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내가 그때 지갑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PC방을 갔었더라면, 그녀를 평생 보지 못 했을 것이다.
#1. 첫 만남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날씨가 매우 더웠다. 아마도 2006년 6~7월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4시쯤일까. 수업을 마치고 연희관을 나와서 동주시비 쪽으로 걸어가는데 반 친구한테서 문자가 왔다.
[야 오늘 혁주 생일이다 ㅋㅋ 6시까지 대학약국 앞으로 와!]
6시라... 아직 2시간이나 남아있다. 어디서 시간 죽이고 있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다. 나는 잠시 고민한다.
'그냥 애들 불러서 PC방에 잠깐 가있어야겠다. 잠깐... 이런!'
나는 그제야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릴없이 창서초 근처에 있는 하숙집으로 걸음을
옮긴다.
늘 지나가던 길이다. 동주시비를 지나면 백양관이 나오고, 백양관을 지나면 중도가 나온다. 그렇게
쭉 걸어가다 보면 별다른 특징 없는 교문이 나올 테지. 교문 옆에는 늘 그렇듯 중국식 호떡을 팔고
있을 테고...
내 앞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신입생으로 보이는 여학생들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재잘대며 걷고 있지
만 나는 무관심하고 심드렁할 뿐이다. 똑같이 반복되는 생활이 무료하다는 생각이 든다.
운동권 총학에서 걸어놓은 플래카드를 무의식적으로 바라보면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따라
교문을 나서고, 사람들을 따라 교문 앞 횡단보도를 지난다.
대학약국 사이 골목으로 들어간다. 페스티벌 노래방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 내 하숙집을 찾아
걸어가는 그 길은 그다지 운치 있지 못하다. 나는 언제나 그랬듯 똑같은 포즈로 똑같은 색깔과 모양
을 하고 있는 하숙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대문을 열 때만 해도, 나는 식상함 그 자체였다.
'앗 깜짝이야!'
늘 똑같이 반복되던 일상이었지만, 그때 그 장면만은 정말 의외였다. 신선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 앞에서 어떤 예쁘장한 여고생이 열심히 담배에 불을 붙이려고 하고 있다. 나는 깜짝 놀랐고 그 여고
생도 깜짝 놀라는 눈치다. 어느새 놀라움은 사라졌지만, 그 빈자리를 민망함과 어색함이라는 녀석이
채운다.
'저... 여기 아저씨 집이에요?'
헉....! 아저씨라니.. 나는 재수하긴 했지만 06학번 신입생이라는 말이다! 하기야 나이 들어 보인다는
소리도 그다지 새로운 소리는 아니로군.
'내 집은 아니고, 하숙하는 집인데... 여기서 뭐 해?'
'아..! 그럼 여기서 담배 하나만 피우고 가도 상관없죠? 하나만 피우고 갈게요.'
여자가 담배라니.... 나는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걸 진짜로 싫어했다. 게다가 고등학생. 내 시선이 그다지
고울 리가 없다. 그런데 그때 나는 이 여학생의 행동이 뭔가 어설프다는 걸 발견한다.
'아씨.... 왜 불이 안 붙지, 불량품인가?'
입에다 담배를 물고 연신 라이터 불을 붙이고 있지만 담배에 불이 붙지를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담배 필터 부분을 깊게 빨아줘야 불이 붙는데 저 여고생은 입에 물기만 한 채로 불을 붙이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이 웃겨서 큭하고 웃고 만다. 그러고 보니 별로 노는 애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담배 피우는 거 처음 봐요? 왜 웃어요? 기분 나쁘게'
'아 귀엽다. 너 담배 처음 피우지? 고등학생인 거 같은데? 어린애가 웬 담배야. 남의 하숙집 앞에서'
아마도 '어린애'라는 말에 그 여학생은 발끈한다.
'담배 원래 피우고, 나이 들 만큼 들었거든요? 아저씨 그냥 빨리 지나가시면 안 돼요?'
나는 왠지 이 상황이 재미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여학생한테서 던힐 라이트 한 갑과 라이터를 뺐는다.
여학생이랑 어울리지 않게 생각보다 중후해 보이고 비싸 보이는 라이터다. 나는 재수할 때 담배 피우던
기억을 살려서 담배를 하나 빼물고 불을 붙였다.
