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최대의 부호가문,
데코프 家
오랫동안 이 왕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연히 그의 사후 가장 큰 화두는 그가 남긴 막대한 재산의 상속문제.
고인을 기리는 추억은 짧았고, 그의 무덤 위로 이어지는 발자국들은 진창을 이루었다.
당장 사망소식이 난 다음날 부터
얼굴 한번 본 적 없던 친척, 사돈, 사돈의 팔촌까지 끊이지 않는 방문.
어떻게 상속 리스트 구석에라도 이름을 들이밀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며,
하다못해 그릇 종지 하나라도 차지해 보기 위해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치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먹이싸움 끝에
모두가 이 저택 어느것에든 소유권을 가지게 되었다.
정원 조각, 그림, 소파, 차, 은식기, 18세기부터 보관해온 서적들,
그러나 개중에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 또한 있다.
이를테면... 버릴수는 없으나 값어치도 나가지 않는 것들.
푼돈도 안되는 귀찮기 짝이 없는 골동품들.
짐더미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 집안에서 가장 쓸모없고 처치곤란인 소유물
집안의 사생아인
'나'
같은것 말이다.
1.
완벽한 후계자, 데코프家의 장남
DMITRI


아버지가 바라는 전형적이고도 가장 모범적인 아들이자
나의 이복오빠.
공공연히 사생아 취급을 받던 나와는 달리
그는 아버지와 가문 친척 모두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대상이었다.
월반에 월반을 거듭한 학업, 냉철하고 신중한 경영능력과 사교술.
그가 후계자로서 다른 형제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은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찍이 그의 능력을 인정한 집안의 사용인들은 모두 그를 아버지 대하듯 했다.

애완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방 한켠에 숨어살듯 하는 나와는 천지차이.
그가 날 좋아하지 않는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는 매번 유치한 괴롭힘을 일삼는 다른 이복 형제들과는 달랐다.
대신, 그는 날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했다.
그와 말을 섞어본 것은 기껏해야 식사시간 엉망진창으로 음식을 흘리는 내게
그가 주의를 준 것 정도.

"예의없이 구는구나."
남몰래 동경하던 큰오빠의 반듯한 어조 한구석에서 숨길 수 없는 경멸을 발견한 나는
그 날 수치심에 얼굴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다.
그렇듯 같은 성으로 묶여있으나, 그는 사실 내게 남보다도 까마득히 먼 존재였다.
내게 있어 그런 그와의 그나마 친밀했던 기억이라면,
아주 오래전, 단 한번의 사건 뿐이다.
내가 아직 철 없던 시절, 난 아버지에게 자주 매를 맞았다.
그는 자식이나 아랫사람들을 대하는데에 있어서 그 어떤 관용도 없는 사람이었고,
난 무얼 배워도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반푼이였으므로, 그의 엄격한 기준에 내 덜 떨어지는 성과가 눈에 미칠 리 없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지날수록 체벌은 심해져갔으나
저택의 누구 한사람 나를 감싸주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어느 밤,
유달리 심한 매질과 광기에 가까운 폭언에 못이겨 내가 달아났을 때,
"큰오빠, 제발, 나좀 도와줘. 나좀 숨겨줘 제발..."

맨발로 정원을 달려 그의 창문으로 숨어든 나.
흙발로 그의 카페트를 엉망으로 내딛은 나는 그에게 애원했다.
밤 늦게까지 서류에 매진하고 있었던 듯 그는 여전히 얇은 셔츠만 걸친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 흐트러짐 없는 말끔한 모습에,
순간 나는 이런 품위없는 행동을 그가 용서할리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날 냉정하게 밀어내 훈계할테고, 난 다시 개처럼 아버지에게 끌려갈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그가 내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널 숨겨주었으면 좋겠어?"
"......"
"하지만 난 내일은 창문을 잠글거야. 그럼 넌 아버지에게 오늘 몫까지 더 심하게 매를 맞게 되겠지."

