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 http://santa_croce.blog.me/220345871667
들어가는 말그 동안의 개인적 연구를 정리하면서 박정희의 경제정책(특히 중화학공업 육성)에 대한 글을 마지막으로 올려봅니다. 주요 참고자료는 The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지금은 피터슨 연구소), Edward M. Graham 박사의 The Miracle with a Dark Side: Korean Economic Development under Park Chung-hee와 도쿄대학 그레고리 노블교수가 집필한 Industrial Policy in Key Development Sectors: South Korea versus Japan and Taiwan, 장하준의 나쁜사마리아인들, Why nations fail 등 을 참조하였습니다. 또한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동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면서 다시 그 시대 경제발전논리에 대해 저술한 백낙청 교수의 How to Think about the Park Chung Hee Era도 참조하였습니다.
참조문헌을 이리저리 열거했지만 딱딱한 고증을 펼치기보다 제가 임의로 열거한 몇가지 질문에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대신하겠습니다.
1. 프레이저보고서 동영상(백년전쟁 박정희 편)대로 박정희는 경제개발에 기여한 것이 없는가?
앞으로 나올 동영상 2부에서 혹시 다룰지는 모르겠으나 동영상이 프레이저보고서에 입각하여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의미있게 반박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저의 2번째 글을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10046&sca=&sfl=mb_id%2C1&stx=santacroce
몇개의 관련 연구 글을 읽어 보면 박정희가 3차 경제개발계획을 미국과 일부 경제관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육성에 강조를 두어 추진한 것은 부인하기 어려워보입니다. 미국 시각에서 보면 아직 산업화 수준이 안되는데 종합제철소를 만들고 조선소와 자동차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은 완전 뻘짓으로 현실성이 없다고 봤으며 오히려 소비재산업과 기계산업 등 경공업에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을 합니다. 일부 경제기획원의 관료들도 경공업 육성으로 계획을 마련하였으나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강화로 변경했습니다.주1)주2)
제가 모든 자료를 보고 판단했다고 할 수는 없으나 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72-76)의 중화학공업(제철,조선,자동차 중심의) 육성은 박정희의 독단에 가까운 결정이 컸음은 부인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박정희 경제개발의 핵심을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본다면 이를 놓고 박정희를 배제하는 것(비록 수많은 노동자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지만)은 객관성을 인정받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동영상의 논리에서 암시하듯이 미국이 중화학공업 육성을 주도했다고 볼 근거(중화학공업을 육성하라고 압력을 행사하거나 군사원조를 중단한 사례 등)는 거의 없으며 장면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혹, 다른 근거가 있다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2. 왜, 중화학공업 육성인가?
우선 섬유산업과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이 박정희에게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우선 미국의 자국 섬유산업에 대한 보호주의가 60년대 중반이후 강해집니다. 1964년 미국에서는 자국 섬유산업(the textile and apparel sectors)에 대한 보호정책이 도입되었고 1968년 닉슨은 대선 캠페인에서 섬유산업에 대한 보다 강한 보호조치를 천명합니다. 게다가 1969년 닉슨독트린이후 미국의 대중국 유화정책이 시작되고 급기야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박정희는 중국이 산업화에 나서는 경우 저임금 노동집약적인 산업의 경쟁력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봤으며 또한 중화학공업으로 이전할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미 전후복구를 끝내고 공업국가 도약을 선언한 북한과의 경쟁관계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당시 남북한 및 국제정세가 급변하기는 했습니다.주3)
그리고 남미와 대만의 사례를 보면 다수의 개발도상국가들이 중화학공업을 기술수명주기가 길고 부가가치가 큰 산업으로 인식하고 뒤에서 추적해오는 후발주자를 따돌리기 위한 수단으로 중화학 공업의 육성에 애를 써온 것 같습니다. 문제는 실제 목표를 달성한 국가가 많지 않다는 것으로 그나마 한국과 대만 정도인 것 같습니다. 사실 대만도 IT가 아닌 제철, 기계, 자동차 등에서는 경쟁력 있는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또 다른 면은 참 불행한 역사인데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유신의 주요 명분이었다는 점입니다. 중화학공업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쉽이 필요하다는 것이 친위 쿠데타시 내걸었던 한 구호였습니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중화학공업의 육성과정을 보면 권력이 아주 강력하지 않고서는 이런 방식의 정책구현이 불가능해보이긴 합니다. 여러 독재정권 중에서 박정희가 유달리 경제성장을 핵심 아젠다로 내걸었다는 것도 특기할만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경제정책을 단지 측근에 이권을 나눠주는 것 이상으로 취급하지 않은 것과 대비됩니다. 하버드의 Vogel교수 주장처럼 아타튀르크, 리콴유, 덩샤오핑과 달리 집권과정의 정당성이 결여된 것이 이런 집착을 낳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쨌든 강력한 경쟁자로 북한의 존재와 집권명분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정당성에 대한 컴플렉스, 그리고 중국개방이 가시화 되면서 후발주자의 추격에 따른 부담감 등이 박정희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올인하게 만든 이유들로 추정합니다.
