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
즉위: 1392~1398

경기전 봉안본, 함흥 조선신궁 봉안본 자료를 토대로 복원한 이성계 어진
01.
태조가 젊을 때,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가 담 모퉁이에 다섯 마리의 까마귀가 있음을 보고 태조에게 쏘기를 청하므로, 태조가 단 한 번 쏘니 다섯 마리 까마귀의 머리가 모두 떨어졌다. 김씨는 이를 이상히 여겨 태조에게 이르기를,
"절대로 이 일을 누설하지 마시오."
*정안옹주 김씨: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의 첩
02.
태조가 일찍이 한더위에 냇물에 목욕을 하고 난 후에 냇가 근방의 큰 숲에 앉아 있는데, 한 마리의 담비(蜜狗)가 달려 나오므로, 태조는 급히 박두(樸頭)를 뽑아 쏘니, 맞아서 쓰러졌다. 또 한마리의 담비가 달려 나오므로 쇠살(金矢)를 뽑아 쏘니, 이에 잇달아 나왔다. 무릇 20번 쏘아 모두 이를 죽였으므로 도망하는 놈이 없었으니, 그 활쏘는 것의 신묘(神妙)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03.
태조는 대초명적(大哨鳴鏑)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학(鶴)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깍지를 만드니,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이자춘: 이성계의 아버지)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사람이 쓸 것이 못된다."
하면서, 이를 땅에 던지니, 태조는 이를 주워 화살통에 꽂고 앞에 섰는데,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태조가 달려가서 쏘니 화살 한 개에 죽었다. 또 노루 한 마리가 나오므로 또한 그와 같이 하였다. 이같이 한 것이 일곱 번이나 되니, 환조가 크게 기뻐하면서 웃었다.
04.
나하추의 고려 침공 당시(1362) ▶▶▶ 내(川) 가운데서 한 적장(賊將)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갑옷과 투구는 목과 얼굴을 둘러싼 갑옷이며, 또 별도로 턱의 갑[頤甲]을 만들어 입을 열기에 편리하게 하였으므로, 두루 감싼 것이 매우 튼튼하여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는 짐짓 그 말을 쏘니, 말이 기운을 내어 날뛰게 되므로, 적장이 힘을 내어 고삐를 당기매, 입이 이에 열리는지라, 태조가 그 입을 쏘아 맞혔다.
05.
동녕부 공략전, 오녀산성 전투 당시(1370) ▶▶▶ 그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隨從)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城中)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山城)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 호나 되었다.
06.
요성(遼城)의 장수 처명(處明)이 이때 나이 이미 늙었는데 태조를 따라 화령(和寧) 에 가서 어느날 나가 사냥하다가 땅이 험하므로 얼음판에 미끄러졌다. 태조는 가파른 비탈을 말을 달려 내려와서 큰 곰 서너덧 마리를 쏘아서 모두 화살 한 개로 죽이니, 처명이 탄복하면서 말하였다.
"제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지만, 공(公)의 재주는 천하의 제일입니다."
07.
태조가 일찍이 홍원(洪原)의 조포산(照浦山)에서 사냥을 하는데, 노루 세 마리가 떼를 지어 나오는지라, 태조가 말을 달려 쏘아 먼저 한 마리의 노루를 쏘아 죽이니, 두 마리의 노루가 모두 달아나므로 또 이를 쏘니, 화살 한 개 쏜 것이 두 마리를 꿰뚫고 화살이 풀명자나무(槎)에 꽂혔다.
08.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를 많이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步)밖에 서 있고, 나무 위에는 열매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여러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 번 쏘니 다 떨어졌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하니, 여러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賀禮)하였다.
09.
공민왕이 경대부(卿大夫)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고 친히 이를 구경하는데, 태조가 백 번 쏘아 백 번 다 맞히니, 왕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순제(順帝)가 친히 그 팔을 당겨서 이를 관찰하였다. 태조가 동렬(同列)들을 모아 덕암(德巖)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백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도 태조는 쏠 때마다 다 맞히었다. 해가 이미 정오(正午)가 되어 황상(黃裳)이 이르니, 여러 재상(宰相)들이 태조에게 홀로 황상과 더불어 쏘기를 청하였다. 무릇 수백 번 쏘았는데 황상은 연달아 50번을 맞힌 후에도 혹은 맞히기도 하고 혹은 맞히지 못하기도 했으나, 태조는 한번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는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내부(內府)의 은(銀)으로 만든 거울 10개를 내어 80보(步) 밖에 두고,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이를 쏘게 하되, 맞힌 사람에게는 이 거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태조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왕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10.
지리산 전투 당시(1377) ▶▶▶ 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11.
해주 전투 당시(1377) ▶▶▶ 원수(元帥) 안열(安烈)·견미(堅味) 등이 해주(海州)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장차 싸우려고 투구를 백 수십 보(步) 밖에 놓고 시험해 이를 쏘아, 싸움에 이길까 못 이길까를 점쳐 보았는데, 마침내 세 번 쏘아 모두 꿰뚫었으므로 말하기를,
"오늘의 일은 알겠다."
하였다.
1보가 1.2~1.5m인데... 백 수십 보라면 웬만한 화약병기 급의 비거리 아닌가 이거는??? 편전도 아닌데???