'불량품이기는, 담배는 이렇게 피우는 거야? 오케이? 그리고 고등학생의 왜 담배를 피워? 당당하게
피우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몰래 남의 하숙집 앞에서.. 이건 그냥 내가 압수할게.'
나는 담배를 끄고 유유히 하숙집으로 들어갔다. 여학생이 화가 난 표정으로 뒤따라온다.
'뭐야! 아저씨 지금 장난해요? 빨리 줘요 그거!'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하숙집 문을 닫고 들어갔다. 창문으로 바라보니 여학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하숙집 앞을 서성거리다가 그냥 단념하고 돌아간다. 아마도 주변 사람들 붙잡고 내 라이터랑 담배를
어떤 아저씨가 뺐어갔으니 찾아달라고 말하기는 쑥스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담배랑 라이터를 서랍에다 대충 넣어두고 지갑부터 챙긴다. 여섯시가 되려면 아직 1시간도 넘게
남았다.
#2. 소주와 기억
혁주의 생일파티는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졌다. 어느새 3차까지 간 우리는 더블 더블로 자리를 옮겼
다. 나는 그렇게 남들과 잘 융화되고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분위기에 완전히 녹아들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반 친구들은 친근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주 오래된 친구들처럼, 그 술집에는 우리
말고도 다른 여러 학생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들도 반 친구들이나, 선후배들이겠지, 저들은 언제나 함께
저렇게 몇 년이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나도 그럴 수 있을까?
한참 동안 술자리 게임을 하다가 지겨웠는지 지현이가 나를 가리키며 한마디 한다.
'야 우리 진실게임하자. 성민 오빠부터 돌아가면서 하기! 물리면 소주 3잔 원샷!'
얘가 완전히 취했구나. 왜 하필 나부터 시작이니. 응?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아직 진실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고등학교 때 사귀던 아이와 진실된 사
랑을 해보고 싶기는 했지. 그런데 그건 오직 나만의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내가 재수를 하
는 시점부터 그 아이는 더 이상 나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렇게 실연당했다. 아
마도 내가 학원에 틀어박혀서 재수를 하고 있는 1년이라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너무 길었던 시간 이었
으리라.
외롭고 힘든 시간을 그녀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빠! 빨리 시작하라니깐? 자 우리 반에서 누가 가장 마음에 들어?'
누가 마음에 드냐고? 솔직히 몇 명 예쁜 애들한테 관심이 가는 건 사실이지. 그런데 내가 곧바로 들이대
거나 고백할 여유는 없거든. 그게 진실된 감정인 지도 모르겠고, 난 한번 차인 이후로 진실된 사랑 같은
거는 믿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는 척하다가 말문을 열었다.
'희진 선배. 누나 같고, 후배들 잘 챙겨주고, 성격도 좋잖아?'
주변에서 '오~~'하는 소리와 함께 사귀라고 아우성이다. 부담 없는 상대로 희진 누나가 가장 적절한 거
같아서 선택한 거지만, 그래도 누나는 괜찮은 여자다. 여자로서 끌리는 건 아니지만, 정말 호감이 간다.
나는 또 그런 식으로 진실게임을 피해 갔다. 나 말고도 다른 친구들도 똑같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한 명씩
말한다. 아까의 환호성이 똑같이 반복된다. '와~사귀어라. 사귀어라~!'
'야 그러고 보니. 너 소개팅한 거는 어떻게 됐냐?'
내 앞에 있던 경석이 형이 묻는다. 내가 소주를 한잔 따라주려고 하니 됐다는 제스처를 보낸다. 약간 취
해 있어서 그런지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아 그냥.. 잘 모르겠어요. 저도 감정을 잘 모르겠고 상대방도 저를 그다지 좋아하는 거 같지 않고..'
소개팅은 왠지 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뭔가 잘 완성된 대본을 가지고 가서 연기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어떻게 저 여자애한테 다가가야 하지?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려줘 야 할까? 한 두 번 만나서 마음에
든다는 건 또 뭐고. 그냥 확 끌린다는 거? 하드웨어가 마음에 든다는 거야?
시간은 벌써 새벽 2시에 가까워졌다. 우선 여자애들을 집에다 보내주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남자들만
서너 명 남는다.
'성민아 오늘 너네 집 신세 좀 지자. 우리 아버지한테 술 취해서 들어가다가 또 걸리면 난 죽음이야.'
