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종석
: 개인의 사정
모든 것이 괜찮은 사람이었다. 선하게 생긴 얼굴, 나보다 두 뼘에 약간 못 미치게 큰 키, 타고난 센스, 남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주머니 사정까지. 아마 지금까지 내가 만나 본 모든 사람을 통틀어 제일 완벽한 남자일 거라고, 이번에 놓치면 다시는 없을 사람이라는 친구들의 말에 나도 완벽하게 동의하고 있었다.
"ㅇㅇ아, 다음에 만날 땐 어디 가지? 나 오늘도 너무 행복하다."
"어..... 나 아무 데나 좋아. 대신 사람 적은 곳."
"내가 또 검색해서 연락해야겠네. 이번 주는 이제 힘들지? 다음 주에는 약속 있어?
내향적이고 개인적인 시간이 많이 필요한 나를 가장 많이 배려해 주는 사람.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한 나에게 오랜만에 찾아온 남자친구.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내 일상을 얘기하고 연락이 없는 시간 동안의 너에 대해 듣는 일도 참 좋았다. 만나기 전날부터 들떠 옷을 고르고 몇 시간 내내 거울 앞에서 다를 것 없는 화장을 고치고 또 고치고 하는 모든 과정들이 귀찮지가 않았고, 외진 곳에 있는 집에서 두 시간 거리의 데이트 장소로 나가는 그 길이 행복했다.
다만, 다만 이런 완벽한 상황 속에서도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건 왜였을까. 나를 생각해서 일주일에 단 한 번의 데이트만을 인내하는 종석이를 두고서도, 일상적인 관심을 불필요한 연락으로 생각하는 내 성향은 그마저도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동안 뭐 했어? 이번 주에는 한 번도 연락 안 했잖아. 솔직히 너무 보고 싶더라. 어휴, 비싸기는."
"나 아직도 너만 보면 설렌다. 자주 안 봐서 그런가, 너무 떨려."
두 계절을 만나는 동안 투정이라고 할 수도 없는 종석이의 말은 나를 찔리게 했다.
너에게 내 회복을 핑계로 연락을 하지 않는 동안 나는 집에 있었어. 바빠서 외출할 틈이 없었던 게 아니야. 그냥, 그냥 혼자 누워서 잘 때도 있었고 드라마도 잔뜩 봤어. 몇 번이나 봤던 예능 프로그램을 하길래 그냥 그것도 봤어. 휴대폰은 하루 종일 붙잡고 있었는데, 너랑 연락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 어떤 메뉴를 먹었는지, 씻고 있는지 공유하는 일들이 너무 피곤해. 너를 만나는 이 순간은 여전히 즐겁지만 집에 돌아가면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 별일이 없더라도.
차마 하지 못할 솔직한 말들이 매번 머릿속을 다 헤집어 놓을 때면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름답고 자랑할 만한 옷이지만 내 몸에는 왠지 불편한 옷을 입은 느낌과 똑 닮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오랜만에 봤는데."
"그냥. 아, 오늘도 왜 이렇게 피곤하지. 미안해."
"어쩐지... 가자, 역까지 데려다줄게."
생각의 혼란을 숨길 만큼 능숙한 성격은 못 되었기에 우리의 만남은 결국 뻔한 패턴이었다. 종석이가 찾아 온 한적한 데이트 코스를 걷고, 밥을 먹고, 카페에 잠시 앉아 있다가 네 얘기를 듣고, 금세 느껴지는 피곤함에 집으로 돌아가는 패턴. '나의 동네'라는 구역에 누구도 찾아오길 원하지 않아서 남자친구에게도 극구 사양했던 배웅. 평범한 연애를 하고 있는 척했지만 너무나도 일방적인 종석이의 양보와 배려로 이어지는 우리의 관계는 비정상적인 범주로 진입한 지 오래였다. 비록 모든 걸 다 이해하는 너는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끝을 맺어야만 했다.
"종석아."
"어디 아파? 아프다고 말도 안 했으면서. 아플 땐 연락이라도 해 줘."
'우리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 연애할 준비가 안 됐나 봐."
똑같은 하루를 보내고 마주 앉은 카페 테라스, 보통 같지 않은 이별 통보. 종석이는 내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원망도, 슬픔도, 예상했던 분노도 담지 않은 채 익숙한 정적을 잠시 만들어 냈다. 너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내가 힘들어. 너의 모든 것이 다 좋은데, 너랑 하는 연애는 나에게 좋지 않았나 봐. 하루라도 빨리 네가 더 어울리고 쾌활한 사람을 만나는 게 좋지 않을까. 마음속으로 모든 말의 순서를 정리하고, 넘치는 말을 꾹꾹 눌러 냈다.
"연애하는 것 같지가 않았어."
"그래도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서 매일 고백하려고 타이밍 재는 사람처럼 너랑 만났던 것 같아."
"상처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인데, 그래도 고마웠어."
미지근한 연애의 끝, 미지근한 이별.
너보다 모든 사소한 시간을 빼앗기기 싫어했던 내가, 모든 사랑을 담았던 너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에도 실연의 슬픔은 없이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못내 기쁜 내가 조금 원망스럽기도 해. 나, 사랑할 수 있을까.
