉수만은 ‘명인’으로 불리게 됐다.

이해 8월, 조훈현은 공군에 입대한다. 사병이지만 대회엔 참가했고 대국이 끝나 귀대할 때엔 고참병들에게 선물로 줄 담배를 한 보루씩 사가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 조훈현은 힘들게 ‘선수’ 생활을 했고 이 바람에 국내에서의 출발은 기대했던 것보다는 지체됐다. 조훈현의 첫 우승은 74년 부산의 최고위전. 그후 76년 1기 국기전에서 우승하자 바둑계의 면도날 독설가 정창현 7단은 “조훈현이 드디어 한강다리를 건넜다”며 다가올 조훈현의 ‘1인 독재’를 예고했다. 하지만 정창현 역시 서봉수란 존재가 홀로 버티며 15년간 조훈현과 사투를 벌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국 바둑, 조-서 라이벌 통해 업그레이드

조훈현은 80년, 82년, 86년에 세 차례 모든 타이틀을 석권하는 ‘전관왕’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만약 서봉수라는 존재가 없었더라면 그는 근 15년간 매년 전관왕에 올랐을 것이다. 80년대 도전기는 거의 조훈현 대 서봉수의 대결로 점철돼 있다. 이게 바로 바둑사에서 유명한 ‘조(曺)-서(徐) 시대’다. 팬들은 처음엔 환호했으나 나중엔 “똑 같은 연속극”이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팬들은 장수영·서능욱·강훈·김수장·백성호 등 ‘신흥 5강’을 ‘도전 5강’이라 부르며 조-서 대결 구도를 깨고 우승컵을 거머쥐라고 응원했다. 하나 이들은 우선 서봉수에 가로막혔고 천신만고 서봉수를 넘어 조훈현까지 가도 승리한 적은 없다(서능욱은 무려 13번 준우승했다. 이들 중 강훈만이 1승을 거뒀는데 결승 상대가 조훈현이나 서봉수가 아니었다).

당시 도전기는 유서 깊은 한옥인 운당여관에서 주로 두어졌는데 어느 날 기왕전 도전기를 보러 간 필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항시 여관에 가득 차던 프로기사들이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전 5강 중 한 기사는 “맨날 둘이만 싸우고 대국 후엔 복기도 없고 소주 한 잔도 없는데 뭐 하러 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승부세계에서 강자를 미워할 일도 없지만 설사 밉더라도 이기려면 적의 수를 눈으로 보고 연구해야 마땅하다. 하나 그걸 포기했으니 젊은 5강이 선배인 조-서를 평생 꺾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응씨배를 만든 잉창치(應昌期)는 대만 바둑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한국 바둑이 강해진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필자는 ‘조훈현의 귀환’을 으뜸으로 꼽았다. 조훈현의 스승 후지사와 슈코는 “조훈현이란 진주가 진흙 속에 처 박혀 있다”고 한탄했으나 한국 바둑은 조훈현과 더불어 업그레이드 됐다. 그러나 조훈현도 그냥 가르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서봉수란 특별한 존재로부터 아주 특별한 승부호흡을 배웠다. 서봉수는 물론 조훈현이란 ‘선생’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 하나 조훈현도 서봉수라는 포기할 줄 모르는 2인자가 있어 칼이 녹슬지 않았고 훗날 세계를 제패하게 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봉수는 “내 가슴은 조훈현이 할퀴고 간 상처로 가득하다. 그러나 조훈현은 내 평생의 은인이자 스승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두 기사가 그토록 긴 세월의 애증 속에서 기어이 서로 멀어진 것은 가슴 아프다. 이제라도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만나 대화도 나누고 골프도 함께 하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다.


서봉수 9단과 오타케 히데오 9단의 제2회 응씨배 결승전은 '실전적 한국류'와 '일본 미학'의 정면 대결이었다. 세련되고 우아한 일본 미학은 아름다움과 추함이 수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잡초적 생명력을 지닌 서봉수식 한국류는 실전적 효능을 따질 뿐이다. 승부는 극적이었고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만 이 대결 이후 일본 미학은 석양을 맞고 한국류가 대세를 장악하게 된다. 