태조는 대우전(大羽箭)으로 적을 쏘았는데, 17번 쏘아서 모두 이들을 죽였다. 이에 군사를 놓아 이 형세를 이용하여 마침내 적군을 크게 부수었다. 이 싸움에서 태조가 처음에는 대우전(大羽箭) 20개를 가졌었는데, 싸움이 끝나매 화살 3개가 남았다. 측근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모두 왼쪽 눈초리를 쏘았다."
하므로, 측근의 사람들이 나아가서 보니 전부 그러하였다.
12.
우인열(禹仁烈)이 일찍이 태조를 저사(邸舍)에서 알현(謁見)할 적에, 태조가 서청(西廳)에서 마주 앉았었는데, 차양(遮陽)을 쳐다보니 쥐 세 마리가 문미(門楣)에 붙어 달아나는지라, 태조가 아이를 불러 활과 고도리(高刀里) 3개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기다리니, 쥐 한 마리가 돌아와서 문미(門楣)를 지나갔다. 태조는 말하기를,
"이것을 맞히기만 할 뿐이요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면서 마침내 이를 쏘니, 쥐와 화살이 함께 떨어졌는데 과연 쥐는 죽지 않고 달아났으며, 남은 두 마리의 쥐도 또한 이와 같았다.
13.
황산전투 당시(1380) ▶▶▶ 태조는 이미 험지(險地)에 들어갔는데 적군의 기병(奇兵)과 예병(銳兵)이 과연 돌출(突出)하는지라, 태조는 대우전(大羽箭) 20개로써 적군을 쏘고 잇달아 유엽전(柳葉箭)으로 적군을 쏘았는데, 50여 개를 쏘아 모두 그 얼굴을 맞히었으되, 시윗소리에 따라 죽지 않은 자가 없었다.
14.
황산전투 당시(1380) ▶▶▶ 적의 장수 한 사람이 나이 겨우 15~16세 되었는데, 골격과 용모가 단정하고 고우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었다. 흰 말을 타고 창을 마음대로 휘두르면서 달려 부딪치니, 그가 가는 곳마다 쓰러져 흔들려서 감히 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군사가 그를 아기발도(阿其拔都)라 일컬으면서 다투어 그를 피하였다. 태조는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아껴서 두란(豆蘭)에게 명하여 산 채로 사로잡게 하니, 두란이 말하기를,
"만약 산 채로 사로잡으려고 하면 반드시 사람을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아기발도는 갑옷과 투구를 목과 얼굴을 감싼 것을 입었으므로, 쏠 만한 틈이 없었다.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투구의 정자(頂子)를 쏘아 투구를 벗길 것이니 그대가 즉시 쏘아라."
하고는, 드디어 말을 채찍질해 뛰게 하여 투구를 쏘아 정자(頂子)를 바로 맞히니, 투구의 끈이 끊어져서 기울어지는지라, 그 사람이 급히 투구를 바루어 쓰므로, 태조가 즉시 투구를 쏘아 또 정자(頂子)를 맞히니, 투구가 마침내 떨어졌다. 두란이 곧 쏘아서 죽이니, 이에 적군이 기세가 꺾여졌다.
15.
신우(辛禑) 11년(1384) 을축, 태조가 우왕을 따라 해주(海州)에서 사냥하였다. 화살 만든 장인(匠人)이 새 화살[新矢]을 바치니, 태조가 지환(紙丸)을 쌓아 놓은 벼(稻) 위에 질서 없이 꽂아 놓게 하고 이를 쏘아 모두 맞히고는, 좌우(左右)의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오늘 짐승을 쏘면 마땅히 모두 등골을 맞힐 것이다."
하였다. 태조가 평상시에는 짐승을 쏘면 반드시 오른쪽 안시골(雁翅骨)을 맞혔었는데, 이날은 사슴 40마리를 쏘았는데 모두 그 등골을 바로 맞히니, 사람들이 그 신묘한 기술을 탄복하였다.
16.
함주전투 당시(1385) ▶▶▶ 제장들의 영중(營中)에는 소나무가 있었는데 70보(步) 거리에 있었다. 태조가 군사를 불러 이르기를,
"내가 소나무의 몇째 가지에 몇 개째 솔방울(松子)를 쏠 것이니, 너희들은 이를 보라."
하고는, 즉시 유엽전(柳葉箭)으로 이를 쏘아, 일곱 번 쏘아 일곱 번 다 맞혀 모두 말한 바와 같으니, 군중(軍中)이 모두 발을 구르고 춤을 추며 환호(歡呼)하였다.
이 기록은 뭔가 부실해 보이는데 내 착각이겠지?...
위의 글들 모두 '태조실록: 총서' 에 나와있는 실제 기록입니다. 위의 기록들 중 대부분이 창업군주의 신성화 시도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당시 이성계의 뛰어난 궁술과 군재는 중국측 기록인 '원사'나 일본측의 기록에서도 나와 부분적으로나마 교차검증이 되어 있습니다.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의 궁술을 지닌 명장이었다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위 사진은 함흥 조선신궁에 있던 이성계의 활과 화살을 촬영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이전에 찍은 사진인데, 저기에 있던 활과 화살들은 전쟁후 그 행방이 묘연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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