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의 칠천량 해전 패전 이후 갓순신의 수습과정]왜란 발발 후 무패의 신화로 나라를 구했더니 조정에서는 실각시키고 한양으로 압송하여 고문까지 한다.이순신 장군의 빈자리를 원균이 대신하게 되었고 이순신때는 없었던 조정의 전폭적인 지지로 역사상 유래가 없던판옥선 대 함대를 가지고 칠천량해전에서 참패한다.조정 지원 없이 자력으로 키워온 수군이 단한번의 싸움으로 모두 잃은셈조정에서는 백의종군중이던 이순신 장군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 시킨다.<복직된 8월 3일부터 시작되는 수습과정 이야기>8월 3일복직 후 이순신 장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기아상태의 병사,화약 절대부족,군량미 절대 부족9명의 군관과 함께 병력,군량미,화약 수습 프로젝트 시작(+배설의 도주 덕분에 12척의 판옥선 수습, 12척에 승선할 최소 군사수의 절반도 못미치는 수준.., 도선과 적의 탄환 방지용으로 판옥선 갑판 벽 높이라고 지시)(도중에 판옥선은 한척이 더 추가가 된다.)8월 5일곡성읍에 도착, 고산 현감 최진강에게 신병 인수8월 6일 옥과 도착, 파직 전 수하였던 이기남,정사준,조응복,양동립 편입8월 7일옥과에서 순천으로 가던 길에 해산 직전의 이복남의 부대를 만나 수군에 편입+군마와 병기도 확보8월 8일순천 도착, 광양 현감 구덕령,나주 판관 원종의,옥구 군수 김희온 편입 무책임하게 군기창고와 군량미를 소각하지 않고 도망친 관리 덕분에 여기서 무기와 군량비 확보 (반나절 차이로 왜군보다 먼저 수습함.-삼도수군 통제사 부임 이후 하루만 늦었더라도 모두 왜놈꺼될뻔함)8월 9일낙안 도착, 순천부사 우치적,김제 군수 고봉상 편입보성 조양창 도착, 이곳에서도 병기창고를 소각하지 않은 무능한 관리덕분에 무기와 군량미 확보 계속 수습과정을 거치면서 신병 1천명,군량미 1개월분,전투 1회분의 병기 수습이때 이동경로 동선이 330km나 된다. 나라의 배신과 수군의 전멸,어머니의 죽음,고문 후유증,백의종군의 치욕을 겪은사람이라는게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의지와 능력을 보인 초인적인 수습과정이었음.8월 20일판옥선 갑판 개조 완료, 함대를 이진으로 이동8월 26일왜군의 척후선 8척 접근, 이를 후퇴하는 척하면서 어란진으로 유인 물론 왜군은 이순신함대인줄 모르고 원균함대의 패잔병이라고 생각함8월 28일~9월 7일어란진까지 따라온 8척의 척후선 격파작은 승리지만 해전경험 전무한 신병들에겐 경험을 패닉상태에 빠진 기존 병사들에겐 사기를 높이는 역할을 함왜군측에선 수륙병진책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12척의 조선수군 패잔병을 소탕하기 위해 55척 대함대를어란진에 보냈으나 조선수군은 이미 어란진을 떠남. 당황한 왜군측은 12척만 따로 수색을 보냄이미 왜군측 동선 감지망을 확보하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 수색중인 왜군 12척을 공격하고 왜군은 퇴각함왜군은 병력수로 제압하기 위해 25척으로 벽파진 공격계획함. 왜군의 야습까지 간파하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은일부로 왜군 눈에 잘띄는 곳에 작은 협선에 불을 밝혀 일부로 표적이되게하고 본함대들은 매복함예상대로 벽파진으로 왜선이 왔고 왜선들은 미끼가된 작은 협선을 공격함. 그러자 매복해있던 함대들이 일제히 함포 세례를 퍼부어 왜선을 격퇴함이때부터 12척 패잔병의 수장이 이순신임을 알게됨. 일본군 사기도 떨어짐. 하지만일본쪽에서도 이순신이라고 해도 패잔병으로 수백척을 당해 낼리 없다고 판단하고 강화기간동안 크기를 늘린 함대수백척를 포함해 10만명의 병력이 벽파진에서 70리 떨어진 어란진에 집결함9월 9일왜군은 정탐선 2척을 벽파진에 보내 지형,수로,이순신함대의 병력 재확인왜군 정탐선이 왔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이순신 장군은 일부러 관망만 함. (왜군을 벽파진으로 공격하길 유도)9월 14일병사들에게 결사항전하자는 연설함. 