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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 전 (2016/9/27) 게시물이에요



로마 전쟁사 이전편(링크)

1화 : 지연자,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2화 : 시라쿠사 정복자, 마르켈루스

3화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1편 - 카르타헤나 공성전

4화 :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2편 - 일리파 전투와 이베리아 반도 점령

5화 : 플라미니누스,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하다

6화 :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 팔랑크스를 격파한 사나이

7화 : 로마 - 셀레우코스 전쟁


부록 - 로마 전쟁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키워드 모음




1. 파르티아의 등장과 세력 팽창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BC 200년의 지중해 세계. 파르티아라는 작은 지역에서 시작한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왕조는 곧 셀레우코스를 공격하여 영토를 대부분 흡수하게 된다. 파르티아 지역의 이름을 따서 보통 국가명도 파르티아라고 불린다. 


  파르티아 왕국이나 혹은 왕조의 창시자인 아르사케스 1세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케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르사케스 1세는 파르니라는 부족의 족장이었다. 아르사케스 1세는 BC 3세기 중반 파르티아 지역에서 셀레우코스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 파르티아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는데, 이 파르티아라는 지역명이 곧 국가명이 되었다. 


  이후 파르티아는 셀레우코스와의 오랜 전쟁(BC 238-BC 129)을 벌여 승리하여 셀레우코스의 영토를 상당 부분 합병하는데 성공했다. 파르티아는 이제 서부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서부 영토 정복을 위한 파르티아의 모험은 미트리다테스 1세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미트리다테스 1세의 치세에 파르티아의 아르사케스 왕조는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한 미트리다테스 2세는 로마의 실권자인 술라와 동맹 협상을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동시에 파르티아의 세력은 급격히 팽창하였다. 코카서스 지방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이를 테면 아르메니아의 아르사케스 왕조, 이베리아의 아르사케스 왕조, 코카서스 알바니아의 아르사케스 왕조) 여러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BC 90년 이후에는 일시적으로 파르티아의 영향력이 내부의 불화로 인해 약화되었고 마찬가지로 로마 또한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감소했기 때문에 양국의 접촉은 잠시 중단되었다. 그러나 BC 69년에 루쿨루스가 아르메니아 남부를 공격하여 티그라네스 왕의 군대를 물리치자 다시 양국의 접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양국간의 조약이 체결되지는 않았다. 






2.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원정


  제1차 삼두정치(triumvirate)의 일원인 폼페이우스는 동방에서의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파르티아의 프라테스 3세(Phraates III)와 협상을 재개했다. 양국은 BC 66/65년에 아르메니아를 침공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곧 유프라테스강의 경계를 놓고 치열한 분쟁이 벌어졌다. 폼페이우스는 프라테스 3세에 대해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것이다. 대신에 코르두에네라는 작은 나라를 두고 티그라네스 왕과 프라테스 3세 사이에 중재안을 제시했다. 이로 인해 프라테스 3세는 서쪽의 오스로에네를 제외하고 메소포타미아의 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오스로에네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한편 BC 56년 3월과 4월에 걸쳐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는 루카에서 회담을 가졌다. 삼두정치의 약해진 동맹 관계를다시 한번 강화하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속주 총독 임기를 연장하기 위해 차후의 선거에서 영향력을 발휘해줄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공동으로 집정관에 당선되는데 도움을 주기로 했다. 호민관 트레보니우스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에게 총독 임기를 5년간 더 연장시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의해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속주를 통치할 수 있게 되었고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한 발판으로 시리아 속주를 통치하게 되었다.  