신촌 한복판에 있는 내 하숙집은 완전히 여관이나 다름없다. 그다지 까칠한 성격이 아닌 내가 그걸
거절 할리는 없다. 게다가 아버지한테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나는 아버지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덕택에 어머니 혼자서 외동아들인 나를 키우느라고 정말 고생하셨다. 아버지는 어떤 느낌일까. 차라리
아버지한테 죽도록 혼나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어느새 나를 포함해 3명의 남자들이 내 하숙집으로 들어왔다. 경석이 형이 호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난
감한 표정으로 나에게 묻는다.
'아, 술집에다 담배랑 라이터 놓고 왔다. 야 너 담배 안 피우지? 담배 없냐?'
그때 오늘 있었던 한편의 신선한 충격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한 여고생한테서
담배랑 라이터를 빼앗아버린 꼴이 되었네. 완전히 나쁜 놈 된 거잖아 이거?
'형 저기 서랍에 담배랑 라이터 있어요. 던힐 라이트 괜찮죠?'
'땡큐지 그럼'
경석이 형은 서랍을 열고 담배랑 라이터를 집어 든다.
'이야, 이거 라이터 되게 좋은 거 같은데. 이거 어디서 낫냐? 담배도 안 피우는 녀석이'
'그럴 일이 있었어요.'
나는 아까 생각이 나서 씩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경석이 형은 담배랑 라이터를 들고 현관 밖으로
나간다. 아마 한두 대 정도 피우고 들어올 모양이다.
아까 낮에 봤던 여고생 모습이 다시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꽤나 예뻤던 거 같은데, 왜 하필 여기서
담배를 피우려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 여고생이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게 될지 따위는 잘 알지 못 했다. 어느새 여고생은
머릿속에서 밀려나고 나는 곯아떨어진다. 내일 채플은 못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관없다.
어린 내가 아버지와 놀고 있는 꿈을 꾸고 있다. 수채화 같은 푸른 언덕에서다.
#3. 인연이란 거 안 믿어
내가 왜 밤 10시가 돼서야 집으로 돌아갔는지는 기억이 정확지 못하다. 아마도 근처 술집에서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다가 되돌아오는 길이었으리라, 늦게 일어나서 채플도 들어가지 못 했을뿐더러 연이틀이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상당히 피곤했다. 게다가 내일 9시에 첫 수업,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여명 808을 하나 집어 든다. 이걸 마시면 다음날 숙취가 덜한 느낌이어서 종종 구입하곤 했다. 새로 일하
기 시작한듯한 생긋 웃는 인상의 여자 아르바이트생이다. 다소 인위적인 친절함으로 바코드를 찍으면
서 말한다.
'5000원입니다.'
나는 천 원 지폐 4장에 500원 동전 2개를 건네주고 편의점을 나선다.
'안녕히 가세요'
마찬가지로 다소 인위적인 인사를 받으면서 나는 하숙집으로 걸어갔다. 빨리 샤워하고 자고 싶은 생각
뿐이다. 별생각 없이 대문을 연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놀라고 만다. 누군가 있다.
나는 정말 당황했다. 밤 10시도 훌쩍 넘은 시간에 얘가 여기 왜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도 더 당황스러워
운건 저 여학생의 모습이다. 파묻은 고개를 들자,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드러난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 눈물에 붙어있다. 한참을 거기서 울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를 발견하자 원망의 눈길이
가득해진다.
'야. 너... 여기서 뭐하고 있어? 지금이 몇 신데...'
'빨리 내놔요. 그거! 빨리요!'
여고생은 다시 눈물을 터뜨리면서 나를 몰아세운다. 펑펑 운다는 표현이 더 맞을듯싶다. 나는 더욱 당
황한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내가 왜 여고생 한 명을 이렇게까지 울리고 있는 거지?
'야.... 너 왜 이래? 응..?'
'빨리 달라고요. 라이터 빨리 줘요!'
저 여고생의 펑펑 우는 얼굴과 아까 편의점에서 본 아르바이트생의 생긋 웃는 얼굴이 오버랩된다.
이거 참, 극과 극의 조합이로군.
나는 우선 그 여고생을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1층에 있는 한 하숙생이 갑작스러운 여자의
울음소리에 놀라서 현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쳐다본다. 이거.. 완전 동네 망신이네.
'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울면 어떡해? 줄게, 줄 테니까 좀 울지 좀 말아봐.'
