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고백은 거짓말보다
뾰족하지
눈썹 밑 대롱 달린 고드름같이
내가 실은 널 사랑,
하지 않는다는 것
어제 내린 눈이
녹지 않았다고
눈 위를 기쁘게 걷는다 하여
내가 좋아한단 말은 또 아니지
츄파춥스를 빨던 입술로
상냥하게 헤어지기
딸기향은 날아가고
사탕 막대기처럼 서서
전하는 말
사랑했다는
옛일
티끌이던 눈발이
무릎 꿇은 독백들이
서늘한 발음으로
까맣게
얼음 덩어리를 부풀리는 새벽
- 폭설 이후 / 김은경

너를 꿈꾼 밤
문득 인기척 소리에 잠이 깨었다
문턱에 귀대고 엿들을 땐 거기 아무도 없었는데
베개 고쳐 누우면 지척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나뭇가지 스치는 소매깃 소리
아아, 네가 왔구나
산 넘고 물 건너 누런 해 지지 않는 서역 땅에서
나직이 신발을 끌고 와 다정하게 부르는
너의 목소리
오냐, 오냐, 안쓰런 마음은 만릿길인데
황망히 문을 열고 뛰쳐나가면
밖엔 하염없이 내리는 가랑비 소리
후두둑
댓잎 끝에 방울지는 봄 비 소리
- 너의 목소리 / 오세영

얼어붙은 남한강 한가운데에
나룻배 한 척 떠 있습니다
첫얼음이 얼기 전에 어디론가
멀리 가고파서
제딴에는 먼바다를 생각하다가
그만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룻배를 사모하는 남한강 갈대들이
하룻밤 사이에 겨울을 불러들여
아무데도 못 가게 붙들어둔 줄을
나룻배는 저 혼자만 모르고 있습니다
- 남한강 / 정호승

안경 낀 첫사랑 남자애와의 실연도 짧게 이루어졌다
흘레붙은 개들이 다시 동네 지붕을 흔들어댔다
대문에 녹슨 자국들이 그 아이 여드름처럼 박혀 빛나고 있었다
성난 고드름처럼 아니 곧 녹을 것처럼
- 1995년 2월 14일 中 / 김은경

망치가 못을 친다
못도 똑같은 힘으로
망치를 친다
나는
벽을 치며 통곡한다
- 사랑 / 이산하

나 여기 전봇대처럼 서 있을게
너 한 번 지나가라
그냥 아무렇게나 한 번
지나가거라
옷깃 만져 보거나 소리내어 울거나
안 보일 때까지 뒷모습 주시하지도
않을 테니 그냥 한 번
지나가거라
시장을 가듯이 옆집을 가듯이
그렇게 한 번 지나가거라
- 그리움 / 김종환

바람 든 노을을 마셔요
아무 이유 없이 내가 사랑에 빠질 때
벌레 먹은 포도나무 잎사귀가 열매의 통증을 읽어요
사라지는 구절들을 느리게 후렴하는 밤
흙과 자갈, 오래된 구릉과
나도 모르게
잘 여문 눈물
취한 시간을 위한 말들 中 / 김은경

바위도 하나의 꽃이었지요
꽃들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찾은 후
나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주신 후
나는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시들지 않는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바위도 하나의 눈물이었지요
눈물도 하나의 바위였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나를 떠난 후
나의 손을 영영 놓아버린 후
나는 또 한 송이 석련으로 피어났지요
당신을 향한 연꽃으로 피어났지요
- 석련 / 정호승

벼랑 앞에 서면
목숨 걸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
마이산 탑사 앞
암벽을 끌어안은 능소화 또한
아무도 받아 줄 이 없는 절박함이
벼랑을 끌어안을 힘이 된 것이리라
매달리는 사랑은 언제나 불안하여
자칫 숨통을 조이기도 하지만
실낱같은 뿌리마저 내밀어
지나간 상처를 바아들여야
벌어진 사이가 붙는 거라며
칠월 염천 등줄기에
죽음을 무릅쓴 사랑꽃 피었다
노을빛 조등 줄줄이 내걸고
제 상 치르듯
젖뗀 잎들은 바닥으로 보내며
생의 절개지에 벽화를 그리는 그녀
목숨 걸고 사랑한다는 것은
살아서 유서 쓰는 일이다
- 어처구니 사랑 / 조동례

고백건대 태어나 한 번도 외롭지 않은 적 없었으므로
나는 오늘도 너를 사랑한다
나는 오늘도
폭발 직전의 먹구름을 시로 바꾸어 읽는다
- 어떤 이유 中 / 김은경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어요
당신은 서산 너머로 흘러갔을 뿐인데
나는 아직도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지상의 그늘들이 포개지는 저녁이 와도 내 산책은 저물지 못했는데
나는 계속 덧나기만 했어요
덧난 자리마다 부끄러운 길을 만들고 그 길은 또다른 길들로 무수히 갈라졌어요
갈라져서 돌아오지 못했어요
이제 가느다란 가지들로 남아 나는 아무것도 붙잡을 수가 없어요
내 산책은 당신을 붙잡을 수 없어요
다만 이렇게 흔들리기 위해 이렇게 오래 흩어졌던 거예요
내 생의 이렇게 많은 다른 가지들을 만들었던 거예요
당신이 손짓하는 것이 보였어요
- 생의 다른 가지 / 이수명

너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 때
너의 어깨에 기대어 마음놓고 울어보고 싶을 때
너와 약속한 장소에 내가 먼저 도착해 창가에 앉았을 때
그 창가에 문득 햇살이 눈부실 때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뒤늦게 너의 편지에 번져 있는 눈물을 보았을 때
눈물의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어이 서울을 떠났을 때
새들이 톡톡 안개를 걷어내고 바다를 보여줄 때
장항에서 기차를 타고
가난한 윤동주의 서시를 읽는다
갈참나무 한 그루가 기차처럼 흔들린다
산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산다는 것인가
- 윤동주의 서시 / 정호승

거문도에 들었네
동백을 보러
절벽 앞을 세워
그댈 보려 왔었지
와서 못 본 것
꽃만 아니었네
져서 처참하네
뚝뚝 목을 분지른 동백
피가
햇볕에 타들어 가네
다리를 절룩이며
머리를 조아리며
거문도 우체국에서
편지 마저 쓰지 못하네
하늘은 바다
바다는 바다
수평선 다방이 바다더러
수평선을 구걸하네
- 수평선 다방 / 김은경

눈사람 한 사람이 찾아왔었다
눈은 그치고 보름달은 환히 떠올랐는데
눈사람 한 사람이 대문을 두드리며 자꾸 나를 불렀다
나는 마당에 불을 켜고 맨발로 달려나가 대문을 열었다
부끄러운 듯 양볼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눈사람 한 사람이
편지 한 장을 내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밤새도록 어디에서 걸어온 것일까
천안 삼거리에서 걸어온 것일까
편지 겉봉을 뜾자 달빛이 나보다 먼저 편지를 읽는다
당신하고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었습니다
- 꿈 /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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