경외하던 조치훈 꺾고 결승 올라

서봉수는 생애의 라이벌인 조훈현 9단이 응씨배에서 우승해 40만 달러의 상금을 차지하고 광화문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였을 때 너무나 부러워 견딜 수 없었다. 응씨배가 아니라도 좋았다. '세계 1위'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그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서봉수는 몇 년 동안 후지쓰배 4강이 최고 성적이었다. 그러나 고진감래라던가. 1992년 2회 응씨배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급랭하면서 중국이 응씨배를 보이콧했다. 적수가 줄어들었다. 대진운도 좋았다. 조훈현은 일본의 노장 아와지에게 졌고, 요다와 린하이펑도 탈락했다. 그리고 서봉수가 가장 두려워 하던 '이창호'라는 강적이 '여전사' 루이나이웨이 9단에게 져 탈락했다(※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을 떠난 장주주 9단과 연인 루이나이웨이는 일본과 미국에서 떨어져 살다가 응씨배에 초청받는다. 두 사람은 2회 응씨배가 열린 도쿄에서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마치 출정식을 연상케 하는 비장한 결혼식이었고, 그 기세에 눌린 듯 이창호는 루이에게 패배한다. 당시 이창호는 국내에서 스승 조훈현을 제치고 1인자로 발돋음한 상태였다).

그러나 '우주류'의 다케미야 마사키를 격파하고 천신만고 4강까지 오른 서봉수 앞엔 또 한 명의 천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조치훈 9단이었다. 조치훈은 조훈현이나 서봉수보다 세 살 연하지만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오른 기사다. 그는 1980년에 일본 명인의 자리에 올랐고, 그해 금의환향해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조훈현과 두 번 기념대국을 가져 두 번 다 이겼다. 

바로 그 무렵 서봉수는 조치훈을 찾아갔다. 평소 바둑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던 서봉수는 조치훈이 그 의문을 해결해 줄 적임자라 생각했다. 조치훈을 자기보다 월등한 상수라고 여겼기에 선생님에게 묻듯 부끄러움 없이 물었다. 이 일로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외국에서 외롭게 자란 조치훈과 단순 솔직한 서봉수는 통하는 데가 있었다. 하지만 승부사는 어떤 상대가 자기보다 상수라고 생각하는 순간 심리적으로 고양이와 쥐의 관계가 된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된다. 1992년 11월, 제2회 응씨배 준결승전이 서봉수 대 조치훈, 루이나이웨이 대 오타케 히데오의 대결로 대만의 타이베이에서 열렸다.

준결승전은 3번기. 서봉수는 첫 판을 힘 없이 내줬다. 심리적으로 고양이와 쥐의 관계였기에 도대체 판이 짜 지지 않았다. 안 되는구나 싶었고 그래서 2국은 오히려 편했다. 마음이 저절로 비워졌고 끝나 보니 1집을 이기고 있었다. 그 바둑의 끝내기 때 서봉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조치훈이 괴로워하며 탄식하는데 실로 굉장했다. 서봉수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맹수가 울부짖는 것 같은 애통함”이었다.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
▲ 조치훈에 대한 두려움과 세계 1위에 대한 열망이 충돌하며 밤새 복통을 앓았던 서봉수(오른쪽)는 조치훈과의 준결승전에서 생애에 남을 명국을 남긴다. 1992년 11월 타이베이. 
[사진 | 한국기원]


준결승전 최종전을 앞둔 전날 밤, 서봉수는 창자가 끊어질 듯 아파 견딜 수 없었다. 2국은 요행으로 이겼으나 막상 1대1이 되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그의 내면에선 '세계 1위'에 대한 절실한 욕망과 조치훈에 대한 두려움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그게 배앓이로 나타났다. 밤새 앓고 머릿속이 텅 빈 채 대국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날 서봉수는 자신의 바둑 인생에 남을 만한 명국을 만들어낸다. 누구보다 전투적인 조치훈과 시종일관 난타전을 전개하며 백으로 5집을 이겨낸 것이다. 이게 승부사 서봉수의 매력이다.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서라도 벽을 넘어가는 그 특이한 생명력이야말로 서봉수의 매력이다.