3. 중화학공업 육성은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유야 어쨌든 중화학공업으로 목표를 설정한다고 해서 모두 성공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브라질도 6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을 시도해 경제성장률도 좋았으나 지금까지 관련 산업기반이 남아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대만인데, 대만도 60년대 후반 20만톤 규모의 종합제철소 설립을 추진하지만 미국 원조당국의 반대에 부딪혀 진척을 못하다가 호주와 독일의 협력으로 China steel을 1971 12월 정부주도로 설립합니다. 물론 박태준에 해당하는 William Chao라는 인물에 전권을 부여하여 정부의 다른 간섭에서 자유롭게 해주는 것도 한국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자동차산업에도 대만내 여러 회사가 완성차업체로 뛰어들어 70년대말까지는 한국의 생산량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정도가 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대만의 제철소와 자동차 산업에 대해서 지금까지 변변하게 남아있는 것(China steel은 사기업으로 존재)이 없습니다.
대만과의 이같은 차이를 두고 도쿄대의 노블교수는 두 정부가 모두 일본식 정부주도 개발경제를 모방하였으나 박정희가 보다 강력한 정부주도의 드라이브를 건 것에 비해 대만의 장개석 정부는 일정 수준 이상(강제적 산업구조조정 등)의 개입을 꺼려했던 것이 큰 차별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는 두 나라가 모두 장기간 일본 식민지였으나 대만의 국민당정권은 대륙에서 넘어오다보니 일본식 관치경제에 익숙하지 않았고 박정희는 아주 익숙하게 또는 이를 더 발전시켜 적용했다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재벌의 탄생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정주영의 조선소건설이 단순한 사업구상에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박정희가 각 재벌에게 수출산업 또는 중화학공업을 맡으라하고 거의 강제로 떠맡기고 이에 따른 사업위험을 줄여주기 위해 매우 금리가 낮은 특혜적 대출을 이들에게 약속합니다. 이에따라 현대그룹의 조선소, 자동차 산업 진출이 시작된 것이고 대우그룹의 탄생과 도약(옥포조선소의 인수)도 이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포스코를 재벌에 맞기지 않은 점은 매우 이례적이고 놀라운 일이지만 재벌에 대한 총체적, 특혜적 지원(다른 말로 하면 자원의 집중배분)이 없었다면 중화학공업 육성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또한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은 사실 실패도 많았습니다. 과잉투자와 세계적 불황이 맞물리면서 여러 기업이 부실화(대표적으로 비철금속, 비료산업)되었는데 이때도 박정희는 직접 구조조정(원하지 않더라도 다른 재벌로 하여금 인수하게 하는 방식)을 지휘합니다. 이런 과잉투자와 구조조정은 결국 자원의 왜곡된 배분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금융을 통해 해결하는데 70년대 한국은 금융의 역할을 직접 대통령이 당근과 채찍을 휘두르면서 대신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표) 70년대 금리
년도 일반명목금리 수출기업 정책금리 시장금리 실질정책금리(인플레효과를 차감한 금리)
71 22 6 46.4 -6.9
72 15.5 6 37 -10.3
73 15.5 7 33.4 -5.1
74 15.5 9 40.6 -21.4
75 15.5 8 41.3 -15.6
76 18 8 40.5 -13.2
77 16 8 38.1 -8.6
78 19 9 39.3 -13.8
79 19 9 42.4 -10.6
80 20 15 44.9 -9
표를 보시면 시장의 실세금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정부의 관리를 받던 명목금리와 비교해도 수출기업이 빌리는 금리는 절반도 안돼는 수준입니다. 당시 높았던 인플레를 감안한 실질 정책금리는 -21%에 육박하기도 해서 이런 특혜에 기업들이 목을 맬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자원과 부를 몰아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70년대 한국 제조업의 이익의 상당부분(20~40%정도, 아래 표 참조)는 이런 특혜적 대출과 같은 정부보조금에 기인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한 때 동아시아 경제발달을 둘러싼 TFP 논쟁(노동과 자본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의 량)의 계기가 되기도합니다. 한국 제조업의 발전은 자본과 노동을 제거하고 보면 늘어난 것이 별로 없다라는 분석도 있습니다.(노동과 자본을 극단적으로 집중시켰기 때문에 경제발전이 있었던 것이지 이노베이션은 없었다는 주장)