  로마의 악명높은 부자였던 크라수스의 당시 나이는 예순이었고 청력에 이상이 있었다. 크라수스의 전기를 작성한 플루타르코스는 크라수스 특유의 탐욕이 그를 전쟁으로 이끈 동기가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대 역사가인 에리히 그루엔은 크라수스 개인의 재산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전쟁 동기를 나라의 국고를 부유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현대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끝없는 크라수스의 탐욕과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업적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크라수스의 군사적 명성은 폼페이우스에 비할바가 못되었고 5년 후에는 카이사르마저 갈리아 전체를 정복하게 된다. 크라수스의 주요 성과란 BC 71년에 스파르타쿠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한것이 전부였다. BC 82년에 콜리네문(Gate) 전투에서 술라의 군대와 싸워 이기긴 했으나 크라수스가 그 전투의 최고 사령관은 아니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에게 편지를 써서 크라수스의 파르티아 침공 계획을 매우 지지했다. 이것은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의 원정을 상호 보완적인 성격이라고 본것이지 크라수스에 대한 경쟁 의식이 발로된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이유는 파르티아 원정이 비교적 손쉬운 원정이 될것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이전의 로마군은 동방에서 폰투스와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를 상대로 숫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항상 수월하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 때문에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또한 비교적 쉽게 이길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데, 그는 크라수스의 유능한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야심때문이라고 보았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카이사르의 부하로서 갈리아 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었다. 로마로 복귀했을 때 그는 매우 늠름한 군인이 되어 있었고 이제 정치적인 경력을 쌓을 코스가 필요했다. 그러나 일부 로마인들은 명분도 없는 이 전쟁에 반대하였다. 호민관 아테이우스 카피토는 격렬하게 반대 의사를 보였고 심지어는 크라수스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공공연하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주위의 반대와 안좋은 징조를 무릅쓰고 BC 55년 11월 14일 로마를 떠났다.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도 아버지를 따라 파르티아 원정에 참여하였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1천명의 갈리아 기병들을 대동했다.

  
  크라수스는 그 해 늦게 시리아에 도착했고 이윽고 막대한 재산을 동원해 군대를 모집했다. 그는 7개 군단과 3만 5천명의 중장보병, 4천명의 경보병과 4천명의 기병(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1천명의 갈리아 기병대를 포함)을 거느렸다. 그리고 현지 그리스 주민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아르메니아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가 이끄는 6천명의 기병대가 크라수스를 지원하기로 하였다. 크라수스는 곧 파르티아로 행군했다. 아르메니아의 아르타바스데스 2세는 크라수스에게 사막 지대를 피하고 대신 아르메니아를 경유하는 길을 택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추가 병력으로 1만 6천명의 기병과 3만명의 보병을 제공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크라수스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메소포타미아로 곧장 진격하여 그 지역의 대도시를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크라수스의 침략 소식을 들은 파르티아의 오로데스 2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자신의 군대는 로마의 편에 선 아르메니아를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계획했다. 오로데스 2세의 군대는 파르티아 병력의 대부분으로 주로 소규모의 기병을 동반한 궁병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나머지 9천명의 궁기병과 1천명의 카타프락트로 이루어진 1만의 군대를 수레나스 장군에게 주어 크라수스의 로마군을 정찰하고 견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오로데스 2세는 수레나스의 군대가 로마군에 비해 거의 1/4밖에 안되는 규모였기 때문에 그가 크라수스에게 승리할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단지 크라수스의 진군 속도를 늦춰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카르하이 전투 당시 파르티아의 영토. 초록색 원은 카르하이의 위치를 나타냄



  크라수스는 오스로에네의 부족장인 아리암네스로부터 길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그는 일전에 폼페이우스의 동방 원정에서도 폼페이우스에게 길 안내를 해준 경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아리암네스는 파르티아의 사주를 받은 상태였다. 아리암네스는 크라수스로 하여금 즉각적인 공격을 펼칠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파르티아군의 전력이 약화되어 혼란에 빠져있다는 거짓말을 하였다. 그리고 로마군을 사막 중에서도 가장 황량하고 물이 거의 없는 지역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크라수스에게 뜻밖의 소식이 도착했다. 아르타바스데스 2세로부터 파르티아의 주력 부대가 아르메니아에 도착했으니 지원을 와달라는 전갈을 받은것이다. 그럼에도 크라수스는 그냥 무시해버리고 메소포타미아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그리고 얼마 후 카르하이에서 수레나스의 부대와 마주쳤다. 