다른 준결승전에서 오타케 히데오 9단이 루이나이웨이를 2대1로 꺾었다. 비록 졌지만 '여자기사 루이'는 '세계 4강'에 올랐고 그 기록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오타케가 결승에 오르자 서봉수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감돌았다. 서봉수는 실전적인 힘을 지닌 사람만을 인정한다. 그 실전적인 힘이란 것도 지극히 자의적이다. 해서 이창호는 하늘같이 높이 보고 조치훈도 높이 본다. 녜웨이핑이나 린하이펑도 인정한다. 하지만 '우주류'의 다케미야 9단이나 '미학'의 오타케는 조금 우습게 본다. 

우주류는 공배가 될 수도 있는 중앙을 에워싸는 것이고 미학은 모양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이 모든 게 서봉수가 생각하는 실전적 치열함과는 거리가 멀다. 헛된 화장이나 사치스러움마저 느껴진다. 그러니 남들이 아무리 찬사를 보내도 서봉수는 생리적으로 높이 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미학'은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바둑이 추구하는 '효율'과 맞닿아 있는 매우 중요한 테마다. 바둑돌이 능률적으로 배치되면 그 모습은 아름답다. 비능률적인 돌은 추하다. 일본은 수백 년 동안 이런 미추의 개념 아래 바둑을 발전시켜 왔고 현대에 와서 '미학'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미학은 바로 오타케 히데오 9단의 신념이다. 오타케는 일본 최고의 명문 도장인 기타니 도장 출신이고, 또 이곳의 수석 사범을 지냈다. 조치훈-다케미야 등은 다 그에게서 배웠다. 오타케는 차라리 대마를 죽일지언정 추한 수는 두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기에 이윽고 '미학의 수호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서봉수 바둑은 어떤가. 그는 오직 실전을 중시하며 실전적인 수라면 모양의 미추를 따지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진흙탕 속에도 뒹굴고 패망선도 얼마든지 기어다니고 빈삼각도 둔다. 그래서 2회 응씨배 결승 5번기는 서봉수가 상징하는 '잡초류' 또는 '실전적 한국류'와 오타케가 상징하는 '일본 미학'의 정면 대결이 된 것이다.

1시간이나 남았는데 '속기 '미스터리

결승전은 이듬해, 그러니까 1993년 3월 제주도 서귀포 하얏트호텔에서 시작됐다. 1, 2국은 한국에서 두고 3, 4, 5국은 싱가포르에서 둔다는 스케줄이었다. 서봉수는 고통스러웠던 준결승전에 비하면 한결 여유로웠다. 그러나 첫 판은 오타케의 완승이었다. 서봉수는 '미학'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미학이 우습지 않다는 것을 절감했다. 일본 바둑은 빠르게 석양을 맞게 되지만 이때만 해도 아직 건재했다. 2국은 그러나 서봉수의 승리. 이전투구의 백병전에서 거친 잡초류의 생명력이 작동했다.

2국이 끝나고 싱가포르의 3국까지는 아직 두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서봉수는 오타케의 기보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오늘날 일본 미학은 바둑의 주류에서 사라지고 전투적인 '한국류'가 대세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학은 바둑의 기본이며 여전히 유효하다. 자칫 탐미적으로 흘러 파괴력을 잃는 약점이 있지만 최고의 감각은 미학이란 가마에서 구워진다.

3국에서 서봉수는 흑을 들고 191수 만에 불계승했다. 상대를 알자 승부도 쉬워진 감이 있었다. 서봉수는 그러나 4국에서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다. 우승이 가까워지자 서봉수의 내면은 복잡해졌다. '헝그리 복서'에게 눈앞에 다가온 40만 달러가 우선 너무 고혹적이었다. 서봉수는 매우 빠른 속기로 일관했는데 그것도 미스터리였다. 평소 서봉수의 기질로 볼 때 이 한 판에 온몸의 에너지를 마지막 1그램(g)까지 쏟아부어야 마땅한데 서봉수는 아무리 난해한 장면에서도 손이 척척 나갔다. 바둑이 끝났을 때 서봉수의 시계는 무려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5시간짜리 바둑도 초읽기에 몰리며 최선을 다하던 서봉수인데 이 중요한 바둑에서 왜 그토록 빨리 둔 것일까. 소원이던 세계 챔프가 눈앞에 다가오자 갑자기 두뇌가 작동을 멈추고 멍해져 버렸다. 191수, 흑 불계패. 지금까지의 바둑에 비하면 바둑 내용도 참으로 형편없었다.

