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바라보던 기본적인 시각
(이이의 <<동호문답>>을 예로 들어)
손님 ㅡ우리나라[東方]에도 왕도정치로 세상을 다스린 군주가 있었습니까?
주인 ㅡ 문헌이 부족하여 고증하기 어렵지만, 기자箕子께서 우리나라의 군주로 계실 적에 행한 정전井田제도와 팔조법금[八條之敎]은 필시 순수한 왕도정치의 산물일 것이오
그 후 삼국三國[신라·고구려·백제]이 정립했다가 고려高麗가 통일했는데, 그 과정을 상고해보면 오로지 지혜와 힘만으로 이기고자 했을 뿐이니 어찌 도학이 숭상할 만한 일임을 알았다고 할 수 있겠소 비단 군주만 그랬던 게 아니오.
신하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지식과 실천으로 선정先政의 전통을 계승한 이가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소 불교[竺學]에 잘못 빠져들거나 화복설禍福說에 홀려 저 유구한 천 년 동안 특출한 이가 전혀 없다가 고려 말엽 정몽주鄭夢周가 유학자의 기상을 좀 지니고 있었으나 그 또한 학문적 성취는 이루지 못했으니 그의 행적을 더듬어볼 때 충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소.
손님이 버럭 화를 내면서 말했다.
"우리나라 수천 년 동안 한 사람의 진유도 없었다고 말씀하시니, 어찌 그리 기준이 높단 말입니까?"
주인이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이 나에게 질문했기에 내가 감히 바른대로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을 뿐인데 어찌 높은 기준의 논의를 즐긴다고 하시오? 이른바 진유라면 출사해서는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온 백성으로 하여금 태평을 누리게 하고, 물러나서는 만세에 교화를 베풀어 배우는 자로 하여금 큰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자라오 출사해서 도를 행하지 못하고 물러나서 교화를 베풀지 못했다면 [남들이] 비록 진유라 하더라도 나는 곧이듣지 않을 것이오. 기자 이후 본받을 만한 좋은 정치가 없었으니 이것이 출사하여 도를 행한 자가 없었다는 증거지요 [또한] 우리나라 사람의 저술 가운데 의리義理에 밝은 것을 볼 수 없으니 이것은 물러나서 교화를 베푼 자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내가 망령되이 백 세 전의 사람들을 놓고 무고한 말을 할 까닭이 어디에 있겠소."
손님 ㅡ 오늘날에도 삼대의 정치가 과연 다시 구현될 수 있겠습니까?
주인 ㅡ 구현될 수 있고말고요.
손님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어찌 그리도 큰소리치십니까? [선생 말씀대로라면] 왕도 정치가 실행되지 않은 것이 한漢나라 때부터입니다. 하물며 지금 우리는 한나라 사람들보다도 훨씬 후대의 세상 아닙니까 우리나라는 기자 이후로는 다시는 선정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요즈음의 풍속으로 말하면 전조前朝[고려 왕조]보다도 못하지 않습니까 만일 소강少康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면 몰라도 왕도정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처사가 큰소리치는 것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주인이 안타까운 모습으로 말했다.
"안타깝습니다. 우리 선생의 말이! 사마駟馬[네 마리 말 : 빠른 말]가 이끄는 수레도 선생의 주장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오. 선생의 말씀대로라면 천하는 필시 귀신 천지나 도깨비 천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오.
[이 땅에서] 왕도정치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은 단지 군주와 재상이 적임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먼 후대의 세상이기 때문에 회복되지 못하는 것이겠소. 군주다운 군주가 있고 재상다운 재상이 있을 때 왕도정치는 회복될 수 있소 정자께서는 '사람이 없는 것이지 때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어떤 일을 하면 반드시 그 공이 있는 법이니 '일을 했는데도 공이 없다'는 말은 고금을 통해 듣지 못했소. 또 선생이 '요즈음의 풍속이 전 왕조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결코 그렇지 않소. 고려 왕조의 풍속은 오랑캐 풍습을 면하지 못했으나 우리 조정[조선]에는 예禮로써 백성을 인도하는 자못 아름다운 풍속이 있소 상사喪事에 가례家禮를 쓰는 것, 일부일처제 등이 그것이오. 어찌 이전 왕조보다 못하다고 하시오?