그리고 우수영에 있는 명량의 해협을 이용하기로 함.(이 해협의 특징은 유속이 빠르고 함초가 많으며 폭이 좁다.)9월 15일이순신 함대는 순류를 타고 명량해협을 통과하여 우수영으로 진을 옮긴다9월 16일3시~ 일본군연합함대는 어란진에서 출발 벽란진으로 총출격함. 하지만 이순신 함대는 이미 전날에 떠나 사라짐. 왜군측에선 이순신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겠지만실은 일본 대함대를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유도한 것이다. (벽란진에서 서진할 곳은 우수영 방면 뿐이기 때문)7~8시 순류를 타고 손쉽게 울돌목 근처까지 접근한 왜군<명량해전 시작>12시~13시 구루시마를 선봉장으로 한 133척의 함대가 명량해협에 접근하고 그 뒤를 수많은 함대가 따르고 있다. 현재까진 물살도 잠잠하고 도망갔다고 생각한 조선수군이 명량해협에서도 가장 좁은 울돌목에서 진을 치고 있다. (하지만 대장선만 앞서 있고 대규모 함대가 시야에 들어오자 나머지 배들은 1km밖까지 도주하여 관망만 한다.) 대장선의 장기를 보고 이순신이 있다는걸 알아챘지만 압도적인 전력차 덕분에 구루시마는 강한 자신감을 보이며 대함대를 전진시킨다. 하지만 좁은 해역때문에 종대 전진을 했고 재빨리 조선수군을 포위하기 위해 좌우로 진을 펼치려 했으나 몇몇 함선은 암초에 걸려 기동불능에 빠진다. 그래서 다시 중앙으로 재집결하는데 이상하게 조선수군은 반응없이 관망만 한다. 이틈을 타서 왜선은 계속 전진하여 해협을 통과한다. 이 때를 맞춰서 대장선 혼자서 지자포,현자포,함재포를 난사하면서 구루시마 선봉전함들이 불길에 휩싸인다. 이렇게 앞선 함대의 기동력을 저해시킨 후 조란환을 이용하여 선봉 왜적들을 몰살시킨다. 앞선 왜선들은 포사격에 초토화가 되고 뒤를 따르는 왜선들은 후방에 가득한 왜선들로 퇴각도 불가능한 진퇴양난 속에서 죽기살기로 돌격을 시작한다.13시~ 참다못한 이순신장군이 중군기와 초요기를 올린다. 이에 안위와 김응함이 대장선을 지원하러 온다. 이순신 장군은 안위에게 "군법에 죽고 싶으냐? 싸움이 급하니 우선 먼저 공을 세우게 한다"라고 호통을 친다 안위와 김응함이 일본 군함에게 진격하기 시작했고 안위의 배에 둘러싼 3척을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 대장 정응두가 포격을 해 구루시마가 바다에 빠졌다. 이를 지켜본 항왜 병사 준사가 붉은 옷을 입은 저자가 구루시마라고 알려준다. 이를 들은 이순신 장군은 김돌손을 시켜 구루시마를 끌어올려 구루시마의 몸을 토막내어 효시한다. 조선군의 사기는 급격히 올라갔고 일본군의 사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침 조류도 반대로 바뀌어 조선군에겐 순조, 일본수군엔 역조가 대어 상황이 역전되었다. 왜군 입장에선 선회가 어려운 첨저선 구조상 좁은 해역에서 역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배를 운신하여 전열을 정비하는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전황이 크게 바뀌자 전투지 1km밖에서 관망중이던 김억추를 비롯한 10척이 합류해 일제히 포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당파에 반격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좁은 수리에 많은 군선이 오히려 독이되어 서로 부딪히기까지 했다. 이 대혼란 속에 일본군 군감 모리 다카마사는 바다에 빠졌다가 간신히 구조되었고 명량해전 일본군 총사령관 도도 다카도라는 부상까지 입었다. 13척이 130여척이 넘는 대합대를 추격하는 형세로 전투는 끝이 났으며 일본군은 17~19시 무렵 다시 바뀐 조류를 이용해 퇴각 하였다.참고문헌 및 사이트:난중일기,실록,징비록,위키백과,엔하위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