"그래도 좋다면.... 이리 와."
고민할 틈 조차 없었다. 나는 당장의 고통이 더 공포스러웠으므로, 절박하게 그의 옷깃을 잡았다.
그는 잠시 나를 내려다보더니 창문을 잠근다.
난 피와 흙으로 엉망이었지만 그는 이렇다할 옷가지조차 챙겨주지 않았다.
마치 말 그대로 숨을만한 장소만 제공하겠다는 듯 다시 스탠드가 켜진 책상으로 다가가 앉는다.
난 그날 만큼은, 당연하다 못해 고맙기까지 했던 그의 그 무관심이 왠지 얄밉고 원망스러워졌다.
수건 한장 주는게 뭐가 어렵다고. 그래서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온갖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다 내며
더러운 꼴 그대로 새하얀 시트가 펼쳐진 그의 침대로 가 털썩 누웠다.
그럼에도 그는 주의를 주기는 커녕 뒤를 돌아보지도 않는다. 난 힘이 다 빠져, 기어들어가는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날 싫어해?"
난 대답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잠시 긴 숨을 쉬는가 싶더니, 일어나 침대로 다가왔다.
화가난 것일까 싶어 움츠리는 내게 그는 다만 침대 한구석에 걸터앉아 속삭였다.
"왜 그런것 같아?"
"......오빠는 아빠를 닮았으니까. 내게 엄격하니까."
내 대답에 그가 설핏 웃음 비슷한것을 띄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향한 자조에 가까웠다.

"내 엄격함은 반쯤은 네 탓이야....."
그리고 기울어진 몸이 내 근처로 다가왔다. 난 숨을 멈췄지만, 그는 침대 반대편의 스탠드를 향해 손을 뻗었을 뿐이었다.
그의 열려진 셔츠자락이 내 뺨 근처에 와 닿는다. 탁, 불이 꺼지고,
어둠속에서 그가 내 몸을 흝어보는것이 느껴졌다. 시선 지나간 자리가 마치 불에 데인것 처럼 뜨거웠다.
손가락이 시트 위에 남은 흙자욱을 따라 짚는다.
이내 몸을 일으키며, 스쳐지나가는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속삭였다.
"네가 왔다갔다고 온 집안 사람들에게 다 광고라도 할 셈인가 보구나."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5년동안 그와 나는 그 어떤 접점도 없었다.
다음날 그의 방 창문은 예고했던 대로 굳게 닫겨 있었고,
그는 눈 앞에서 내 괴롭힘을 목격해도 그저 그 밤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무심히 지나치기만 했다.
난 결론지었다. 그에게는 어쩌다 길을 잃고 들어온 야생동물 정도의 헤프닝 이었던 것이다
다만 나 혼자만은 어째서인지,
그 날의 기억이 마치 목에 걸린 듯 남아 오랫동안 잠을 뒤척이곤 했다.

초저녁,
아버지의 유언장을 읽기위해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모인 자리.
오늘로서 모든 유산상속문제에 종지부를 찍게될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저마다 기대와 초조감에 찬 얼굴이다.
난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다들 물어뜯고 남은 찌꺼기,
벽지의 버려진 별장이나, 처치곤란의 물건들이나 떠맡게 될 것이 뻔했으므로.
그러나 들뜬 침묵속에 유언장을 손에 든 남자가 등장하고
다음순간 대리인이 읽어나간 종이의 내용은
완벽하게 내 예상을 벗어난 충격적인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업체의 경영권과 유럽 곳곳에 흩어져있는 별장과 부지들,
그리고 이 본가의 저택을 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모두의 경악한 시선이 내게 날아와 꽂힌다. 그러나 누구보다 당황한것은 바로 나였다.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본래 이 모든것의 상속자여야만 했던 큰오빠에게 향한다.
마치 알고있었다는 듯이 덤덤해보이는 그의 표정.
"오빠, 설마 알고 있었어?"
달려드는 친척들을 피해, 난 오빠를 찾는다. 홀로 아버지의 관 앞에 서 있는 그의 등.
내 당혹한 물음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넌 정당하게 네 몫의 유산을 상속 받은것 뿐이야."
"하지만......."
"자,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는 드려야지."
내 말을 무시한 그가 가볍게 이야기하더니, 덥썩 내 어깨를 쥐고는 아버지의 관 앞으로 데려간다.
난 너무 놀라 그를 더 재촉하려던 것 조차 잊고 뻣뻣하게 굳어버린채로 그에게 얌전히 이끌려갔다.
우린 단 한번도 접촉한 적이 없었다.
한 공간안에 함께 있었던 그 밤 조차도.
".........도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버지 시신 앞에서 바들거리는 내 등 뒤로 그의 몸이 바싹 붙어온다.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곧 이어 낮은 목소리가 귀에 속삭인다.
"아직도 아버지가 무서워? 이건 그냥 말라 비틀어진 시체일 뿐이야.
널 때리기는 커녕 네 털끝하나 건드릴 힘도 없어."
그의 입술이 귀를 스칠 때 마다 난 휘청이는 몸을 가눌수가 없어 이를 악 물었다.
그는 내 반응은 아랑곳않고 말을 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까? 죽기 전 3년 정도 아버진 정신까지 오락가락해서 노망난 가 따로 없었지.
대 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울어대더구나. 네가 그 꼴을 보았어야 했는데."
"왜 그런식으로 이야기하는거야..? 아버지는 오빠를 가장 예뻐했잖아."
그는 내 말에 나지막히 웃는다.
"그랬니? 하지만 난 예뻐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거든."
충격이 온몸을 휘감아온다. 난 중얼거렸다.
".......아니야. 오빠는 날 싫어했어. 날 방치했잖아. 날....."
"부단히 애를 썼지. 네가,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믿도록."
난 여전히 패닉상태에 빠진채로 비틀거렸다.
그의 팔이 나를 단단히 나를 감싸온다.
그는 마치 지난 세월 표현하지 못했던 애정을 몰아쓰는 것 처럼 날 만지는 일에 거리낌이 없는 듯 했다.