얼굴이 빨개져서 나온 서봉수에게 그 이상한 '속기'에 대해 물어보니 “초읽기에 몰릴까 봐 빨리 뒀다”는 답이 돌아왔다. 신기하다. 프로기사가 초읽기를 두려워하다니! 설령 그렇다 해도 1시간이나 남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승이 다가오자 정신이 공황상태로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저 질기고 질긴 서봉수가 정신을 놓다니. 얼마나 우승을 소원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인간의 두뇌는 참으로 오묘하다.

서봉수의 혼란은 2대2가 된 이후 더욱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서봉수보다 10년 연상인 오타케는 키가 자그맣지만 리더의 기질이 있는 사람(그는 훗날 일본기원 이사장을 맡기도 한다). 서봉수는 문득 오타케가 5국에서 '고목'을 둘 것 같다며 걱정했다. 바둑은 네 귀에서 시작되는데 주로 화점이나 소목을 많이 둔다. 고목이나 외목도 가끔 둔다. 그건 코피를 마시느냐, 홍차를 마시느냐와 같은 차이일 뿐이다. 고목은 좌표상의 위치가 '5의四(사)'로 너무 높아 프로들은 거의 쓰지 않는다. 암수가 많아 아마추어들이 하수와의 대국에서 종종 쓴다. 한데 서봉수 같은 당대의 고수가 고목 따위를 두려워하다니! 

서봉수 9단은 바둑사에서 극히 이례적인 존재다. 그는 뒷골목에서 바둑을 배웠지만 세계챔프에다 진로배 9연승 등 바둑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웠다. 서봉수는 ‘바둑’ 외엔 다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는 인물이기도 하다. 서봉수는 지금도 승부의 환상을 꿈꾸며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야생의 생명력과 된장 냄새 물씬 풍기는 ‘서봉수’라는 이미지는 뇌리에서 살아남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오다케 꺾은 응씨배…일본 바둑 침몰의 계기

도사 같은 이창호 9단도 어린 시절엔 골목길을 눈물을 흘리며 걷곤 했다. 조훈현 9단이 비 내리는 밤 우산도 없이 횡단보도의 신호등 아래 망연히 서 있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고수들은 허허 웃으며 패배를 받아들일 것 같지만 실은 반대다. 같은 프로라도 패배에 둔감할수록 하수이고 상처가 클수록 고수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


잔혹한 패배의 상처에도 불구하고 고수들은 큰 승부를 원한다. 맹수의 본능이다. 서봉수 9단도 승부를 갈구했고, 드디어 ‘생애의 승부’라 할 만한 일전을 맞이하게 됐다. 일본의 오타케 히데오(大竹英雄) 9단과의 제2회 응씨배 결승전은 2대 2가 되었고, 드디어 내일이면 우승자를 결정할 마지막 대국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한데 이 대목에서 서봉수가 보여준 모습은 실로 뜻밖이었다. 서봉수는 과장하자면 덜덜 떨고 있었다. 스승도 없이 뒷골목 기원에서 바둑을 배웠고 헝그리 정신으로 잡초처럼 성장해온 실전바둑의 대가 서봉수가 ‘생애의 승부’ 앞에서 떨고 있는 모습은 그래서 지금도 미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1993년 5월의 봄날, 서봉수와 나는 바둑판을 들고 싱가포르의 공원을 찾았다. 해는 따뜻했고 잔디는 포근했다. 거기서 바둑판을 펴고 ‘내일’에 대해 얘기했다. 서봉수는 오타케가 프로들이 잘 쓰지 않는 ‘고목(高目)’을 둘 것이라며 걱정했다(고목을 두거나 소목을 두거나 그게 무슨 대수인가. 말도 안 되는 걱정이라고 일축했지만 이튿날 오타케는 진짜 고목을 들고 나왔다. 동물적 본능이랄까, 아무튼 놀라운 예감이었다).