즉 우리나라는 기자 이후에 본받을 만한 좋은 정치도 없고 천 년 동안 제대로 된 정치가도 없다는 것,
그렇다보니 그와 같이 규정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매우 냉랭하고 부정적이다.
그런 속에서 과거 우리나라 인물들이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혹시라도 이이는 많은 것들을 말하고 싶었으나 단지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러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석해보고자 한다면 오산일 것이다. <<동호문답>>을 한번이라도 훓어본다면 이이가 말하는 논의들의 전제와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글의 구절구절마다 매우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허나 중국과 관련해서 논하게 될 경우 태도는 전혀 달라진다.
제대로 언급도 안 되고 관심도 없어보이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짤막하고 건조한 기술과는 달리
<<동호문답>>에서 이이는 상고시대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물들과 사정들에 대해 물 흐르듯이 풀어내면서 중국사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지식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성군·성현들이 바로 우리의 기준이요 전범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바탕으로 거기에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모든 것이 있다는 듯이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부분들을 추가로 살펴보면, 구구절절 자세하고도 친절하게 설명해놓은 글 속에 이이가 갖고있던 그와 같은 생각의 일단이 잘 녹아 있다.
우리가 준거해야 할 것 혹은 경계하고 삼가해야 할 등등의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 있고, 조선은 그들을 등대삼아 나아가야 한다.
동호東湖의 손님이 주인에게 물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없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치세가 되고 어떻게 하면 난세가 됩니까?"
주인 ㅡ 치세도 두 경우가 있고, 난세도 두 경우가 있소.
손님 ㅡ 무슨 말씀이신지요?
주인 ㅡ 군주[人君]의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여 뛰어난 영재들을 잘 임용할 수 있으면 치세가 될 것이고, 비록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모자란다 하더라도 현자를 임용할 수만 있으면 치세가 될 것이오. 바로 이것이 치세가 되는 두 가지 경우라오. 그러나 군주가 [재능과 지혜가 출중할지라도] 자신의 총명만을 믿고 신하들을 불신한다면 난세가 되지요. 또 군주가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간사한 자의 말만을 편중되게 믿어 [자신의] 귀와 눈을 가린다면 난세가 되지요. 바로 이것이 난세가 되는 두 가지 경우라오.
그런데 이 두 가지 치세는 다시 두 차원으로 나누어진다오
인의仁義의 도道를 몸소 실천하고, 남에게 차마 어쩌지 못하는 정치[不忍人之政 : 인정仁政]를 행함으로써 천리天理의 바름을 지극히 하는 것은 왕도정치[王道]이고,
인의의 이름만 빌리는 정치를 행하여 권모술수로 공리功利의 사익만 채우는 것은 패도정치[覇道]라오
나아가 두 가지 난세에는 세 차원이 있소
속으로는 많은 욕심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밖으로는 유혹에 빠져서 백성들의 힘을 모두 박탈하여 자기 일신만을 받들고 신하의 진실한 충고를 배척하면서 자기만 성스러운 체하다가 자멸하는 자[군주]는 폭군暴君의 경우이지요.
정치를 잘해보려는 뜻은 가지고 있으나 간사한 이를 분별하는 총명함이 없는 탓에 신뢰하는 자들이 어질지 못하고 등용한 관리들이 재주가 없어서 [나라를] 망치는 자는 혼군昏君의 경우이지요.
심지가 나약하여 뜻이 굳지 못하고, 우유부단하여 구습만 고식적으로 따르다가 나날이 쇠퇴하고 미약해지는 자는 용군庸君의 경우이지요.
손님 ㅡ 선생의 말씀대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옛사람 가운데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습니까?
주인 ㅡ 있지요.
옛날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은 총명하고 예지로운 자질을 소유하고서 천명天命을 받드는 군사君師가 되었는데 백성을 다스리심에 있어 쟁탈을 잠재우고 양민養民으로써 부유하고 번성하게 만든 후에 이륜彛倫[보편적인 윤리]으로 교육을 시행했지요. 바로 이분들이 이른바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여 왕도정치를 행한 군주들'이지요.
