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없이 기다리고
만나지 못한다
기다림조차 남의 것이 되고
비로소 그대의 것이 된다
시간도 잠도 그대까지도
오직 뜨거운 병으로 흔들린 뒤
기나긴 상처의 밝은 눈을 뜨고
다시 길을 떠난다
바람은 아주 약한 불의
심장에 기름을 부어 주지만
어떤 살아 있는 불꽃이 그러나
깊은 바람 소리를 들을까
그대 힘써 걸어가는 길이
한 어둠을 쓰러뜨리는 어둠이고
한 슬픔을 쓰러뜨리는 슬픔인들
찬란해라 살이 보이는 시간의 옷은
- 상처 / 정현종

옛사람의 그림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속에
갇혀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매고 밤차에 앉아
지구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있다
- 그림 / 신경림

햇빛 비치는 길을 걷는 것과 그늘진 길을 걷는 것.
어느 길을 좋아하지?
내가 한 사랑이 그랬다.
햇빛 비치는 길과 그늘진 길. 늘, 두 길 가운데
어느 길을 걸을까 망설이고 또 힘들어했다.
공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두 길 다 사랑은 사랑이었는데, 두 길 다 내 길이었는데
왜 그걸 두고 다른 한쪽 눈치를 보면서 미안해하고 안절부절못했을까?
- 끌림 中 / 이병률

눈을 뜨면 더 어두운 밤
눈을 감으면 환하게 빛나는 밤
쉽게 잠들지 못하는 밤은 항상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눈을 뜨면 네가 없어서
눈을 감아야 너를 볼 수 있는 밤
너를 생각하면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 언젠가 설명이 필요한 밤 / 안녕하신가영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뭇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보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소년 中 /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코스모스는
귀또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코스모스 앞에 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 코스모스 / 윤동주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키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든지 내버려두어 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생각이 더욱 괴롭습니다
- 나는 잊고자 / 한용운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으면
너와의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져와
괜찮은척해도 나도 잘모르겠어
그다지 보고 싶진 않았는데 말야
울리지 않던 휴대폰
익숙한 번호가 빛나고
슬며시 내려놓으며
- 하고 싶은 말 中 / 어쿠루브

힘들면 한숨 쉬었다 가요.
사람들에게 치어 상처받고 눈물 날 때,
그토록 원했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사랑하던 이가 떠나갈 때,
우리 그냥 쉬었다 가요.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中 / 혜민

용암물이 머리 위로 내려올 때
으스러져라 서로를 껴안은 한 남녀
그 속에 죽음도 공것으로 녹아버리고
필사적인 사랑은 폼페이의 돌에
목의 힘줄까지 불끈 돋은
벗은 생을 정지시켜놓았구나
이 추운 날
터미널에 나가 기다리고 싶었던 그대
아직 우리에게 체온이 있다면
그대와 저 얼음 속에 들어가
서로 으스져라 껴안을 때
그대 더러운 부분까지 내 것이 되는
재앙스런 사랑의
이 더운 옷자락 한가닥
걸쳐두고 싶구나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한 말은
아무리 하기 힘든 작은 소리라 할지라도
화산암 속에서든 얼음 속에서든
하얀 김처럼 남아 있으리라
- 재앙스런 사랑 / 황지우

당신은 모든 것에 있어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시간.
약속 장소에 나가는 시간.
비디오로 본 영화가 끝나고 엔드 크레디트가 다 올라가고 나서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당신은 스톱 버튼을 누르며,
심지어 전화 받을 때도 벨이 다섯 번 이상 울린 후에야
겨우 받기 위해 몸을 움직인다.
그러니 당신에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어쩌면 사랑하는 일에도 당신은 똑같은 속도를 고집할지도 모른다.
- 끌림 中 / 이병률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힘들어하고
가족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누군가 함께 있어도 왠지 외로움을 느끼고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은 다 똑같은 것이니까요.
그래서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하는
내 앞에 서 있는
소중한 그대를
사랑합니다.
-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中 / 혜민

내 품에 안겨 잠든 그대 두 눈에 물든
고운 햇살이 한 손을 들어 가려봐
그대여 왜 이제서야 사랑이라 하나요
이미 내 곁을 지키는 한 사람
나 처럼 울릴 순 없어 어쩌죠 가여운 내 사랑을
- 메아리 / 박효신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
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수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고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 꽃나무 / 이상

사랑의 열정이 그러했고 청춘의 열정이 그러했고 먼 곳을 향한 열정이 그러했듯
가지고 있는 자와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그런 것.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 끌림 中 / 이병률

나역시 좋아요 그대 덕분에 나를 알았죠
너무나 쉽게 무너져 버리는 나를 알게 해주었고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까 날 잊긴 힘들거야
그대의 잘못된 선택이길 비는 비겁한 날 알았죠
- 잘 했어요 中 / 윤종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넘어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 천양희

한밤중에 기대앉아
바보도 시를 쓰고
멀쩡한 사람도 미치게 하는
정녕 사랑이 아니라면
아무도 기꺼이 속아주지 않으리
책장의 먼지를 털어내고
역사를 다시 쓰게 하는
사랑이 아니면 계단은 닳지 않고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
커피를 끓어넘치게 하고
죽은 자를 무덤에서 일으키고
촛불을 춤추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면
- 사랑의 힘 中 / 최영미

어떤 것은 내 몸에 얼룩을 남기고
어떤 것은 손발에 흠집을 남긴다
가슴팍에 단단한 응어리를 남기고
등줄기에 푸른 상채기를 남긴다
어떤 것은 꿈과 그리움으로 남는다
아쉬움으로 남고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그러다 모두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바람에 몰려 개펄에 내팽개쳐지고
배다리에서는 육지에 매달리기도 하다가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수평선 너머
그 먼 곳으로 아득히 먼 곳으로
모두가 하얀 파도가 되어 간다
- 파도 / 신경림

그래서 넌 지금 그곳에 없구나.
눈 마주치는 일조차 미안한 일이 될까봐 어느 먼 곳,
아무도 없는 역에 내려 '난닝구' 바람으로
혼자 맘보를 추고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춤을 추어도 혼자는 추지 말고 아픔과 함께 추어라.
대신 얼마나 힘이 됐는지 아픔은 모르게 하라.
- 끌림 中 /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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