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지나간다.
나이를 한살 한살 먹어갈수록 부담감이 겹겹이 쌓여간다.
우리는 신분차이가 너무 크다. 한나는 일국의 공주고 나는 궁녀다.
어차피 우리가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언젠가 궁에서 퇴출당할 것이고 한나는 귀족과 결혼할 것이다.
아무리 한나가 궁에서 막무가내라고 소문이 났지만 어리기 때문에 치기로 봐준 것이지
혼기가 찬 한나를 더 이상 봐줄 리도 없다.
"이별이요?"
"이별이다…. 너도 혼기가 찼고 이제 어린애 같은 장난도
그만이다."
운명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간다.
한나가 공주인 것을 모르고 언니 동생 하던 사이일 때부터
공주로 입궁하여 나한테 고백할 때까지. 모든 순간들이 일축으로 나란하다.
"또 누군가 를 하였지요? 아니되어요."
"그런 게 아니야. 우리가 어찌 더 같은 시간을 밟아가겠니…."
한나도 상황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고 한 나라의 왕족이 독신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함께할 수 있다면, 그 땐 재회여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별은 결국 핑계다. 내 마음이 지쳤고 권태가 왔다. 지나가는 권태라기엔 내가 너무 힘들었다.
나는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을 말하는 한나의 기대를 져버릴 수는 없었다.
"함께할 수 있다면…재회지."
"…호위무사 한 명을 붙여드릴게요, 함께할 수 있을 때까지."
한나의 목소리에 눈물이 가득하다.
윤아야
하는 목소리와 함께 병풍 뒤에서 한 여자가 튀어나온다.
복면을 쓴 여자가 나를 바라본다.
윤아는 첫인상과는 매우 달랐다.
"윤아씨, 윤아야, 윤아님 뭐라 불러야하나요?"
"편하게 윤아라고 불러주십시오. 공주마마께서도 저를 그리 부르십니다."
처음에 낯을 가리는 나와 달리 장난기가 많아서 금방 사람을 풀어지게 했다.
우리는 금방 친해졌고 편해졌다.
한나는 어쩌다 궁에서 마주쳐도 냉랭한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차라리 째려보거나 괴롭혔다면 나는 마음 편하게 웃어주었을텐데 눈길 하나 주지 않는 것이 더 마음이 아프다.
마음도 여린 애가 얼마나 독하게 마음을 먹고 나를 쳐다보지 않을 것인지.
보는 눈, 듣는 귀가 많은 궁이라서 제 방에서도 최대한 숨 죽여 울 것이다.
그런 날마다 나는 궁중 업무가 끝난 뒤 남몰래 울음이 터지곤 했다.
내가 나쁜 사람은 맞다.
미련이 남아있는지 아니면 미안함 때문인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새벽이 되면 울음이 간간히 터지곤 마는 것이다.
날마다 편차가 있지만 오늘은 왜 이렇게 서러운지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마음껏 우세요, 지금 아니면 언제 운답니까."
평소에는 부르기 전에 나오지 않던 윤아가 어느새 나와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울어도 윤아는 옆에서 얌전히 기다려주었다.
그 날 이후로 내가 울 때마다 아무 말 없이 옆에 함께 있어주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는데 차츰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어간다.
그 때부터였나 윤아가 내 마음 속에 스며들었다.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나가야합니다."
"궁녀가 어찌 나간단 말이야. 들키면 어찌하려고!"
"권력 남용이지요, 주군께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게 윤아 손에 이끌려서 도착한 곳은 시장이었다. 그러고보니 궁에 들어오고 나서 몇 년만에 바깥 공기를 쐬는 건지 모르겠다.
이것도 먹어보고, 저 노리개도 한번 달아보고 갓도 한번씩 써본다.
"이 갓 네게 잘 어울릴 것 같다."
"잘 어울립니까?"
"응 이건 꼭 구매하자."
제 물건 하나 없는 윤아를 보니 안쓰러워 꼭 사주고싶었다.
서로 재밌게 노닐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진다.
궁으로 들어가기 아쉬운데 생각해보니 단 한번도 윤아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윤아야 네 얼굴이 보고싶어."
"제 얼굴이요? 쉽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내 오늘 갓도 사주고 같이 외출도 해주는데 이러기냐."
"좋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그만 할 때까지 안마를 해주십시오."
"그래! 내 팔이 떨어지도록 해주마."
"멈추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그대는 저를 몇 달밖에 보지 않으셨지만 저는 사년 전부터 사모해왔습니다."
윤아의 목소리가 나른하다.
언제나 힘이 들어가있던 윤아의 목소리에 힘이 푹 빠져있다.
반면 내 마음은 팽팽해진다.
"더 함께할 수 있으면 좋을 터인데…. 내일이면 새로운 태양이 뜹니다. 저와 그대의 시간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마음 같아선 당장 함께 도망가고 싶지만 그러면 들킬 터이고,"
"내일 가장 혼란한 시기에 함께 도망갑시다."
궁의 밤이 낮으로 바뀐 것처럼 온 천지가 불덩이다.
황제가 시해당했단다. 새로운 황제의 옹립만이 남아있었다.
혼란을 틈 타 문 밖으로 나왔을 때
"함께할 수 있다면 재회지요?"
한나가 서 있었다.
1. 강한나
2. 임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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