2. 남주혁
:이해(貽害)의 이해(理解)
"아, 미안. 진짜 서운했지. 내가 진짜 그러면 안 되는데 게임에 빠져서......"
"게임이 나쁜 게 아니라니까."
천성이 나쁘다거나 바락바락 자존심을 세워서 속을 긁는 타입은 아니었다. 유별나게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거나,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독한 말을 하는 애는 더더욱 아니었고 오히려 먼저 사과를 건네는 데 익숙한 남자친구였다, 매번. 하지만 정말 매번.
고질적인 문제였다. 점심은 뭐 먹었어? 아, 그래? 우리 공주 기분 좋겠네, 하다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겨 저녁을 먹을 때쯤 다시 저녁 먹었어?로 반복되는 연락의 흐름. 말풍선은 오고가지만 전혀 대화를 하고 있지 않은 기분이 들도록 만드는 너는 매번 그렇게 사과만 했다. 게임했어, 잠들었어, 친구랑 전화했어. 그리 다양하지도 않은 레퍼토리와 질투할 거리도 없는 이유. 내가 화가 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미리 말만 해 주면 되잖아. 왜 자꾸 사람을 속 좁은 애로 만들어."
"진짜, 진짜 미안해. 다음에부터는 노력할게."
내 모든 짜증을 이해하고, 낮은 자세로 용서를 구하는 너에게 더 이상 화내고 싶지 않아 넘어가길 수 차례. 허무하게 끊긴 대화에 아무 일에도 집중 못 하고 알림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일도 수 차례. 나는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오겠지 하는 마음을 먹어 봐도 허전했다. 꾸준한 연락이 아니라, 그냥 사소한 배려 하나만 바라는 것뿐인데.
"짜증 나. 형들이 막 너 소개시켜 달래, 자꾸. 예쁘다고 반할 거 뻔하면서."
"형들?"
"어, 어제 저녁 같이 먹었거든. 허.... 내가 널 어떻게 지킬까?"
내가 알지 못하는 네 일상은 보통 우연히, 네 의도치 않은 말에 의해 알게 되는 때가 잦았다. 너한테서 연락이 올까 나는 미루고 미루다가 책상에서 대충 때웠는데. 마냥 신나 보이는 네 앞에서 따지고 드는 타이밍은 아니라서 오늘도 넘어간다. 아니, 짚어 봐야 같은 패턴이 되풀이 될 걸 알고 있었다. 미안해, 네 마음 이해해, 노력할게.
함께 있을 때면 나에게만 오롯이 집중하는 네가 다른 마음을 품는다거나, 권태를 느낀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잡은 고기라서 그런 거야'라는 조언을 받아들이기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너는 계속 그랬고, 나는 계속 감정이 상해 왔을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럼 서운함을 느끼게 된 내가 변한 건가? 적어도 나는, 애인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를 죄인으로 만드는 분위기가 싫어 야, 너 자꾸 그런 식으로 하면 나도 폰 딱 놓고 산다?라고 뼈 있는 말을 농담조로 건네면 그건 안 돼... 보고 싶단 말이야 하는 주혁이의 말에서 애정을 발견하고, 결국은 웃어 버리고 마는 때도 있었다. 내가 필요한데, 그냥 이런 만남에 서툴구나. 조금씩 바꾸고 양보하면 될 거야. 마음 넓은 여자친구가 되겠다고 혼자 다짐도 몇 번씩이나 했다.
하지만 새로운 잘못은 다른 종류의 분노를 이끌지만 반복은 화를 식히고 식혀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힘이 있기에. 네가 또 갑작스럽게 자리를 비운 오후, 버티는 연애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내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건.......'
'너무 지쳐'
'무슨 소리야?'
'네가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아서, 그게 너무 지친다. 우리 그만 만나는 걸로 해.'
일방적인 통보로 전화를 끝내고 딱히 후련하지도, 딱히 비참하지도 않았다. 파노라마처럼 지난 200일 정도의 시간이 지나가는 드라마 같은 일이 머릿속에서 연출되지도 않았다. 다만 조금 아쉬운 일은, 주혁이 네 목소리가 정말 너무 평소와 같았다는 것 정도. 차라리 네가 정말 바쁜 일이 있어서, 연락이 정말 안 되는 상황에 놓여 있어서, 그래서 내 전화를 받지 못했던 거라면 손톱만큼 덜 지치지 않았을까. 연결음이 두 번을 채 울리기도 전에 받은 네가 이번에는 뭘 하고 있었는지 다시는 알지 못하겠지.
주혁이에게 몇 번이고 전화가 왔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 너에게 더 이상의 이해를 요구하고 마음을 위로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매일의 너를 몰랐듯이, 너는 아마 나를 잊을 때까지 모를 것 같다. 너는 내 가벼운 서운함을 이해(理解)하는 게 아니라, 네 반복된 행동이 내 마음을 이해(貽害)하는 걸 이해했어야 해.
*이해(貽害): 남에게 해를 끼침
이해(理解): 잘 알아서 받아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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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프랑스가 혐한에 미쳤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