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전쟁(1792년-1802년) 이야기 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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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 전쟁이 일어난 배경
2화 - 프랑스 혁명군은 어떤 군대인가?
3화 - 세계 최초로 하늘을 난 프랑스 항공 군단
4화 - 전쟁의 시작과 발미 전투
1. 전쟁으로의 돌입
1792년 4월 20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자 프로이센과 다른 나라들도 전쟁에 대비하여 오스트리아와 함께 대프랑스 동맹을 체결하였다. 즉, 프랑스는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동맹군과 맞부딪치게 된것이다. 그러나 이 긴박한 시기에 귀족들이 탈주를 하고 혁명으로 인해 나라가 동요하였으며 자금과 군수물자까지 부족해지자 군대는 붕괴되었다.
첫 교전에서 프랑스군의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1792년 4월 29일, 프랑스의 릴 근처에서 프랑스 병사들은 오스트리아군의 전초 기지를 보자 달아나면서 지휘관인 테오발 딜롱 장군을 반역죄로 기소하여 처형시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부대의 최고 사령관이 정치적 '혐의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치뤄지기도 전에 로샹보, 라파예트, 뤼크네가 지휘하는 3개의 군이 뒤무리에와 켈레르만이 지휘하는 2개의 군으로 재편되었다. 따라서 규율이 잘 잡혀있는 대프랑스 동맹국의 병사들이 이 전쟁은 나름대로 쉬운 싸움이 될거라고 예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라인강에서 프랑스 침략을 위해 프로이센-오스트리아-헤센-프랑스 망명부대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결성되었고 이들의 지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맡았다. 그리고 이들의 양옆에 더 작은 규모의 좌군과 우군을 배치하였다. 그래서 좌-우-중앙 총 3개의 군을 편성하였고 최고 사령관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맡았다. 남부 네덜란드에서 오스트리아군이 릴을 향해 포위를 하고 피에몬테에서도 전투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첫 단계는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가 선언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그 선언문에는 프랑스에 대한 매우 모욕적인 말이 담겨있었고 (선언문 발표) 이후, 1793-1794년의 "무장 국가"라는 표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신을 만들어냈으며 루이 16세의 운명을 확정지었다. 선언문은 원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조언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원래 프랑스 혁명의 헌법적인 측면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그런 엄청난 모험(프랑스 혁명을 가르킴)이 성공할 지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2.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침공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은 프랑스 왕당파 군대와 헤센군이 합류하면서 병력이 증강되었다. 여유롭게 준비를 마친 후에 1792년 8월 19일,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8월 23일, 연합군은 손쉽게 롱위를 점령하고 베르됭으로 천천히 진군하였다. 그곳은 롱위보다 훨씬 더 방어하기 불가능 해보이는 지역이었다. 베르됭을 수비하는 프랑스군 지휘관인 보르페르 대령은 절망감 속에 자결하였고 9월 2일, 도시는 항복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파리로 진군하기 시작하였고 곧 아르곤의 골짜기에 도착했다. 당시 뒤무리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할 목적으로 발랑시엔에 있는 그의 경험이 부족한 군대를 끊임 없는 소규모 교전을 통해 훈련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가 파리로 진격할 것을 우려하여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공격은 포기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는 신속하고 과감한 측면 행군을 시도함으로써 거의 프로이센 선발대의 시야에 있는것과 다름 없는 아르곤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연합군의 후방에서 파리로 가는 길을 차단하며 메츠에 있는 켈레르만을 호출하여 지원을 와달라고 했다. 켈레르만은 이동하되 매우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도착하기 이전에 방어선의 북쪽 부분은 이미 압력을 받고 있었다. 뒤무리에는 당황하지 않고 북쪽으로 가기 위해 아르곤에 있는 우익과 샬롱을 향해 뻗어있는 좌익을 통해 전선에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1792년 9월 19일, 생트-므느울에서 켈레르만은 뒤무리에와 합류했다.
이렇게 되자 연합군의 상황도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연합군은 파리까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지만 뒤무리에와 켈레르만의 군대가 연합군의 후방에서 보급선과 연락선을 차단했기 때문에 파리로 곧장 진격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날씨가 점점 나빠져 부대의 사기가 점점 약화되었고 질병이 창궐하여 사상자도 점점 증가하는 추세였다. 어쩔 수 없이 연합군도 프랑스군과의 전투에 임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의 가장 유명한 전투 중 하나인 발미 전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3. 발미 전투