* 아래 표는 중화학공업 육성시대에 제조업체에 대한 정부보조금(차별적 대출등) 규모와 제조업체의 이익을 비교한 것입니다. 표에 따르면 당시 기업의 이익 대부분은 정부의 보조금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박정희 중화학 공업 올인을 매우 긍정하는 측에서 바라보면 중국의 개방을 염두에 두면 60년대말부터 시작한 중화학공업 육성은 그 타이밍이 신의 한수이고 많은 국가가 실패한 것을 볼 때, 유신과 같은 강력한 독재가 아니었으면 저런 개발이 힘들었을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보입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일국의 부를 특정 세력에 몰아주는 정책이 과연 민주적 정부에서 가능했을 것이냐고 질문하면 답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운명을 특정인이 좌지우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했다고 하더라도 매우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이를 반복하기는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4.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성공했는가?
어떻게 보면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현재의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현대기아자동차, 포스코, 좀 더 멀리보면 삼성전자 등 한국의 주력 산업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도 언급했듯이 박정희는 국내자원과 부의 유일한 배분자가 되어 자원배분을 인위적으로 통제하였고 그 결과가 현재의 재벌체제입니다. 정부의 산업정책으로 특정 영역에서 독점을 인정받거나 정책집행(수출이나 고용)을 수행하는 명분으로 초저리(실제로는 마이너스 금리)의 정책자금을 마음껏 쓴다던지(따라서 부채비율이 당시 매우 높았습니다.) 또는 부실기업 정리를 명분으로 재벌의 무한확장이 가능했던 것도 박정희의 유업입니다.
역설적으로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은 이런 부의 편중으로 인한 극심한 불평등을 몰고와 경제가 조금이라도 안좋아지면(78-79년의 불경기와 원유가격 인상) 사회불만이 극대화되는 불안정성을 초래하였습니다. 거기에 산업단지에 밀집화된 근대적 노동계급이 탄생하게 됨에 따라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사회 곳곳의 저항에 부딛히게 되어 결국 자신의 몰락을 앞당겼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정책의 가장큰 수혜자는 재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 시대에 태동한 재벌의 부의 집중화와 선단경영은 극심한 모랄헤저드를 낳았고 비록 97년 외환위기 때 일부 댓가를 치르지만 아직도 우리사회를 억누르는 화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두고 완벽한 성공이라고 단정짓기는 그 질곡 또한 많아 보입니다.
또한 박정희가 주도한 일본식 개발경제는 한국을 일본의 뒤를 열심히 쫓아다니는 수제자로 만들었습니다. 최근에는 일부 분야에서 청출어람의 역전을 보여주고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일정 갭을 두고 따라가다 추격을 멈출 것이라는 시각도 많습니다. 아래 그래프는 한국과 일본의 일인당 소득을 비교한 것으로 25년의 격차로 양국의 경로가 겹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5. 과제는 착취형(extractive) 시스템의 단호한 절연과 포용적(inclusive) 시스템으로의 철저한 전환 여부. 주4)
박정희를 추종하든 혐오하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아직 우리 세상은 그가 만든 시스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는 박정희 경제체제의 유산입니다. 어떻게 보면 재벌은 민족의 맏형으로서 먼저 밥상도 받고 반찬도 제일 좋은 것을 독점적으로 먹으면서 대학을 다녔던 우리 앞 세대의 선택과 집중 전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책금리로 대표되는 특혜가 한 예입니다.
