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국민투표를 실시하다
왕으로서 정치가로서
세종대왕의 위대함을 부인하는 한국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문자인 훈민정음 창제를 비롯하여
백성을 위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농서와 의서 간행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발탁과 해시계
자격류, 측우기 등의 각종 과학 기구들의 발명
박연으로 대표되는 궁중 음악의 완성 등 세종대왕의
찬란한 민족문화 성과들은 나열하기 힘들 정도인데 여기에
또 하나 세종대왕은 580여년 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한 왕이였다
1430년 (세종 12년) 세종대왕은 공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을 갖고 백성들에게 그 찬반 의사를 물었다
토지 1결당 일정하게 10두의 세금을 정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으로 이전까지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보면서 농사의 수확량을
확인하고 세금을 정하는 방식에 문제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에 걸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고 17만여 명의 백성이 투표에 참여하였고
9만 8천여 명이 찬성 7만 4천여 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역별 찬성과 반대 상황이 <세종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세법 개선은 국가의 총역량이 집중된 사업이였다
오늘날의 국민투표와 흡사한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국민투표를 실시한 것은
세종대왕이 백성의 의견을 가장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의 의견이 워낙 팽팽해
세종은 바로 세법을 확정하지 않고 다시 면밀한 조사를 거쳤다
1437년 8월 전라도와 경상도부터 시범적으로
공법을 실시했고 4년 뒤에는 충청도까지 확대했다
1444년 (세종 26년) 공법은 마침내 연분 9릉, 전분 6등법으로
최종 확정되었고 국민투표를 실시한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농업이 근본 산업이였던 당시 백성들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한 세금 결정은 백성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이처럼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세종은 오랜 시간을 두고
신하와 백상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끝에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흔히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전제왕권 시대에
이처럼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놀랍다
580여년 전의 국민투표는
세종대왕과 그 시대를 더욱 자랑스럽게 기억하게 한다
글 신병주 님 <규장각 학예연구사> 착한사슴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