발미의 위치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뒤무리에의 부대를 가로막기 위해 북쪽의 숲으로 향했다. 프로이센군의 기동 훈련이 마무리되던 순간, 켈레르만은 부대의 좌익을 전진시켜 생트-므느울과 발미 사이에 있는 경사 지대를 점령했다. 그는 지휘소를 한 낡은 풍차 건물 안에 설치하고 이른바 "발미의 연속 포격"이라고 알려진 포격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경험 많은 포수들을 그에 걸맞는 오르막길에 잘 배치해두었다. 마침내 프로이센군이 숲에서 나오자 양측의 장거리 포격전이 시작되었고 그리보발 체계(Gribeauval Gun System)를 도입한 프랑스 포병대가 더 우세함이 입증됬다. 프로이센의 보병들은 드넓은 지형에서 포격을 받아가며 전진하였고 프랑스와 프로이센 양측의 보병들이 서로를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양측의 사격전에서 프로이센군이 점점 흔들리자, 매우 중요한 순간이 도래했다. 켈레르만이 머리 위로 모자를 들고 '프랑스 만세!(Vive la Nation!)'를 외치자 모든 프랑스 병사들도 똑같이 '만세'와 엄청난 함성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함성 소리는 프로이센군의 사기에 치명적인 치명적인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의 병사들은 '라 마르세예즈'와 '사 이라(Ça Ira)'를 불렀고 환호성이 프랑스의 전선에 울려퍼졌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전투를 중단하고 퇴각을 명령했다. 프로이센의 병사들은 프랑스군의 진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위치에서 빙 돌면서 동쪽으로 재빨리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양측 군대의 규모는 엇비슷했다. 프랑스군은 3만 6천명의 병력에 40문의 대포, 연합군은 3만 4천명의 병력에 54문의 대포를 보유했다. 사상자도 프랑스군은 300명, 연합군은 200여명에 불과했다.
영국의 역사가인 토마스 칼라일은 그의 저서 '프랑스 혁명: 역사'에서 그 드라마틱한 장면을 '노아의 날에 내린 폭우'로 묘사했다. 길에는 진흙탕이 나뒹굴고, 안 익은 포도를 빼곤 먹을 것도 없고, '클레르몽의 암소'라는 이름을 가진 산에는 나무가 젖어 있어 모닥불도 부족했다. 연합군 사상자의 1/3은 질병때문에 죽었다.
전투가 끝나자 프랑스 인들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이 왜 철수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정답이 없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결합하여 그 원인을 설명한다.
-방어하기에 매우 수월한 프랑스군의 위치
-그리보발 체계를 도입한 프랑스 포병대의 강력한 포탄 사격
-시민병을 포함한 신속한 병력의 증원
-예상치 못한 프랑스 병사들의 사기 충천과 그로 인한 연합군 병사들의 낙담
-당시 러시아군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프로이센의 동부국경 방어에 대한 우려 발생
이러한 요소들이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으로 하여금 더 큰 손실이 발생하기 전에 철수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즉, 음모에 가까운 원인을 주장하는 의견들도 있다.
-루이 16세가 그 전투로 인해 자신의 목숨이 희생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전투를 피해달라고 남몰래 간청했다는 것
-부르봉 왕관에 딸려있는 보석으로 프로이센군에게 뇌물을 먹였다는것
실제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프랑스군 사령관직을 제안받은바 있는데 프랑스인 망명파들은 이를 두고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배신했다는 혐의를 씌우는 근거로 활용했다.
이런 비난에 가까운 근거들은 비록 근거가 없고 더 그럴듯한 설명들이 존재한다고는 하나, 초반에 공세적인 전략을 취했던 그가 정작 예상과는 다르게 결의가 단호하며 규율이 잘 잡힌 적들과 맞부딪치자 공세 전략을 계속 수행할 의지가 약해졌던것은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전투는 끝났고 프랑스군의 추격은 별다른 압력을 받지 않았으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는 비록 불명예스럽게 동쪽으로 후퇴했다고는 해도 어찌됬든 목숨을 부지하였다.
이 전투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사실 전술적으로는 서로 무승부에 가까웠으며 양측의 손실도 그렇게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그 이후의 파급효과 때문이다. 프랑스군은 내부의 정치적 혼란과 귀족들의 망명으로 전쟁 초반부터 계속 패배를 거듭하고 밀리고 있었으나,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프랑스 국민들은 엄청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던것이다. 반면에 식량 부족과 이질에 시달리던 연합군은 결국 라인강을 넘어 본국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사람 중에 그 유명한 괴테가 있었다. 괴테는 이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한 이후 다음의 기록을 남겼다.
실의에 빠진 나의 전우들이 내게 다가왔다. 내가 동료들에게 건낼 수 있는 위로라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지금 여기서부터 그리고 오늘 이 순간부터 세계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릴것이다. 나의 전우들이여, 너희들은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는 순간에 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로 그 날(1792년 9월 20일) '입법의회'에서 '국민공회'로 권력이 이양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인 1792년 9월 22일, 국민공회는 군주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했음을 선포하였다. 이 날부터 기존의 '부르봉 왕조'는 무너지고 '프랑스 제1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1826년 오라스 베르네 화가가 그린 발미 전투. 오른쪽과 가운데의 흰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혁명 이전부터 복무하던 직업군인 출신의 정규군이다. 반면에 왼쪽에 보이는 파란색 군복을 입은 병사들은 1791년 새로 지원한 시민병들이다.

샤르트르 공작(말을 안 타고 있는)과 그의 형제인 몽팡시에 공작(말에 올라탄)이 용기병(=드라군) 군복을 입고 발미 전투에 참전했다.

발미 전투의 영웅, 켈레르만의 조각상을 담은 오벨리스크 건물(발미 오벨리스크)

현대적으로 재건된 풍차 모형이 발미의 그 역사적인 장소에 세워져있다
[다음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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