상商의 태갑太甲과 주周의 성왕成王은 자질이 오제·삼왕에 미치지 못했지요. 만약 성스러운 신하의 도움이 없었다면 법률과 제도가 전복된다 한들 누가 구제할 수 있었겠소. 그러나 태갑은 이윤伊尹에게 정사를 맡겼고, 성왕은 주공周公에게 정사를 맡김으로써 덕을 기르고 닦아 결국 대업을 계승했지요 바로 이분들이 이른바 '현자를 임용하여 왕도정치를 행한 분들'이지요.
진晉 문공文公은 한 차례의 전쟁으로 패업을 성취했고, 진의 도공悼公도 세 번 출정하여 초楚를 굴복시켰소 한漢 고조高祖는 5년 만에 황제의 대업을 성취했고, 문제文帝도 현묵玄默 정책으로 형조刑措를 이루었소 당唐 태종太宗도 패업을 결정지음으로써 태평을 이루었고, 송宋 태조太祖 또한 오계五季의 난세를 이어받았지만 혼란을 평정했소 이들 여러 군주들은 재능이 난세를 평정하기에 충분했고 지혜 또한 인재를 등용하기에 충분했지요. 다만 아쉬운 점은 선왕의 도를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회복하지 못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게는 했으나 교화를 이루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는 점이오. 따라서 바로 이들이 이른바 '재능과 지혜가 특출했지만 패도정치를 행한 군주들'이지요.
제齊 환공桓公의 경우는 음악 소리와 미녀들이 눈과 귀에서 떠날 줄 몰랐고, 한漢 소열昭烈은 전쟁을 치르느라 말안장 위에서 엉덩이 살이 여위었소. 만약 그들에게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비의 보좌가 없었다면 환공도 영군令君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소열 또한 한 치 땅조차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오 하지만 환공은 관중管仲을 등용했고, 소열은 제갈량諸葛亮을 등용할 줄 알았소 그랬기에 전자는 제후들을 규합하여 천하를 바로잡는 공을 성취했고, 후자는 한중漢中·서천西川을 점유하여 유씨劉氏 왕조의 천명을 지속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만 관중이 성현聖賢의 도를 알지 못했기에 그 자취가 신불해申不害나 한비자韓非子 같은 풍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공적 또한 그쯤에서 그쳤을 뿐이오 바로 이들이 이른바 '현명한 이를 임용하여 패도정치를 행한 이들'이오.
손님 ㅡ 난세에 이른 군주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주인 ㅡ 하夏의 걸桀, 상의 주紂, 주의 여왕厲王, 수隋의 양제煬帝 등은 모두 재능이 없었던 것이 아니나 좋지 못한데 사용하고 지혜가 없었던 것이 아니나 간언을 기각시키는데만 사용하면서 독부獨夫의 위엄을 세우느라 온 나라 백성들의 힘을 모두 탕진하여, 하늘이 노하고 백성들이 원망하여 마침내 천하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했소 이 사람들이 바로 '자기의 총명만을 믿은 폭군들'이지요.
진秦의 이세二世는 간사한 조고趙高를 믿다가 6국의 군대를 출동케 했고, 한漢의 환제桓帝는 환관의 참소를 믿고 천하의 현자들을 금고禁錮시켰소 이 두 군주는 현자를 등용하거나 간사한 이를 물리치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지혜가 부족한데다가 탐욕스럽고 잔혹하기까지 하여 간신들이 간사한 술책을 부리도록 내버려두었지요. 바로 이런 사람들이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만을 편애하여 믿은 폭군들'이오.
당의 덕종德宗은 의심과 시기심이 심해 인자와 현자들을 임용하지 않고 혼자서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많았소 자신의 총명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다가 위급해져서야 충언을 들었으며, 그러다가도 평안해지면 다시 곧은 선비를 멀리했기에 소인배들이 그 틈을 타고 유혹할 경우 쉽게 빠져들었소. 바로 이런 군주가 '자신의 총명함을 과신한 혼군'이지요.