"내게 기뻐하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을 셈이야?
웃어야지. 널 진 저능아취급하며 업신여기던 이들이
이젠 네 발 아래서 굽신거리게 될텐데."
"왜, 왜 나한테 이렇게 까지 해?"
그가 내게 눈을 마주쳐 온다. 그는 적나라한 눈빛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가 내비치는 욕망에 난 꿰뚫린 듯이 바르르 떨었다.
"넌 내 귀여운 누이동생이고, 넌 알지도 못했겠지만...
난 널 끔찍하게 아끼니까."
난 내 턱을 쓰다듬던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입술위로 올라오는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가 웃으며 속삭인다.
게다가 말 했잖니, 네가, 예쁘다고.
결국 난 평생 가문의 이름을 벗어나지 못하겠지.
이젠,
오빠라는 새로운 족쇄...
2.
욕심많은 데코프家의 재산관리인
BRUCE


이마에 야망이라는 글자를 써붙이고 다니는 듯한 남자.
그는 내가 경멸하는 부류의 인간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타입이다. 권력과 강자앞에 굴복하는 개.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아버지의 신발 밑창이라도 핥아댔을 것이 틀림없다.
난 굳이 그를 향한 내 경멸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질색 팔색하는 내 표정을 그도 어느정도는 알아채고 있었으리라.

"시간이 지날수록 예뻐지는구나."
"나한테는 아부해도 아무것도 안떨어져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재산증여까지 맡게 되며 그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가문 안에서 한 자리 하려는 속셈이겠지. 난 그의 욕심이 눈에 비친듯 선하여 코웃음을 쳤다.
그는 가문의 영역 내에서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난 그를 싫어했지만 그의 능력 만큼은 도무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의 모든 돈이 그를 거쳐 지나간다. 그는 데코프가의 변호사 중 한 사람이자,
반박할 바 없이, 아버지가 가장 신뢰하는 재산관리인인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줄 알아?"
"...알고싶지도 않아요."
"귀엽기는. 정말 온실 속 화초가 따로없군."
그는 내 얼굴 위로 담배연기를 뿜어내며 웃었다.
가족 대대로 법조계에 종사해온 그는
전형적인 백인 브루주아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때때로 그의 행동거지는 상류층 집안의 것이라기엔 눈살찌푸려 질만큼 천박한 구석이 있었는데,
예를 들자면 이러한 것이었다. 내가 아직 철부지이던 시절, 날 벌레보듯 하는 다른 어른들과 달리
그는 자주 내게 말을 걸며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것들을 가르쳐주곤 했다.
그리고, 그 중 대부분은 직접적인 괴롭힘보다 훨씬 질이 나빴다.
"요즘 애들은 다 아는 거라고. 네가 그렇게 지니까 괴롭힘을 받는거야.
네 형제들에게 예쁨받고 싶으면, 한번 해 봐."
난 고개를 팩 돌려버렸지만, 이미 그의말에 솔깃 해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내가 형제들에게 분노에 찬 발길질을 받은것은 물론 아버지의 앞 까지 불려가
호된 꾸지람과 매를 맞은것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눈물로 퉁퉁 부은 얼굴로 잠자리에 누워, 난 그를 저주했다.
나쁜새끼. 죽여버릴거야. 언젠가 진짜 죽여버릴거야...

