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전쟁(1792년-1802년) 이야기 연재물
1화 - 전쟁이 일어난 배경
2화 - 프랑스 혁명군은 어떤 군대인가?
1. 서론
프랑스 혁명군이란 프랑스 혁명 기간인 1792년에서 1802년까지 전쟁을 치루었던 프랑스의 군대를 뜻한다. 프랑스 혁명군의 특징은 혁명의 높은 열기로 무장했다는 점, 병력의 숫자는 굉장히 많지만 열악한 장비를 가지고 싸웠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프랑스 혁명군은 초기에 재앙적인 패배를 몇 번 경험하였으나 결국 외국의 군대를 프랑스 영토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며 인접 국가들로 진출하여 공화정 체제를 기반으로 한 프랑스의 위성국을 만들었다. 혁명 전쟁의 주요 장군으로는 장 밥티스트 주르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앙드레 마세나, 장 마리 모로 등이 있다.
2. 프랑스 혁명군의 형성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면서 프랑스의 구체제(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는 1789년에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고, 루이 16세가 국외로 도피하려다가 체포된 이후 1792년에 공화국이 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전체적인 틀도 혁명의 원칙인 "자유, 평등, 박애"에 따라 변형되었다. 혁명의 반동을 추구하던 다른 유럽 국가들은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특히 프랑스 공화국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해졌다.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프랑스에 대한 공동 전선을 펼치자는 내용의 '필니츠 선언'을 발표했고 프랑스도 이에 맞서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프랑스와 전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프랑스는 살아남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필요로 하였다.
프랑스의 퓨질리어 보병
구체제에서 장교 계급의 대부분은 귀족 계층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1789년에서 루이 16세를 처형시킨 1793년까지 수많은 장교들이 그들의 연대를 떠나 외국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1791년 9월 15일에서 12월 1일 사이에서만 2,160명의 장교들이 프랑스를 떠나 콩데 공작 루이 조제프가 지휘하는 '망명군'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망명을 떠나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공포정치 시기(1793년 9월~1794년 8월까지 로베스피에르가 공포정치를 시행하던 시기)에 투옥되거나 사형을 당했다. 나머지 살아남은 소수의 장교들은 신속히 승진되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군 장교들의 대다수가 망명한 왕당파(군주제를 옹호하는 세력)의 장교들보다 훨씬 어리다는 것을 의미했다. 남아있던 최상위 귀족 장교들 이를 테면 라파예트, 로샹보, 뤼크네는 곧 왕당파 세력을 옹호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처형되거나 국외로 추방당했다.
새로운 정권을 지켜내자는 목소리와 함께 혁명의 열기가 고조되면서 열정적이지만 훈련이 부족하고 규율이 잘 잡히지 않은 지원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그리하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재빨리 입대부터 하게되는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졌다. 프랑스 혁명군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군사 전략가이자 나중에 나폴레옹 정권의 전쟁 장관을 지내는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가 추진한 "부대 합병" 정책 때문이다. 그는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한 젊은 지원자들과 옛 왕조에서 복무하던 베테랑들을 같은 연대에 넣되 서로 다른 대대에 배속시켰다.
군의 변화는 장교단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혁명 이전에는 장교 중 90%가 귀족 계급이었으나 1794년이 되면 그 비율은 3%로 떨어졌다. 혁명의 열기는 강렬했고 공안위원회(1793년 4월~9월까지 로베스피에르가 최고 권력자로 군림하며 공포정치를 통해 혁명 추진을 이어나간 최고 통치 기구)에 의해 엄격한 감시를 받았다. 공안위원회는 대표들을 파견해 장군들을 감시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몇몇 장군들은 버림 받았으며 다른 장군들은 처형을 당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장군에게 충성하는 병사가 아니라 정부에 충성하는 병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3. 1791년의 규정
공식적으로, 혁명군은 '1791년 규정'에 따라 운용되고 있었다. 1791년 규정에서는 매우 잘 훈련된 병사와 장교, 하사관들이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몇가지 복잡한 작전 지침이 들어있다. 그러나 혁명군은 세 분야(잘 훈련된 병사, 장교, 하사관)에서 모두 부족하였고 이로 인해 '1791년 규정'대로 하고자 한 초기의 노력들은 모두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훈련이 부족한 군대로는 요구되는 복잡한 작전 지침을 전혀 수행할 수 없었고 부대 응집력을 잃어버려 패배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1791년 규정을 시행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지휘관들은 비교적 훈련량이 덜 요구되는 작전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사실 수십년전부터 프랑스의 많은 군사 사상가들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7년 전쟁(1756년~1763년 유럽 국가들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보여준 프랑스군의 형편 없는 전투력 때문에 자극을 받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질베르는 '일반 전술에 대한 실험'이란 논문을 썼고 부르세는 참모단의 규정과 산악에서의 전투에 주목했으며 메스닐-뒤랑은 일생동안 '깊은 진형'이라 불린 전술을 옹호하였다. '깊은 진형'이란 군대가 대규모 진형을 이뤄 전투를 치루고 화력 이상으로 총검에 의한 충격력을 강조하는 전술이다.