송의 신종神宗은 유위정치[유위有爲 : 큰 대업을 이루는 정치]의 뜻을 크게 발하여 삼대三代[하·은·주]의 정치를 회복하고자 했소.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에게 빠져서 그의 말이라면 모두 따르고 그의 정책이라면 모두 채택하여 재리財利를 인의仁義로 알고, 형법전서를 <<시경詩經>>, <<서경書經>>으로 알았지요 [이런 까닭에] 사악한 이들이 뜻을 이뤄 날뛰는 반면 현자들은 자취를 감춰 백성들에게 그 해독이 미쳤고 전란의 조짐까지 야기했소. 바로 이런 사람들이 '혼군 가운데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에 빠진 자'들이오.
주의 난왕赧王, 당의 희종僖宗, 송의 영종寧宗 등은 무기력하고 나태하여 세월만 보내면서 한 가지 폐정도 개혁하지 못하고 한 가지 선책도 제출하지 못한 채 팔짱만 끼고 묵묵히 앉아서 나라가 망하기만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라오 바로 이들이 모두 '보잘것없는 용군'들이지요.
손님 ㅡ 선비[士]라면 이 세상에 태어나 경국제민[經濟]에 뜻을 두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뜻과 행동이 모두 한결같아야 할 텐데 어떤 이는 출사하여 겸선兼善하고 어떤 이는 물러나 자수自守하니 무슨 까닭입니까?
주인 ㅡ 선비라면 겸선이 본래의 목적이지요. 물러나 자수하는 것이 어찌 본심이겠소. 다만 때를 만나고 만나지 못해 그럴 뿐이지요.
출사하여 겸선하는 것에는 세 가지 품격이 있습니다.
스스로 도덕을 체득하여 추기급인推己及人 함으로써 당대 군주를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당대 백성을 요·순의 백성으로 만들며, 오로지 정도正道에 의해서만 군주를 섬기고 수신하는 자가 있습니다. 이를 '대신大臣'이라 하지요.
오직 나라만을 걱정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고 진심으로 군주를 섬기고 백성을 보호하며,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순조로운 때든 어려운 때든 가리지 않고 정성을 다해 사직을 편안하게 하는 자가 있소. 이를 '충신忠臣'이라 하지요.
어떤 자리를 맡으면 그 직분을 생각하고 임무를 맡으면 효과를 생각하여, 비록 인물의 그릇이 나라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하더라도 간사의 재주를 가져서 특정 직무를 감당할 만한 자가 있소. 이를 '간신幹臣'이라 하지요.
대신이 군주다운 군주를 만나면 삼대의 정치를 회복할 수 있고, 충신이 국사를 담당하면 적어도 위망의 화는 면할 수 있으며, 간신에게는 유사有司를 맡기는 것은 가능하지만 큰 임무를 맡겨서는 아니 되오.
물러가서 자수하는 데도 세 가지 품격이 있지요.
불세출의 보배 같은 재주를 품고 한 시대를 구제하는 포부를 온축蘊蓄하고서 도를 즐기며 궤 속의 구슬을 살 사람을 기다리는 자가 있소. '천민天民[하늘 백성]'이지요.
스스로 배움이 부족함을 헤아려 학문의 진전을 추구하고, 자신의 재질이 우수하지 못함을 알아서 재능의 향상을 추구하며, 수양하며 때를 기다리면서 경솔하게 나서지 않는 자가 있습니다. '학자學者'지요.
고결하고 청개淸介하여 천하의 일을 탐탁지 않게 여기면서 초연하게 숨어서 세상사를 잊고 사는 자가 있습니다. '은자隱者'지요.
천민이 때를 만나면 천하의 모든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게 되지요 학자와 같은 이는 좋은 시절을 만나더라도 스스로 도에 대해 진실로 확신하지 못하면 가볍게 출사하지 않는다오 은자는 은둔에만 치우쳐 있으니 '시중時中의 도'가 아니지요
손님 ㅡ 선생께서 말씀하신 유형의 선비들 가운데 실제로 옛날에 그것을 추구했거나 실천한 사람이 있습니까?
주인 ㅡ 있지요.
고요皐陶·기虁·직稷·설契 등이 요[唐]·순[虞]을 보좌했고, 중훼仲虺·주공周公·소공召公 등이 상나라 군주와 주나라 군주를 보좌했지요. 이분들이 이른바 '대신'들이오.
영무자寗武子는 군주를 구제했고, 제갈량은 역적을 토벌했으며, 적인걸狄仁傑은 반정反正을 했고, 사마광司馬光은 폐정을 개혁했소. 이분들이 이른바 '충신'이지요.