이 집안에서 들을 수 없던 더러운 욕이나 상스러운 말들을 내게 알려준 것도 브루스였다.
그러나 아버지나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는 정말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난 그가 마치 충성스러운 개 처럼 멀끔한 얼굴로 아버지의 옆에 서 있을 때 마다 조소를 숨기지 못했는데,
그럴 때에는 꼭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빛은 마치,
내가 하는 비굴한 짓거리들이 그래도 네 한심한 처지보다는 낫지 않냐는 듯 날카로웠다.
난 그가 유독 내 앞에서 껄렁하게 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어렴풋이, 그가 가족들 앞에서 드러내는 위선과 허위들이
잘 보여 봤자 별 가치가 없는 내 앞에서는 어지간히 필요가 없었겠니, 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어찌되었건 우린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
사실 그가 날 빈정거리는것을 재미있어하고, 내가 그에 일방적으로 가시를 세우는 식이긴 했지만.
그래서 난 그에게 정말이지 치부같은것은 결코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충분히, 평생이고 내 약점을 쥐고 흔들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말 본의 아니게
그에게 내 비밀이라 할 만한 장면을 들킨적이 있다.
그 때 나는 반 쯤은 반항심, 나머지 반 쯤은 왕성한 사춘기의 호기심으로
주방에서 접시닦이 일을 하던 남자아이와 수줍은 첫 연애를 하는 중 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우리가 정원 덤불에서 밀애를 나누고 있을 때,

"거기 뭐 맛있는거라도 있나보지, 응?"
입맞춤을 하려는 찰나,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우리는 화들짝 놀라 떨어졌다. 브루스. 그는 웃고있었지만 미묘하게 찡그러든 표정이다.
"미스터... 이건, 그냥 실수에요. 우린 아무사이도 아니에요."
그렇게 둘러대더니 꽁무니가 빠져라 허둥지둥 도망가는 그애의 뒤로
그가 비웃음을 감추지 않으며 날카롭게 찔러왔다.
"저런 바보 머저리같은 놈하고 만나는거야? 정말로?"
"...... 논다고, 나도 다를것 없어요."

"그래. 그것참 사랑스럽군."
그가 빈정거리며 덧붙였다.
"이건 꽤나 재미있는 스캔들이 될거야."
"아버지한테....말 할거에요?"
"그래야지."
난 사색이되어 입을 다물었다. 자존심 상하게 그에게 말하지 말아달라 애원 할 수도 없는 일.
격 떨어지는 짓을 했다며 또 매질을 당할게 틀림없는데.
그러나 곧 벌벌 떠는 내 머리위로 들려오는 속삭임에, 난 깜짝놀라 고개를 들었다.
"내가 눈 감아주면, 내게 뭘 해줄래?"
"뭘, 바라는데요?"
한참동안 곰곰히 생각하던 그가 내게 말했다.
"나중에. 지금은 아껴두지.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어.
네가 들어줄 만한 선의 요구일 테니까."
그렇게 말한 그가 내게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명백하게, 내가 그 전 까지 단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
어떤 미묘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조언하건데... 끝내. 넌 저것보다는 나아."
이후로 몇년이 지나도록 그는 그 소원이라는 것을 내게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바빴고, 나도 어느새 성인이 되어가며 자연스럽게 풋내나던 내 첫 연인과 헤어졌으므로
그 때의 일 또한 서서히 기억속에 잊혀져 가던 참 이었다.
그리고
유언장이 공개되기 전날,
예고도 없이 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남자.
난 그의 예의없는 행태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러나 거침없이 성큼성큼 방 안으로 들어온다.

"너희 아버지가 죽기 전에 내게 한가지 선물을 주신게 있어. 알고 있어?"
"내가 알게 뭐에요."
제 방 처럼 내 책상위의 책과 노트들을 이리저리 뒤적여보던 그가
내 퉁명스러운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말했다.
"사업체 중 일부분의 경영권을 내게 맡기겠다고 하더군.
하지만 난 거절했어. 달리 원하는게 있었거든."