서봉수는 동물원의 동물들을 구경하며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특히 악어에 끌리는 모습이었다. 악어는 아주 오랫동안 미동도 없이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엎드려 있었다. 한낱 악어도 원하는 먹이를 얻기 위해선 저토록 수도승 같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에 그는 감동을 받은 듯했다. 하물며 세계 챔프와 40만 달러가 거저 얻어질 수 없는 것 아닌가 반성하는 모습이었다.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제2회 응씨배 결승에서 오타케를 3대2로 꺾고 우승컵과 40만 달러의 상금을 받은 서봉수 9단. [중앙포토]

이튿날(93년5월20일) 싱가포르 마리나 만다린 호텔에서 서봉수의 흑으로 결승5국이 시작됐다. 흑은 양 화점. 백은 소목 하나를 두더니 제4착에서 고목을 두었다. 불가사의하게도 예감은 적중했고 순간 가슴이 화살을 맞은 듯 철렁했다. 바둑은 불과 59수에서 빗나가기 시작했다. 흑의 빗나간 행마에 편승해 오타케의 ‘미학’은 펄펄 날았다. 맥을 짚고 급소를 연타하며 국면을 완전 장악했다. 점심시간이 됐을 때는 ‘흑 재기 불능’이란 분석이 파다했다. 검토실엔 ‘살아 있는 기성’으로 불리는 우칭위안(吳淸源) 9단과 ‘철녀’ 루이나이웨이(芮乃偉) 9단이 줄곧 이 판을 연구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우칭위안 선생이 오타케보다 서봉수 쪽에 우호적인 건 조금 놀라웠다. 일본에서 시합 출전을 거부당하고 떠돌고 있던 루이는 당연히(?) 서봉수 편이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흑 절망”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일반적인 강수나 전투로는 이미 판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점심시간 때 서봉수는 방에 틀어 박혀 배달된 식사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바둑만 연구했다. 나는 그에게 검토실의 분위기를 전해 줬다. 오후 대국에서 서봉수는 미치기 시작했다. 접바둑에서 하수를 상대하듯 판을 휘저으며 적의 칼날 앞에 목을 훤히 드러낸 채 결사항전을 거듭했다. 반면 오타케는 ‘사고만 나지 않으면 이긴다’는 생각에 싸울 의사가 하나도 없었으나 흑의 거듭되는 무모한 도전을 놔둘 수도 없어서 판은 점차 아수라장으로 흘러갔다. 서봉수는 이후의 일에 대해 “아무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우변에서 흑 대마가 죽었고 중앙에서 백 대마를 쫓고 있었지만 잡아도 지는 형세였다. 한데 오타케의 허망한 착각과 함께 연거푸 기적이 일어났다. 죽었던 흑 대마가 백을 잡고 부활하며 바둑은 흑의 대 역전승으로 끝났다. 백이 이기는 코스는 수만 갈래였다. 흑이 이기는 코스는 실전 딱 한 갈래였다. 하나 서봉수는 특유의 잡초적 본능과 벼랑 끝에서도 되살아나던 내기바둑 시절의 경험으로 그 코스를 찾아냈다. 서봉수는 3대 2로 우승했고 40만 달러의 상금도 차지했다. 

일본바둑은 이 패배와 더불어 바다 깊숙이 침몰했고 다시 살아나지 못했다. 대신 한국바둑이 세계를 지배했다. 지금 생각하면 서봉수와 오타케의 이 결승전은 ‘한국 실전류의 부흥’과 ‘일본미학의 퇴조’를 알리는 분수령 같은 한 판이었다. 바둑내용을 이겼더라도 승부에서 지면 그로부터 역사가 바뀐다. 그게 승부가 지닌 불가사의한 힘이다.

국가대항전 진로배…‘4천왕’ 면모 유감없이 발휘

재미있는 바둑 이야기 - 서봉수.txt | 인스티즈

1997년 진로배에서 숨죽이고 있던 야생마 서봉수는 또다시 미친 질주를 시작했다. 진로배는 한·중·일 3국의 국가대항전으로 현 농심배의 전신이다. 연승전이기에 이기면 계속 다음 선수와 대국할 수 있다. 