1770년대, 브로글리 공작과 같은 영리한 지휘관들은 이런 전술들을 시험했다. 마침내 새로운 전술들을 실험하기로 결정되었고 당시 유럽의 표준전술이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 1740~1786년)이 고안한 '얇은 진형'을 바탕으로 한 라인배틀을 자신들의 전술과 비교해보기로 하였다. 그리고 브로글리 공작은 '깊은 진형'이 포병과 대다수의 척후병들의 지원을 받을 때 효과가 제일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실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왕립 육군에서는 여전히 프로이센식 '얇은 진형'을 강력히 지지하여 채택하지 않았고 1791년 규정에서 드디어 표준 전술로 채택되었다.
4. 고난의 시기
프랑스 외무장관인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곧 참담한 실패로 끝났는데 허둥지둥 훈련을 받은 혁명군에게 복종심이 매우 부족했기 때문이다. 군대 내에서 전투를 회피하고자 장군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령관들의 명령을 따를지 투표에 붙이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혁명군은 무질서하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철수했다.
1792년 8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루이 16세의 권좌를 되찾아 주겠다는 약속대로 국경을 넘어 파리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혁명군의 일부 부대는 전문 직업군인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헤센-브라운슈바이크-프로이센의 부대들에게 쉽게 패배하였다. 그리고 이 사건 바로 이후에 혁명 세력이 튈르리 궁을 습격하여 왕을 전복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연이어 투입된 혁명군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진격을 막는데 실패하고 9월 중순이 되면 파리가 왕당파 세력에 의해 함락될것으로 보였다. 프랑스 정부는 남아있는 부대로 하여금 뒤무리에와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켈레르만의 부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1792년 9월 20일, 발미 전투에서 혁명군은 마침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선발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침략군은 국경지대까지 후퇴하기 시작했다. 발미 전투의 승리는 유럽 최강으로 여겨지던 프랑스 포병대의 공이 매우 컸다. 그리고 프랑스 포병대의 기술적 향상을 이끌어낸 인물이 바로 장 밥티스트 바게트 드 그리보발이었다.
발미 전투의 승리로 인해 혁명군은 이후 10년 동안 신생 프랑스 제1공화국을 보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을뿐만 아니라 모로, 주르당, 클레베르, 드제, 나폴레옹과 같은 장군들의 지휘하에 프랑스 공화국의 영토를 확장시켰다.
5. 라자르 카르노(Lazare Carnot)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 포병대가 퍼부은) 연속 포격은 바람앞의 등불 신세였던 공화국의 멸망을 막아내고 적의 진격을 멈추게 하였다. 그러나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프랑스가 혁명의 이념을 외국으로 전파시키겠다고 선언하자 이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프랑스의 적들은 반드시 공화국을 무너뜨려 프랑스를 왕정으로 복귀시키겠다는 결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1793년 초,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동맹국으로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뿐만 아니라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사르데냐, 나폴리까지 합세하였다. 프랑스는 국경의 여러 전선에서 공격을 받았고 설상가상으로 카톨릭 열성 지역인 방데에서 무장 반란이 터지기 시작했다. 이 당시 프랑스 혁명군은 자신들의 역량을 벗어날 정도로 지나치게 팽창되어 있었고 공화국의 운명은 또다시 미궁속으로 빠졌다.
이 때, 프랑스를 구원할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1793년 초, 저명한 수학자, 물리학자이자 국민공회 의원이었던 라자르 카르노는 공안위원회로 승진하였다. 조직을 갖추고 규율을 시행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선보인 라자르 카르노는 기강이 해이해진 혁명군을 재조직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아무리 많은 개혁을 시행해도 프랑스 혼자서 대프랑스 동맹의 숫적 우세를 메꿀 수는 없었기 때문에 1793년 2월 24일, 국민공회는 전국의 데파르트망(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 충청도 할 때의 도에 해당)에 일정 몫의 신병을 모집하여 총 30만명의 군대를 모으라는 칙령을 내렸다. 1793년 중순이 되자 프랑스 혁명군의 병력은 계획의 2배가 넘는 65만명에 이르렀다.