"내가 뭘 달라고 했을것 같아?"
"내가 알아야 하나요?"

"널 달라고 했어."
놀라 퍼뜩 고개를 쳐드는 내게, 그는 책장을 펄럭이며 능청스럽게 덧붙인다.
"식 날짜는 언제가 좋겠어?"
" 하지 말아요. 아버지가 허락했을리가 없어."
"물론 날 미 취급했지. 하지만 난 그의 더러운 사업 면면을 다 꿰고 있거든.
그중 대부분은 내가 원하는걸 얻어내고도 넘칠 만큼 역겨운 것들이라서 말이지..."
협박이라니? 그건 정말 그답지 않은 짓이다.
그것은 그가 수 년에 걸쳐 공들여 쌓아온 아버지의 신뢰를 잃는 짓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쓰던 사람이, 도대체 왜?
난 혼란스러워 물었다.
"당신 정말 야망에 눈이 멀기라도 한거야? 도대체 원하는게 뭐죠? 나와 결혼해봤자
당신이 얻는건 아무것도 없어요. 내가 이 집안에서 얼마나 무의미한 존재인지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가 내 반응에 차갑게 웃었다.
"네 말이 맞아. 그는 네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않았어. 유언 한구석, 네 이름 앞머리조차도 언급되지 않았지.
네 처지 따위야 완벽하게 안중에도 없는 듯 하더군."

"기껏해야 땅덩어리나 가지고 물고늘어지는 놈들, 그 놈들은 다 썩어빠진 동태눈에 불과해.
하지만 난 이 시궁창같은 곳에서 가장 값진게 뭔지 알아.
아주 오래전 부터....."
그의 손이 내 눈썹을 스쳐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어내린다.
그는 마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누구도 너를 이렇게 만진적이 없겠지."
그렇게 내 허리 뒤를 따라 내려가는 손길.
나는 참지 못하고 뛰쳐나가려는데, 그가 내 손목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난 팔을 죄이는 악력에 소리를 질렀다.
"아파! 놔줘요."
"넌 잘 모르겠지만. 난 좋은 사람이었어. 내가 미치도록 가지고 싶은게 생길 때 까지."
그는 내 비명에도 아랑곳 않고 팔을 한번 더 꾹 죄이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게 놓아주고는 방 한가운데에 있는 의자에 걸어가 앉는다.
그는 놀라 굳어있는 내게 오만한 투로 말했다.
"내 소원, 아껴뒀던거 기억 해? 지금 쓰지."
"이 비겁한....."
"앉아."

그러면서 가리키는 곳은, 걸터앉은 그의 다리 위.
난 그가 날 놀리는거라 생각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으나,
그는 어쩐 일인지 웃음기 하나 없는 딱딱한 표정이었다.
"농담 하는거 아니야. 약속 지켜."
난 그 말에 한참을 망설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앉을 듯 말듯 뜸을 들이자, 순간 그가 확 허리를 끌어당긴다.
난 그대로 그의 허벅지 위에 안착했다. 그와 닿은 모든 곳이 생경하리만큼 뜨겁고 단단하다.
난 엉덩이 아래로 말려 올라간 치마를 내리기 위해 당황한 손길을 가져갔으나,
그는 그런 내 손목을 감싸쥔다.
"잠깐, 옷좀..."
"쉬- 그대로 있어. 보는 사람도 없잖아?"
그리고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정중하고 부드러운 몸짓으로
그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온다. 우린 떨어진 곳 없이 밀착되어있었다.
그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 쉬며 내게 속삭인다.
"내가 야망에 눈이 멀었다고?"
"눈이 멀긴 했지. 언젠가부터 그의 재산 같은건 안중에도 없었거든.
하지만 난 네 한마디라면 언제든지 다 쓰레기통에 처 박았을거야.
넌 내게 기회조차 주지 않았지만."
그리고 벌벌 떨리는 내 손을 바라보며 그는 일그러지듯 웃었다.
"이게 네 대답이야. 그렇지?"
아니야. 난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그의 속삭임이 내 목덜미 위로 뜨겁게 퍼지고,
난 절대, 절대로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어.
넌 이제 내 것이니까."
이 떨림이,
그에 대한 거부감에서 오는것이 아니라고는.......
배우: 애드리안 브로디, 제임스 맥어보이
참고영화: 필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북극의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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