3. 카르하이 전투(BC 53년)


  파르티아군과 맞닥뜨린 크라수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부하 장교인 카시우스 롱기누스는 크라수스를 안심시키며 보병을 중앙에 기병을 양익에 배치하는 전통적인 로마식 부대 배치를 제안했다. 크라수스는 처음에는 롱기누스의 제안에 동의했으나 곧 마음이 바뀌어 공백 사각형 대열(사각형의 중앙을 완전히 비운 모양)로 부대를 재배치했다. 그리고 사각형의 각 측면에 12개의 대대를 배치하였다. 이 진형은 측면 공격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할 수 있지만 기동성이 심각하게 제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로마군은 계속 진격하여 하천에 도착했다. 크라수스의 부하들은 여기서 숙영지를 차리고 병사들에게 휴식 시간을 준 후 내일 아침에 공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들인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하루 빨리 전투를 치르고 싶은 열정이 가득하여 아버지에게 지금 즉시 파르티아군을 공격하자고 설득하였다. 그리고 크라수스는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파르티아군은 먼거리를 전진하여 로마군을 위협했다. 먼저, 속이 빈 드럼을 요란하게 쳐서 소음을 일으켰다. 이때문에 로마군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수레나스는 카타프락트에게 천으로 갑옷을 감싸게 하고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카타프락트가 로마군의 시야에 들어오자 카타프락트는 일제히 천을 벗어 던지고 반짝이는 갑옷을 드러냈다. 이 또한 로마군을 위협하기 위한 의도된 퍼포먼스였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오히려 그것이 가진 효과가 별로 없다는 사실에 오히려 깨달음을 얻었다. 수레나스의 원래 계획은 카타프락트를 동원한 강력한 돌격으로 로마군의 전선을 흩뜨리는 것이었는데, 그는 이것만으로 로마군을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라서 그는 궁기병 부대를 내보내 로마군의 공백 사각형 대열을 포위했다. 크라수스는 경보병대를 내보내 파르티아 궁기병을 몰아내려고 했으나 오히려 파르티아 궁기병의 화살 세례를 견디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잠시 후 파르티아 궁기병과 로마 군단병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로마 군단병은 큰 방패(스쿠툼)와 갑옷에 의해 보호를 받았으나 이것이 몸 전체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파르티아 궁기병들의 화살이 로마군의 방패를 꿰뚫고 사지에 명중했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노출된 팔다리에는 그렇게 심각한 타격이 가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든 로마군은 파르티아군을 근접전의 형태에 끌어들이기 위해 계속 전진했으나 파르티아의 궁기병들은 계속 뒤로 물러나면서 화살만 퍼부어댈 뿐이었다. 여기서 유명해진 파르티아군 특유의 사격 방식이 바로 '파르티안 샷'이다. 파르티아 궁기병의 무지막지한 화살 세례를 피하기 위해 로마군은 방패로 몸을 감싸는 테스투도 진형을 형성했지만 정신없는 난전 상황에서 테스투도는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파르티아의 카타프락트가 마침내 로마군의 약점을 이용해 강력한 기병 돌격을 감행했다. 그러자 로마군의 전선은 흔들렸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카타프락트를 격퇴하기 위해 테스투도 진형을 풀자 이번에는 다시 궁기병들이 와서 화살을 쏘아댔다. 