조과趙過는 농정에 유능했고, 유안劉晏은 이재에 밝았으며, 조충국趙充國은 이민족을 방어하는 데 유능했고, 유이劉彛는 수리 사업에 유능했소. 이들이 이른바 '간신'이지요.
이윤이 유신有莘에서 밭갈이를 하고, 부열傅說이 부암傅巖에서 막노동을 하며, 강태공이 위수渭水에서 낚시를 할 적에는 이 세 사람 모두 세상에 뜻이 없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군聖君을 만나자 큰 공덕을 쌓았습니다. 이분들이 바로 '천민天民'으로서 그 도를 행한 분들이니, '천민의 도'가 바로 '대신大臣의 도'입니다
주렴계周濂溪는 남강南康에서 노닐었고, 정명도程明道는 하남河南에서 말직만을 맡았으며, 정이천程伊川은 부릉涪陵에서 귀양살이를 했고, 소강절邵康節은 낙양洛陽에서 가난하게 살았으며, 장횡거張橫渠는 관내關內에서 <<예기禮記>>를 강의했고, 주회암朱晦菴은 민중閩中에서 사관祀官을 지냈다오 이 몇몇 사람은 탁월하게 큰 도와 덕을 품고 있었으나 때를 만나지 못했소. 이분들이 '천민으로서 도를 행하지 못한 분들'이지요.
신문晨門이 문지기 노릇을 한 것, 접여接輿가 거짓으로 미친 척한 것,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 밭갈이를 한 것은 모두 과감하게 세상을 잊은 경우지요. 이들이 이른바 '은자'들이라오. 부자夫子[공자]께서 새나 짐승과 함께 사는 것을 탄식하신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지적한 것이오.
[그러나 은자들과 달리] 학자가 벼슬하지 않는 것은 시대가 마땅치 못해서가 아니요, 은둔 생활을 숭상해서도 아니라오 도에 대한 배움이 부족함에도 먼저 일부터 행한다면 그것은 유능한 목수 대신 서투른 솜씨의 목수가 나무를 자르는 식이어서 손을 다치기 쉬운 법과 같은 것이오. 빛을 감추고 수신하면서 연장을 익힘은 자벌레가 몸을 한 자 굽혔다가 나중에 더 크게 펴는 것과 같지요. 옛날 유자儒者들 가운데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다오. 선생이 굳이 그 이름을 듣고 싶다면 칠조개漆雕開 같은 사람이 대표적일 것이오
손님 ㅡ 충신이 군주를 섬기는 경우에는 도를 행하지 않는 일이 없었을 텐데 선생께서 정도正道에서 모자라거나 넘치는 일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니 어찌 된 것입니까?
주인 ㅡ 선생이 어찌 이른바 도道라는 것을 알겠소. 이 도라는 것은 이윤이나 강태공 수준이 아니면 들을 수 없는 것이니 어찌 충신이 감당할 바겠소 제갈량과 적인걸 같은 사람들은 비록 충성심 면에서는 해를 뚫을 만했고 사직 역시 그들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성현의 도를 기준으로 헤아려본다면 한 자를 굽혀서 한 길을 곧게 펴는 일을 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에 공리를 계산하고 탐하는 일이 많았던 것이지요 그러니 어찌 모자라거나 넘치는 일이 있다고 말하지 않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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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에 따른 내용 추가]
유학자 대부분 기자를 존숭하고 단군은 신화로 보거나 걍 최초의 군주 정도로 본 거 레알. 국사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데 중국사는 달달 욀 정도로 익힌 것도 레알...... 다만 이걸 지금의 민족주의 기준으로 깔 것까진 없는게 유학자들에게 삼대, 하은주의 정치문화철학은 유럽 지식인들에게 고대그리스로마급임. 독일 음악가나 영국 시인이 그리스로마 문화를 떠받드는 작품을 써도 민족의식이 없다고 욕을 먹는 일은 없었듯 하은주 삼대도 한국과 구별되는 중국역사라기보다는 참된 문명의 기원이자 모든 사상과 이념의 본향임.삼대 이후의 중국사를 꿰고 있는 것도 '어떻게 그 위대한 삼대의 땅에서 문명이 상실되고 야만이 창궐했는가'를 숙고하고 교훈으로 삼자는 거였지, 중국 거라면 걍 좋아서 그런 게 아님. 이이의 동호문답도 잘 읽어보면 신라 고려만이 아니라 한당명 등도 삼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에서 까고 있으며 '우리 조선도 제대로만 하면 삼대의 문명을 이룰 수 있다'는 장담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음.