내가 다독이듯이 말하자 그제야 여고생은 좀 수그러든 듯했다. 나는 왜 그렇게 흥분했는지 자초지종
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안 좋은 일 있어서.... 담배 한 개만 피워보려고 아빠 서랍에서 몰래 가져온 거란 말이에요. 근데 아저씨
가 다 가져가 버렸잖아요. 라이터 결혼할 때 아빠가 엄마한테 받은 정말 중요한 물건이란 말이에요.
괜히 내가 몰래 가져간 거 걸리기나 하고, 라이터도 뺏기고 ....흑흑'
아... 거참 ''이란 말은 안 붙였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렇게 안 생긴 애가 말버릇 정말 안 좋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러게 누가 아빠 꺼 훔쳐다가 담배 피우라니? 응?
'야 그럼, 어제 내가 가져갈 때 바로 얘기를 하지.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야?'
'아저씨가 뒤도 안 돌아보고 홱 들어갔거든요? 그리고 저 6시에 학교 마치자마자 바로 와서 기다렸거든
요? 시간 없어요. 빨리 라이터나 주시죠?'
진짜 까칠하네. 헉. 그러고 보니 4시간이나 여기서 죽치고 기다렸던 거야? 좀 일찍 들어갈 걸 그랬나.
'알았어. 나 따라와. 내 방에 있으니까 줄게.'
그런데 그 여학생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제야 나는 깨닫는다. 아무리 만인이 드나드는 성민 여관이라
고 해도, 내가 너무 개념이 없었군. 누군지도 모르는 '아저씨' 집에 여고생이 따라 들어가기는 무리지.
'아니, 그냥 내가 가지고 오는 편이 빠르겠다. 10초만 기다려.'
나는 내방으로 뛰어가서 서랍을 열었다. 앗. 그런데 라이터랑 담배가 없다. 아! 경석이 형! 어제 일이 떠
오른다. 형이 어제 우리 집에서 그 라이터를 빌려서 담배를 피우고 무의식중에 자기 호주머니에 넣었음
에 틀림없다. 이런.. 난감하네. 저 까칠한 여고생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쟤 또 울고불고 난리치는 거 아
니야? 아씨.. 우선 입부터 틀어막아 버릴까?
나는 면목없다는 표정으로 그 여학생이 있는 곳으로 다시 와서 차근차근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내일
그 형한테서 라이터를 받아서 줄 테니 걱정 말고 좀 돌아가 줄래? 대충 이런 식이었다.
다행히 다시 울고불고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내 손을 유심히 쳐다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손에
그때까지 들려져 있던 여명 808이다.
'아... 진짜 한다. 짜증 나... 아저씨. 나 지금 목마르고 짜증 나서 죽을 거 같거든요? 내일 무슨 일이
있어도 라이터 주세요. 네?'
그러더니 내 손에 있던 여명 808 캔을 홱 가져가더니 내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캔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마신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릴뻔했다.
'캑캑.... 아 씨. 진짜. 이거 뭐야! 무슨 맛이 이래!?'
그럼... 그게 캔커피라도 되는 줄 알았니?
'아니 요즘에는 한약도 팔아요? 왜 이딴 걸 돈 주고 사서 마셔요? 아 짜증 나.'
이제 별거 가지고 다 시비구나. 숙취해소용 음료라는 걸 설명할 기력도 없다. 이게 5000원이나 한다는
걸 알면 기절을 하겠군.
'자요. 아저씨나 마셔요. 저 갈 테니까 폰 번호 불러요.'
안 마셔. 네 입에 들어갔다가 뿜어져 나온 거 다 봤거든.
나는 폰 번호를 알려준다. 여고생은 내 폰에 전화를 걸고 나서 인사도 없이 되돌아 나간다.
'야 잠깐만, 목마르다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니까 내가 음료수 하나 사줄게 들고 가.'
'됐어요. 무슨 점 봐요? 인연 같은 거 안 믿거든요?'
휙 하고 지나가는 여고생을 바라보며 나는 정말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 보니 별 희한한 일도 다
있구나. 인연을 안 믿는다고? 그래, 나는 진정한 사랑을 안 믿으니까 이거 완전 최상의 조합이로군.
내일 언제 또 라이터를 돌려주지... 귀찮게 됐네.
나는 여명 캔을 분리수거 통에다 버리고 들어간다. 휴대폰에는 익숙하지 않은 번호 하나가 찍혀 있다.
나는 주저 없이 '진상녀'라고 번호를 등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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