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기억이란 얼마나 되새겨야 흙으로 돌아가며, 상처란 얼마나 고개 숙여야 순해지는 것일까.
-반통의 물 , 나희덕
세상사는 일이 고달프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한 사흘 감기나 앓았으면 싶을때가 있다
앓고 난 뒤에 조금쯤 퀭하니 커진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살아 있는 일이 그래도 행복한 거라는 기특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게 감기는 늘 휴가 였다
그렇게 아프면서 뿌리가 영글어가는 식물처럼 키가 자라는 느낌
이 감기가 지나가면 나는 또 이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날씨가 좋아요 中, 황주리
별은 밤하늘을 올려다보기 전까진 느껴지지 않고,
공기는 숨이 막혀 답답해지기 전까진 소중함을 모른다.
바람은 머리칼을 날리며 존재를 나타내도 그 내음을 맡을 수 없고
물은 두 손 가득 보듬어 안아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랑은 두번다시 하지 않는다 다짐해도 어느새 등 뒤에 다가와 있고
이별은 고개를 저으며 부인해도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만을 남겨 놓는다.
헤어짐이 슬픈 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 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되는 것이다
하루가 저물고 너는 집으로 돌아간다
이별을 위해 몇번이나 걸음을 멈추면서
나는 비스듬히 기우는 달을 바라보며
내일의 일조량을 가늠한다.
남은 삶은 짧고 견뎌야 할 이별은 길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바닥에 고여있는 어둠.
흩어졌다 더 많은 어둠을 열고 돌아온다
내일 밤은 오늘보다 길어질 것이다.
내일도 너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의 하루는 창백한 얼굴을 한채
오래오래 허공을 떠돌것이다
- 황경신
저 가볍게 나는 하루살이에게도
삶의 무게는 있어
마른 쑥풀 향기 속으로
툭 튀어오르는 메뚜기에게도
삶의 속도는 있어
코스모스 한 송이가 허리를 휘이청 하며
온몸으로 그 무게와 속도를 받아낸다.
어느 해 가을인들 온통
들리는 것 천지 아니었으랴
바람에 불려가는 저 잎새 끝에도 온기는 남아 있어
생명의 물기 한점 흐르고 있어
나는 낡은 담벼락이 되어 그 눈물을 받아내고 있다.
- 흔들리는 것들, 나희덕
바람이 스쳐가면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파도가 지나가면 바다가 흔들리는데
하물며 당신이 스쳐갔는데
나 역시 흔들리지 않고 어찌 견디겠습니까
비스킷통에 비스킷이 가득 들어 있고,
거기엔 좋아하는 것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요?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자꾸 먹어버리면
그 다음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되죠
난 괴로운 일이 생기면 언제나 그렇게 생각해
지금 이걸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통이다 라고.
- 상실의 시대 中, 무라카미 하루키
진실은 진실된 사람에게만 투자해야한다.
그래야 그것이 좋은 일로 결실을 맺는다.
아무에게나 진실을 투자하는건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내가 쥔 화투패를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다름없는 어리석음이다.
우리는 인연을 맺음으로써 도움을 받기도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피해도 많이 당하는데,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아부은 댓가로 받는 벌이다.
- 이해인
'정말 우리 마음이란' 미묘하기 짝이 없다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
한 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여유조차 없다
그러한 마음을 돌이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에 따르지 말고
마음의 주인이 되라고 옛사람들은 말한 것이다
- 법정스님 中, 무소유
안녕 너를 처음 만났을때 설레임이 가득한 첫 인사
안녕 너와 헤어짐을 예고할때 슬픔과 미련이 담긴 마지막 인사
안녕 너와 아주 우연히 만났을때 어색함을 지우기 위한 예의의 인사
안녕. 너와 나의 사랑을 추억으로 묻었을 때
다시는 기억해내지 않겠다는 다짐의 인사
이루어진 사랑은 결혼이되고
징글징글한 정이 되고
이루어지지 않은 나머지 사랑들은
주정이되고, 하소연이 되고
넋두리가 됩니다.
운명같은 사랑은 영화가 되고
비비꼬인 사랑은 드라마가 되며
날카롭게 지나간 사랑은 시가 되고
아직도 잊지 못하는 사랑은
노래로 남습니다.
- 성시경 라디오 사랑을 말하다 中
인간이란
잊으려 하면 할 수록 잊지 못하는 동물이다
망각에는 특별한 노력따위는 필요도 없는 것이다
끝도 없이 밀려오는 새로운 일따윈 거의
모두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잊었다는 것 조차 모르는게 보통이다
어느때 문득 그러고 보니 그런일도 있었지
하고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걸 또 머리 속에 새겨두지 않으니
기억이란 덧없는 아지랑이의 날개처럼
햇살 아래 녹아내려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 냉정과 열정 사이 中, 츠지 히토나리
깊은 밤중에 깨어 다락방에 누워있으면 어느 순간
부득부득 떨릴 지경으로 외로움이 사무치고 엄마가 그리웠다
스무살이나 되었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장딴지 근육이 뭉치는 것과 같은 이치인지도 모른다
한밤 중에 다리에 주기가 내리거나 장딴지의 근육이 뭉쳐,
홀로 자기 몸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는 것 같은 성장통..
성장은
누구에게도 하소연 할 수 없는 고독이며 비밀이다
-검은 설탕이 녹는동안中, 전경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 즐거운 편지, 황동규
이별보다 더 큰 슬픔은
이별을 예감하는 순간이며
당신의 부재보다 더 큰 슬픔은
서로 마주보고 있어도 당신의 마음은
더 이상 여기 있지 않음을 느끼는 순간이다
같이 있으면서도 늘 내것이지 못했던 사람아
너를 보면 눈물이 난다
-박성철
사랑을 잃은 당신
부디 새살이 돋을때까지 안녕하기를
당신 피속에 슬픔이 희석되고 희망이 수혈될
그 날까지 부디 안녕하기를
-그림 읽어주는 여자, 한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