사실 지금도 우리는 이미 성공한 큰 형을 밀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고환율이 되어야 수출이 잘된다는 주장도 알고 보면 큰 형이 성공할때까지 너희들은 공장에서 휴식도 없이 일하고 보태야 한다는 맏형론의 하나가 아닌가 합니다.
2012년 아마존 베스트셀러였던 Why nations fail 이라는 책을 보면 국가의 흥망을 인센티브 구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성공은 막스베버의 자본주의적 직업윤리나 앵글로 색슨족의 문화적 차이도 또는 열대냐 온대냐 하는 날씨도 다이아몬드 교수가 이야기한 자연환경들도, 또는 우수한 경제관료나 정책의 존재여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수의 수고를 댓가로 소수가 부를 향유하는 착취형 시스템이 있는 사회에서는 사회 전체 부를 증가시킬 유인이 없으며 또는 소련이나 50-60년대 북한처럼 노동과 자본의 투입으로 생산성을 높여도 지속적일 수 없다는 것이 책의 결론입니다. 한국을 착취형 구조의 전형이라고 할 수는 결단코 없으나 아직 제도적으로 공동체와 구성원의 이해를 담보하는 포용적 시스템(사법적, 정치적, 경제적 제도)이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장하준 교수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범한 지적들은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크지만 한편 유치산업의 보호와 보조금 정책이 어디까지 지속될 수 있는지 생각하면 인위적 자원배분은 착취형 시스템에 가까우며 따라서 그런 정책의 한계 또한 명백하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맏형론이나 인위적 경기부양, 정책금융의 지나친 확대는 이 사회에 남아 있는 착취형 구조의 편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총체적 시스템으로 전환되지 않는다면 설사 중위소득 함정에서 벗어났을지는 모르지만 일본의 뒤를 힘없이 쫓다 지치거나 공동체 구성원의 불만이 시스템을 위협하는 수준으로까지 커질 것입니다.
두서없는 글이었지만 그동안의 글들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1) 원문(IIE Graham 박사의 글)에는 But in 1973, President Park, acting under martial law, announced the Heavy and Chemical Industry Declaration; this marked the official launch of the HCI drive, which
shifted priorites still further toward heavy and chemical industries. This declaration was apparently made by Park without consulting the EPB, and it thus marks a takeover of economic as well as political
policy by Park.
주2) 호주국립대 허치크로프트 교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American advisors argued against excessive investment in heavy and chemical industries, but Park and his advisors developed their own game plan as they pushed for goals that the Americans considered wildly ambitious.
주3) 군사적으로는 68년 1월부터 국내외 정세가 급변합니다. 1월말에는 불과 10일 사이에 국내와 국제적으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3가지나 연이어 터집니다.
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31명의 북한무장군인이 청와대를 폭파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러 청와대 앞 300m까지 침투했다가 가까스로 퇴격되었습니다.
68년 1월23일, 김신조 사건 이틀후 미 해군 정보선 푸에블로호가 동해서 북한군에 의해 무력으로 납치됩니다. 원산 앞 바다에서 북한군의 초계정 4척과 미그기 위협으로 끌려갔는데 이 와중에 미군 병사 한명도 살해되었습니다.
68년 1월31일, 베트남 구정대공세는 비록 외국일이지만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 미국이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와중에 구정공세가 이어지자 미국의 패권이 흔들리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즉 실제적으로 안보공약이 무력화되는 것 아니냐는 불신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68년 10월부터 울진삼척지구에 무장공비가 연달아 출현했습니다. 이어서 미군의 베트남 철수가 이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닉슨독트린으로 아시아에서 발생하는 분쟁에 대해 더이상 미군의 개입은 어렵다는 메시지가 박정희에게는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 옵니다. 실제 베트남 철수가 진행되고 미군철수 위협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주4) Extractive와 inclusive의 문자적 번역은 압착 또는 추출적과 자족적 정도로 번역이 되지만 원 문헌의 뜻을 보면 착취형과 포용적 정도로 의역을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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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단원고 희생자의 아버지, 아들 곁으로 떠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