6. 국민개병제
1793년 8월 23일, 카르노의 주장대로 국민공회는 국민개병제를 시행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의 적들을 모두 프랑스 땅에서 몰아낼때까지 모든 프랑스인들은 영원히 군대를 위해 용역을 제공하라 젊은이들은 나가서 싸울 것이며 결혼한 자들은 무기를 만들고 식량을 운반하라. 여자들은 텐트와 군복을 만들고 병원에서 일하라. 어린이들은 린넨으로 린트를 만들고 노인들은 광장으로 가서 전사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왕에 대한 증오와 공화국의 통일을 설파하도록 하라."
18세 이상에서 25세 이하에 있는 모든 신체 건강한 미혼 남성들은 즉시 군복무를 하겠다고 보고해야 했다. 남은 남성들과 결혼한 사람들, 여성과 어린이는 군의 무기와 보급을 위해 일을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공화국이 보유한 병력의 규모는 급격히 증가 하여 적의 공격을 격퇴할 만한 인적 자원을 계속 전장으로 공급하였다. 1794년 9월이 되면 무장을 한 프랑스 혁명군의 규모가 150만명에 이르렀다. 카르노의 국민개병제로 인해 월등히 많은 인력 자원을 군대에 제공했기 때문에 1797년까지는 추가적인 징병이 필요없을 정도였다
7. 전술
1791년 규정의 실패를 지켜본 초기의 혁명군 지휘관들은 1770년대 브로글리 공작의 선례를 따라 혁명 이전에 나왔던 아이디어들을 실험하였다. 그리고 효과가 있는 시스템을 발견할때까지 점점 그 아이디어들에 적응해나갔다. 초기 혁명군에게 채택된 마지막 표준은 다음과 같다.
- 높은 사기와 뛰어난 기술을 보유한 부대는 척후병이 되어 부대 정면에 있는 엄폐물에 배치하였다. 그들의 주요 전술은 게릴라전이었다. 대규모의 척후병들은 말을 타거나 아니면 걸어서 가능한 적들로부터 눈에 띄지 않게 숨은 후, 불을 이용해 적진에다가 마구 뿌리거나 매복병들을 배치했다. 척후병들이 끊임없는 사격을 통해 괴롭히자 적 전선의 한 부분이 흔들렸고 이 틈을 타서 혁명군의 본대가 공격을 취했다.
- 덜 숙련되거나 능력이 조금 의심스러운 부대는 정규 군단의 인원을 보충하여 대대의 열을 형성했다. 대대의 열에서는 완벽한 수준의 훈련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고 척후병이 임무를 마친 후, 적 전선을 타격할 수 있는 'battering ram-style' 대형을 지휘관들에게 제공했다 'battering ram-style'이란 충차를 앞세워 성문을 부술 때, 병사들의 진형이 숫자 '1'의 모양을 이루어 돌격하여 충격력을 높이는 대형을 의미한다. 그리고 소규모 접전용 엄폐물은 척후병들을 위한 보호막을 제공해 주었다.
8. 보병
구체제가 붕괴된 이후 기존의 연대 시스템도 붕괴되었다. 대신에, 새로운 군대는 숫자로 이름을 붙인 '반(半)-여단(demi-brigade)'으로 이루어졌다. '반 여단'은 2~3개의 대대로 구성되었는데 이 편제를 새로 도입한 목적은 '연대'라는 용어가 과거 봉건 시대의 느낌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793년 중반, 혁명군은 공식적으로 총 196개의 반 보병여단으로 이루어졌다.
초기에 연방 지원병 대대가 실망스러운 전투력을 선보인 이후, 카르노는 반 여단의 하위 편제를 하나의 정규 대대와 2개의 연방 대대로 구성했다. 새로운 편제를 시도한 목적은 열정이 넘치는 신병들과 나이 많은 노병들의 규율과 훈련을 통합하기 위한 것으로 1792년 9월의 발미 전투에서 이 편제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어 1794년에 새로운 반 여단 편제가 보편적으로 채택되었다.