  정신없이 휘둘린 크라수스는 파르티아군의 화살이 떨어질때까지만 버티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레나스는 수천마리의 낙타를 동원해 지속적으로 궁기병에게 화살을 보급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크라수스는 최후의 방법으로 아들이 이끄는 1천 3백명의 갈리아 기병, 5백명의 궁병, 8개의 군단병 대대를 보내 파르티아의 궁기병을 물리치게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파르티아의 궁기병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후퇴하는 척하며 지속적으로 화살을 쏘았다. 오히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군대가 막대한 사상자만 내고 후퇴하였다. 그런데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의 부대가 크라수스의 본대와 완전히 분리되는것을 본 파르티아군은 카타프락트들을 정면으로 돌격시켰다. 그 사이에 궁기병대는 로마군이 퇴각하지 못하도록 꽉 붙잡아두고 있었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와 갈리아 기병대는 용감하게 싸웠으나 무기와 장비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근처의 언덕으로 허겁지겁 퇴각했다. 패배가 임박했음을 절실히 깨달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그자리에서 바로 자살하였고 남은 부하들은 모조리 파르티아군에 의해 도륙당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아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크라수스는 전군에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때,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병사의 창에 꽂힌 아들의 수급을 목격했다. 파르티아 궁기병들은 로마군을 둘러싼채 전방향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그 사이에 카타프락트 또한 돌격하여 로마군의 전열을 흔들어 놓았다. 파르티아군의 맹공은 해질녘이 될때까지 멈출줄을 모르고 계속되었다.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크라수스는 결국 수천명의 부상병을 뒤로 한채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고스란히 파르티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다음날, 수레나스는 로마 진영에 크라수스와의 협상을 제안하는 전갈을 보냈다. 그는 로마가 유프라테스강 동쪽의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로마군이 시리아에서 안전하게 후퇴할 것을 허락하는 휴전 조약을 제안했다. 수레나스는 로마군 진영에 사절단을 보내거나 스스로 평화 회담을 요청한다고 직접 가서 말했다. 반면, 크라수스는 끝까지 파르티아인들과의 직접 만남을 주저했다. 그러나 휘하의 부하들이 파르티아와의 회담에 응하지 않으면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그는 결국 파르티아인들과의 회담에 참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파르티아군의 미끼였다. 크라수스가 회담 장소에 도착하자 파르티아군은 크라수스와 휘하 장교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파르티아인들에게도 유명했던 크라수스의 탐욕을 조롱하려는 목적으로 파르티아인들은 크라수스의 목구멍에 녹인 금을 부었다. 카르하이에 남아있던 남은 로마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나 대부분 포로로 잡히거나 전사하였다. 카르하이 전투의 결과로 로마군은 약 2만명이 죽고 1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그에 비해 파르티아군의 사상자는 매우 적었다. 여러모로 로마 역사상 최대의 참패 중 하나로 기록될만한 사건이었다.


  파르티아군은 로마 군단의 상징인 독수리기를 노획하였고 크라수스의 얼굴을 닮은 병사를 찾아내 그에게 여자의 옷을 입게하고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파르티아를 행진하게 하였다. 오로데스 2세 또한 아르메니아군을 격파하고 아르메니아를 정복했다. 그러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레나스가 이룩한 엄청난 승리는 오로데스 2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결국에는 수레나스를 처형시켜 버렸다. 수레나스가 죽은 이후, 오로데스 2세는 파르티아의 모든 군대를 장악하고 시리아로의 반격을 꾀했으나 카시우스 롱기누스가 카르하이 패전의 혼란 속에서 간신히 수습한 1만명의 패잔병 부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카르하이 전투는 로마 군단이 파르티아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신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설은 오래 지나지 않아 깨졌다. 약 150년 뒤에 로마 오현제 중 한명인 트라야누스는 대군을 이끌고 파르티아를 공격하여 파르티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을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동방의 군대에서 최정예 부대로 활약한 카타프락트를 묘사한 그림. 이들은 현대의 전차와 같은 존재로 엄청난 돌격력과 충격력을 자랑했다. 로마군도 동방에서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카타프락트의 효용성을 절실히 깨달았고 자신들의 군대에도 도입하였다.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크라수스의 흉상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수레나스의 흉상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카르하이 전투 상상도 1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카르하이 전투 상상도 2

로마 전쟁사 : 로마 - 파르티아 전쟁편 (1) 카르하이 전투에서 대패한 로마군.JPG | 인스티즈

역사가들은 말을 달리는 와중에 허리를 꺾어 적군에게 화살을 쏘는 이 자세에 '파르티안 샷'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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