제5회 진로배의 한국대표는 조훈현 9단-이창호 9단-유창혁 9단-서봉수 9단-김영환 4단이었다. 96년 12월의 개막전에서 중국 선봉 위빈 9단은 한국의 김영환 4단을 꺾었고 다음날 일본 아와지 9단을 꺾어 2연승. 여기서 한국팀 4장 서봉수 9단이 등장했다. 서봉수는 첫판에 강적 위빈을 가볍게 꺾더니 조금 만만해 보이는 일본의 히코사카 9단을 맞이해서는 고전 끝에 반 집을 이기고 연승을 이어나갔다. 15일엔 중국의 신흥 강자인 창하오 9단마저 극적인 ‘반 집’으로 제치고 3연승. 비틀거리고 힘들어 하면서도 힘든 고비를 넘긴 서봉수는 이후 파죽지세로 4승을 추가한다. 

7연승을 거둔 서봉수는 97년 1월 31일 일본팀 주장 요다 노리모토 9단과 맞서 또다시 극적인 반 집 역전승을 거둔다. 8연승을 거둔 서봉수의 마지막 상대는 중국 주장 마샤오춘 9단. 당시 이창호와 함께 세계바둑의 ‘양강’으로 인정받던 실력자였다. 서봉수가 이 판마저 이기면 전대미문의 9연승과 함께 팀 우승까지 결정짓게 된다. 바둑사에 남을 대기록이 세워질지 모른다는 소식에 대국장인 베이징 쿤룬호텔엔 중국 기자와 기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당시 베이징은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의 서거로 10일간의 국장이 치러지고 있어 거리 곳곳엔 조기가 계양되고 모든 문화행사가 취소된 상태였다. 진로배만은 중요한 국제행사라 특별히 허락된 케이스였다. 또 북한 황장엽 비서 망명으로 남북이 첨예하게 대치 중이어서 한국선수단이 묵은 쿤룬호텔 14층은 폐쇠회로로 출입을 감시하고 인터뷰도 막는 등 보안이 삼엄했다. 

신기한 것은 서봉수였다. 지금까지는 역전 반 집 승을 세 번이나 거두는 등 온갖 곡절 끝에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8연승을 거둔 서봉수였지만 이 판은 달랐다. 마치 정해진 운명을 가듯 초반부터 앞서나가더니 여유 있게 불계승을 거뒀다. 

이 판을 두고 김인 9단은 “서봉수 일생의 명국”이라 했고 조훈현 9단은 “나도 생각지 못한 엄청난 강수 일변도”라고 평했다. 중국 신문은 “한국 4천왕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난다”고 썼다. 바둑사의 대기록인 진로배 9연승은 이렇게 탄생했다.

서봉수는 실력이 미천하던 입단 초기에 특유의 돌파력을 보이며 ‘명인’에 올랐다. 하지만 그 후엔 또 계속 졌다. 응씨배 우승으로 세계챔프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고 진로배 9연승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타고난 천재성으로 어느 날 전속력으로 꼭대기까지 치고 올라가곤 했지만 밑천이 짧은 탓인지 정상에 오래 서진 못했다. 더구나 서봉수는 세상사에 어둡다. 베트남 처녀와 결혼해 구설에도 올랐다. 하지만 그는 한눈 팔지 않고 자신의 운명이라 할 바둑의 길을 계속 간다.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 손자뻘 연구생들과 10초 바둑으로 트레이닝을 하고 권갑룡 도장에 사범으로 취직(?)해 입단을 꿈꾸는 소년들을 훈련시킨다. 환갑이 된 지금도 승부의 꿈, 또는 환상을 버리지 않고 살아간다. 바둑팬들은 그런 서봉수를 막연히 좋아한다. 

가끔은 서봉수 9단이 “세계를 떨어울린 ‘4천왕’ 중에서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하는 유일한 기사”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수많은 선후배들이 세계대회 때마다 외국에 단장으로 나가지만 ‘서봉수 단장’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왜일까. 인가. 아니면 서봉수 9단이 너무 서민적이고 너무 솔직한 탓일까. 나는 한국기원이 그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해 주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서봉수 9단 같은 인물은 귀하다. 우리네 상식과 통념으로 재단해선 안 된다. 그는 우리의 상식보다 조금 높은 곳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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