혁명군은 서로 다른 부대 단위들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으며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군복의 모습은 없었다. 구체제하에서부터 이어져 온 흰색 군복과 탈튼 투구를 착용한 경험 많은 병사들은 하얀 색깔의 턴백(소매를 러프하게 접어서 입는 패션 스타일)이 달린 블루 재킷을 착용한 지역 방위대와 그리고 빨간색 프리기아 모자와 삼색기 마크가 달려있는 평복을 입은 시민군과 함께 복무하였다. 보급이 빈약하다는 것은 닳아 헤진 군복을 평복으로 교체해 주는것을 의미하는데 그래서 혁명군은 군복의 통일성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모든 병사들이 달고 있는 삼색기 표시는 예외였다. 한편,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일부 반여단들이 특정 색깔을 갖춘 군복 자켓을 지급 받았으며 1798년 이집트 원정을 위해 편성된 프랑스 동방군도 보라색, 분홍색, 초록색, 빨간색, 오렌지색, 파란색 자켓으로 통일되었다.
군복 문제뿐만 아니라 무기와 탄약도 부족했다. 적군에게서 빼앗은 무기들은 그 즉시 병사들에게 지급되었다. 1796년, 몬테노테 전투에서 무장도 하지 못한채 전장으로 투입되었던 1천명의 프랑스 병사들에게 전투 직후 노획한 오스트리아군의 머스킷 소총을 지급한 것이 그 예이다. 이로 인해 무기에서도 통일성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정규 반여단 외에도, 경보병으로 이루어진 반여단도 있었다. 반 경보병 여단이라 불리는 이 부대는 뛰어난 사격술을 보여준 병사들로 구성되어 주력 부대의 앞에서 소규모 산병 접전을 치르는데 활용되었다. 그러나 반 전열보병여단처럼 반 경보병 여단도 무기와 장비의 통일성이 부족한건 마찬가지였다.
프랑스 혁명군 병사들
1798년-1801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전역을 수행한 병사들이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각각 장교, 보병, 군악대, 보병에 해당한다.
9. 포병
척후병들을 지원하는 것은 포병대의 몫이었다. 포병은 프랑스 혁명 초기, 귀족 장교들의 대규모 망명 사태로부터 피해를 가장 적게 받은 병과였다. 포병 장교는 주로 중산층 계급에서 선발되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같은 인물들 또한 포병 출신이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바로 이전 해인 1788년에 장 밥티스트 그리보발 장군에 의해 다양한 기술적 발전이 이루어졌고 뒤이어 바롱 뒤 테이유와 리에 장 뒤 테이유 형제의 노력으로 프랑스 포병은 유럽에서 가장 정교한 솜씨를 자랑하였다. 혁명군 포병대는 발미 전투, 방데미에르 13일의 전투, 로디 전투 등 공화국의 초기 승전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프랑스의 대포는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이어지는 나폴레옹 전쟁까지 전장에서 항상 적들을 압도했다.
10. 기병
기병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매우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대다수의 장교들이 귀족 태생이었으며 군주정의 막바지 시기에 혹은 이후에 있을 테러를 염려해 프랑스에서 탈출하였다. 탈출한 장교들은 콩데 공작이 이끄는 망명군에 합류하였다. 그리고 총 2개로 이루어진 연대(작센의 후사르 연대와 제 15기병대)가 오스트리아군으로 전향했다.
그러므로 혁명군 기병대가 훈련된 장교는 물론 말과 장비도 부족했다는 사실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혁명군 중에서 가장 무장과 장비가 열악했던 병과가 바로 기병이었다. 1793년 중반, 장부상으로는 20개의 중기병 연대, 2개의 헌병 연대, 20개의 용기병(=드라군) 연대, 18개의 샤세르 연대, 10개의 후사르 연대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류상 병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옛 왕립 육군의 모든 대대와 새로 모집한 지원병들을 모두 새로운 단위인 반 여단으로 통합시켜버린 보병과는 달리 기병은 프랑스 혁명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기간 내내 연대 단위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예로, 1651년에 탄생한 알자스의 샤세르 연대는 1791년에 '제 1 샤세르 연대'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그 밖의 다른 기병 연대들은 1815년 워털루 전투 이후 해체될 때까지 연대의 이름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후사르 기병, 전열 기병, 전열 보병
(다음편에서 계속)

인스티즈앱
현재 𝓙𝓸𝓷𝓷𝓪 짜친다는 대군부인 까르띠에 사태..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