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원태, 저녁 일곱 시
제 겨드랑이를 지나간 바람이나
이마 위로 흘러간 구름들을 생각하느라
골똘하고 고요하다
나도 하루 종일
어떤 생각이란 것에 매달린 셈이다
한동안 뜨겁게 나를 지나간
끝내 내 것 아니었던 사랑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그리 많지 않다
이 푸른 저녁 공기는
어떤 위안의 말도 전해 준 바 없지만
나는 이미 충분히 위로 받은 것이다
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흰 죽지 새의
쭉, 경련하듯 뻗은 다리의 헛된 결기를 보면 안다
이제 저녁 일곱 시
하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벌겋게 타오르던 노을이
쇠잔해져 어둠에 사그라지는 것만 봐도 안다
마지막 네 눈빛이 그러하였다

최영철, 대숲 아래
너는 푸르고 나는 시드네
그늘 아래 시들어 너만 청청하다면
너는 곧고 나는 휘네
내 죽도록 등이 휘어
너 홀로 솟구친다면
나는 낮추네 더
너만 푸르지 마라
너 푸르면 세상 다 묽다
너만 곧지 마라
혼자 곧으면 세상 다 휠라
너만 솟지 마라
홀로 솟으면
세상 사람 하늘 안 보일라

강현자, 봄
산에서
꽃을 캐왔다
이듬해
봄
그 산이
꽃을 데리러 왔다

심재휘, 백일홍
창가의 화분에 꽃을 피운
백일홍 한 송이가 저물고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면
유리창에 어깨를 한없이 기댄 꽃
석 달 열흘 기한으로 붉은 꽃
가을볕에 말라가며 이제
제 빛을 물리고 있다
나는 쓰고 있던 긴 편지를 버린다
소리 없이 마르는 꽃 한 송이로
그대를 묻는 나의 안부여
오늘은 시계 소리가 창 안에서 유독 맑고
서성이는 그림자 하나 산그늘에 들듯
겹겹으로 외롭던 목숨 하나가
끝끝내 희미해지고 있다
지지도 못하고 서서 마르는 백일홍 저는
되돌려 받을 길 없는 마음들을
지금도 멀리 떠나보내고 있는 꽃

이근배, 연가
바다를 주고
산을 아는 이에게
산을 모두 주는
사랑의 끝 끝에 서서
나를 마저 주고 싶다
나무면 나무
풀이면 풀
돌이면 돌
내 마음 가 닿으면
괜한 슬픔이 일어
어느 새 나를 비우고
그것들과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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