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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9년 전 (2016/9/01) 게시물이에요

한국군 특수위안대 : 한국전쟁 제5종 보급품은 '여자'였다 | 인스티즈

한국군도 '위안부' 운용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67241


한국군 특수위안대 : 한국전쟁 제5종 보급품은 '여자'였다

http://www.ddanzi.com/ddanziNews/115044941



이 엄청난 사실은 <아사히신문>과 <오마이뉴스>(링크)에 동시에 보도됐다. 국내 주요 일간지와 뉴스에서도 이 충격을 다뤘다. 하지만 이 사실은 곧 묻혀 버리고 만다. 누구나 열람이 가능했던 <후방전사>는 외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졌고, 김귀옥 교수는 윗선으로부터 입김을 받은 대학 당국으로부터 ‘조심해 달라’는 경고를 받았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당신의 연구 성과는 인정하지만 굳이 민족의 수치를 이렇게 드러내야 겠느냐’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한국군 특수위안대 : 한국전쟁 제5종 보급품은 '여자'였다 | 인스티즈


 첫째, 한국군에게 위안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심각한 사실을 한국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특수위안대의 존재가 문제가 되리라 보았다면 공식 자료인 <후방전사>에 그리도 떳떳하게 군 위안부는 전선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의 후생을 위한 당연한 조치라 밝히지 않았을 것이며, ‘실적’ 통계까지 세세히 담지 않았을 터.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의 존재는 당연한 조치를 넘은 ‘필수적’인 요소로까지 인식되었다. 1952년. 당시2-300명 규모의 군위안부로는 전쟁을 통해 확대된 60만 명 군인의 수요를 충족시키기가 힘들어졌다. 게다가 1951년 7월 휴전회담을 시작한 이래 최전선에서 소강상태가 되자 군인들의 군기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배경에서 1952년 연말이 되면서 언론을 통해 위안소 시설을 확충하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둘째,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이다.


김희오는 자신의 중대에 ‘제5종 보급품’이 배정되어 왔던 이야기를 하며, “과거 일본군대 종군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으로 일부러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온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해방 이후 창설된 대한민국 육군 간부의 상당수는 일본군 계통과 만주군 계통 등으로 구성되었다. 바로 피지배인이었으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대리 전쟁인을 자청했던 그들.


일본군 출신은 대개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군 고위 계급을 차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미 군정 하에서 한국군은 형식적으로는 미국식으로 개편되었지만 군부는 친일파가 득세함으로써 한국군은 일제 군대 문화와 제도들을 사실상 답습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한국군 특별위안대 설치와 운영에 책임을 가진 육군본부 후생감(1951년 휼병감, 1954년 정병감으로 개칭)은 모두가 학병 혹은 일본육사 출신이었다. 그 중 특별위안대를 설치한 조직인 휼병감실의 전신 후생감실은 박경원에 의해 설립되었다. 박경원은 식민지 시기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해방 직전 소위로 제대하였고,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중장으로 예편한 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4대에 걸쳐 내무장관을 포함하여 5번의 장관직을 역임했던 인물.


또한 한국군 특별위안대 설치 추정 시점인 1951년과 위안 실적을 통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운영된 시기인 1952년에 휼병감 직책을 맡았던 사람은 제3대 육군대령이었던 장석윤. 1892년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7기이며 1915년 일본육사를 졸업하였다. 1928년 소화일본천황 즉위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은 바 있고, 1938년 만주 국경감시대에서 대위로 복무하였다. 일제가 패전할 당시에는 만주국군 중좌(중령)였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군대에 입대, 한국전쟁 당시 제9 예비사단장과 교육총감부 참모장을 거쳐 1953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예편하기 전, 1951년 3월 1일부터 1952년 6월 19일까지 육군대령으로 육군본부 휼병감실을 맡은 인물이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청산되지 못한 잔재가 결국 이 사단을 냈다는 것. 


셋째, 그런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성폭력의 주범이 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민족을 흰 옷을 입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 철썩 믿으며 자랑스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보았던 조성모의 노래 ‘아시나요(2000)’의 뮤직비디오는 그래서 그저 비현실적이기만 했다. 노래만 따라 불렀고, 뮤직비디오는 드라마틱해서 재미있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1992), 공수창 감독의 <알포인트>(2004),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2008) 등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문화콘텐츠들이 계속적으로 생산되는 한편, 다큐멘터리를 통하여 베트남에 있는 전쟁희생자 추모비와 한국군에 대한 증오비에 대한 소식이 지속적으로 귓가에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흡수한 프로파간다는 떠날 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나라 만세만 외치고, 그런 좋은 나라에서 사는 멋진 나로 남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심이 프로파간다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나쁜 일본놈에게 당하기는 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나라에 나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일제 군대 문화와 제도들을 사실상 답습한 한국군이 위안부 제도를 이어받아 오히려 자기 식으로 발전시켜 운영해 온 경험을 비추어 보면, 비로소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한 대규모 성폭력의 배경이 이해가 된다. 실제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또 다시 위안대를 조성하여 베트남까지 데리고 가려고 했다고 한다. 이를 미국 측에서 거절했다는 것. 거절의 요지는 한국군이 받을 월급으로 충분히 여자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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