왜 삼대만 죽자고 바라보았냐, 일본애들처럼 다방면에 관심을 넓혔어야지 할 수는 있지만 당시 유학자들을 썩어빠진 사대주의자-민족반역자 정도로 이해하면 곤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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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들에게는 '삼대, 하은주의 정치문화철학이 유럽 지식인들에게 고대 그리스로마급'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유학자들 내에서의 얘기일 뿐. 그것을 유학자들 이외의 모두로 범위를 넓혀서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은주를 그렇게 떠받들었다는 것인가? 고조선 사람들이? 고구려 사람들이? 백제 사람들이? 아니면 고려 사람들이?
그 숭배의 깊고도 질긴 뿌리는 다름 아닌 조선 유학자들에게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마치 고래로부터 우리 민족이 하은주를 동경하고 숭배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한다면, 그 자체로 심각한 왜곡이다. 우리가 고래로부터 그렇지 않았고 그런 전통도 없었던 까닭에 (중국에서 수입된 주자학을 신봉해 마지않는) 이이는 그것이 심히 못마땅해 전 왕조인 고려에 대해 '오랑캐'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독일 음악가나 영국 시인이 그리스로마 문화를 떠받드는 작품을 써도 문제가 안 된다면, 그것은 자국의 역사나 인물을 심각하게 비하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았을 때나 가능한 얘기일 뿐
우리는 천년동안 좋은 정치도 없었다 하고 같은 민족인 전 왕조에 대해 '오랑캐의 풍습을 가지고 있었던 야만적인 것들'로 치부하는 경우에 대해서까지 용인된다는 것이 아님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만약 그 잘난 독일 음악가나 영국 시인이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자국의 역사와 인물들을 (그것도 사실상 이전의 자신들 역사 모두를) 통째로 부정하는 식의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어 그리스로마를 칭송했다면, 과연 그래도 그들이 자국내에서 용납되고 그들의 주장이나 작품이 대다수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까?
혹 실제 역사에서 그런 자들이 용인되고 인정받는 경우가 있기라도 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들 국가나 민족이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고 봐야할 일이지 그들이 그러하니 우리도 괜찮지 않느냐 라고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거기에 더해 '국사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으면서 중국사는 달달 욀 정도로 익힌' 자들을 가리켜 '골수 사대주의자'라 할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과연 사대주의자라 불려야 할 사람들이 있기나 할 것인가?
처음부터 나라를 망치기 위해 작정하고 사대주의를 하는 자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도 다 자기들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고 논리가 있고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이 합리적이었으니 사대주의가 아니라는 식의 주장 또한 잘못된 것이다.
뒤에 와서 결과적으로 따져보니 그들이 합리적인 측면이 있었다 해서 사대주의였던 것이 사대주의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사대주의를 했든지 객관적으로 드러난 행동과 업적, 태도, 발언 등이 사대주의라 할 수 있다면 그 자는 사대주의자인 것이지, 좋은 뜻을 품고 민족을 위해서 한 일인데 왜 사대주의자라 하느냐고 따진다면 곤란한 일이다.
'이이의 동호문답도 잘 읽어보면 신라 고려만이 아니라 한당명 등도 삼대에 미치지 못하다는 점에서 까고 있으며 '우리 조선도 제대로만 한다면 삼대의 문명을 이룰 수 있다'는 장담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기본적으로 맞다. 이이는 분명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그들을 잘 본받아서 따라한다면 우리가 발전할 것이라고 믿었다 해서 사대주의가 아닌 것이 아닌 것이다.
양자는 모순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를 하면서도 발전할 수 있고, 자주독립을 외치면서도 퇴보할 수 있다. 때문에 그들이 취한 사상이나 철학, 노선 덕분에 나라가 발전하거나 융성할 것이라고 믿었는지 여부는 사대주의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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