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녕대군 이 종
세종대왕 옛날 위인전에는 삼형제 (양녕, 효령, 충녕) 까지만 나와서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고 마흔 가까이되서 나은 늦둥이 막내아들임 (양녕과는 11살, 효령과는 9살, 충녕(세종)과는 8살 동생)
용모도 빼어나고 학문도 뛰어나고 활도 잘쏘고 못하는게 없었다고 함
그래서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가 항상 옆에 두고 키웠다고함

"임금의 제4자(第四子)로서 어렸으나, 총명하고 지혜로왔고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였고 행동거지가 공순(恭順)하였으므로, 임금과 정비(靜妃)가 끔찍이 사랑하여 항상 궁중에 두고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종(褈)은 충성스럽고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함이 천성(天性)에서 나왔으며, 학문에 부지런하고 활을 잘 쏘았으나 다른 기호(嗜好)는 없었다.
-성녕대군 이종의 졸기"
"자태와 얼굴이 단정하고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범상하지 않았으므로, 왕과 왕후가 지극히 사랑했다. 나이 8세 때에 처음으로 취학(就學)했는데,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고, 조금도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또 활쏘기 연습을 잘하여 이미 화살이 150보에 도달할 만큼 능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형을 공경하는 일도 한결같이 어른과 같으니, 전하(殿下)께서 더욱 소중하게 여겨서, 평상시 기거할 때나 음식을 드실 때 거의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셨다.
-변계량, 성녕대군 신도비 명-"
*변계량은 태종~세종 시대에 활약한 문신으로 세종대왕의 스승이자 세종이 왕에오를때 집현전 설치건의 및 왜구정벌때도 책사로서 활약했다

10살에 대군으로 진봉하고 13살에 대광보국 (문무관 최고벼슬 정1품) 칭호를 받음 (형들은 15살 넘어서 받음)
12살때 결혼을 했는데, 결혼후에 출가시키지 않고 이방원이랑 원경왕후가 항상 옆에두고 궁궐에서 살게함

불행히도 14살에 완두창(홍역)으로 요절함
충녕대군(세종)은 의원 양홍달과 의학서적 보면서 동생 성녕을 극진히 간호했는데, 양녕대군은 그당시 밖에서 놀고 있었음
성녕대군 사망후 이방원이 3일동안 국정을 안보고 30일간 고기반찬을 안먹었다고함
“병이 들자, 왕과 왕비가 지극히 걱정 근심하여, 기도하고 치료하는 등 모든 정성을 다하였으나, 급기야 돌아가자, 극도로 슬퍼하여 이틀 동안이나 수라를 들지 않았고, 사흘 동안 정사를 보는 것을 중지했다. 당시 전하(殿下)께서 지나치게 애통한 나머지 몸과 기운이 상당히 좋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원로대신들이 육선(肉膳)을 들도록 간청했으나 허락하지 않고, 소찬(素饌)만을 먹으면서 30일을 지냈다.
-변계량, 성녕대군 신도비 명-"
"죽은 자식 성녕은 우리 가문에서 얼굴을 바꾼 아이였다. 매양 중국의 사신에게 술을 청할 때에는 중국 사신 황엄 등은 주선하는 사이에 주의하여 보고 심히 그를 사랑하였었다. 장차 성취시켜서 노경을 위로하려 생각하였는데, 불행하게 단명하였으니 무엇으로써 마음을 잡겠느냐"
-태종실록, 이방원이 조말생에게-
이방원이 성녕대군에 대한 아비의 마음을 알아달라는 뜻에서 변계량을 불러 귀신의 이치에 대해서 묻기도했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변계량(卞季良)을 불러서 귀신(鬼神)의 이치를 물었다. 두 대군(大君)으로 하여금 귀신의 감응(感應)하는 이치를 물으니, 변계량이 대답하기를,
"귀신은 본래 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제사지내면 와서 흠향하는 것입니다. 그 정성이 있으면 그 귀신이 있고, 그 정성이 없으면 그 귀신이 없는 것이니, 내가 정성과 공경을 다하면 귀신은 나의 정성과 공경에서 이루어져 와서 감응하는 것입니다."
-태종실록, 변계량이 이방원에게-
부인(원경왕후 민씨가족 몰살)이나 며느리 일가(세종대왕 부인 심씨가족 몰살)에게도 가차없던 이방원이
성녕대군의 처가 집안 (성씨) 은 공신으로 대접하게함
대언 성엄이 술을 올리니, 상왕이 말하기를,
“너를 보니 성녕(誠寧)이 생각나는구나.”
하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성씨 일문은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견줄 만하다.”
하니, 엄은 성녕 대군(誠寧大君) 부인 성씨의 백부이다.
-조선실록 세종1권-
억(抑)의 딸이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부인이 되었는데, 태종(太宗)이 성녕(誠寧)의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여 일찍이 세종(世宗)에게 부탁하기를,
“성씨(成氏) 일족은 공신의 예로 대접하라.”
하였다. 이 때문에 대우가 특별히 달랐고 은총과 권애가 우악(優渥)하였다.
-좌찬성 성억의 졸기-

현재 성녕대군 묘는 경기도 고양시 최영장군묘 근처에 있음
*성녕대군은 소고기와 닭고기를 좋아했는데 제사 음식으로 소는 도축할 여건이 안되서 이방원이 닭고기를 제사 음식으로 올림. 그래서 요리서적에 닭고기 역사에 성녕대군 언급이 간혹 있음
*성녕대군 요절 후 이방원과 원경왕후는 왕세자 양녕대군에게 국정 맡긴후 옛날 임시궁전인 수강궁으로 떠나는데 얼마안되서 양녕대군이 곽선의 첩 어리 와의 스캔들때문에 폐세자되고 충녕대군을 세자로 임명
*원경왕후 민씨는 성녕대군이 요절하고 수강궁에 살면서 불교에 귀의하고 2년후에 세상을 떠남
*성녕대군이 요절해서 대가 끊겨 세종이 아들 안평대군을 성녕대군 양자로 삼음 (안평대군 친부는 세종인데 족보상으로는 성녕대군이 아버지).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사망하자 효령대군이 6째아들 원천군을 성녕대군 양자로 삼음
도중에 족보가 7번 끊겨서 고종때가 되어서 해결을함
* 이방원과 원경왕후 사이의 자녀는 정확히 7남 4녀 인데 불행히도
양녕대군 위의 세 아들이 요절, 셋째딸 경안공주 요절, 넷째딸 정선공주 요절, 막내아들 성녕대군이 요절함
(아이러니하게 양녕대군은 69세, 효령대군은 91세, 첫째딸 정순공주는 76세, 둘째딸 경정공주는 69 세로 장수함)

인스티즈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