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수, 그의 첫 인상은 예수였다. 가시나무 월계관을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 사지를 못박혀 얼굴과 팔 다리가 자신이 흘리는 피로 뒤덮인 뼈다귀만 남은 남자. 정확히 주님의 형상으로 그는 내게 도착했다. 하얗게 새어 봉두난발인 머리와 아무렇게나 자라 목덜미까지 내려오는 흰 수염,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체와 넝마 같은 바지만 입은 옷차림이었다. 얼굴엔 전 인생을 고뇌로 보내버린 듯한 주름이 가득했고, 그것들은 지나치게 움푹 패여 어떤 모양으로 바뀌어도 웃는 표정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훤히 드러난 상체는 갈비뼈의 형태가 선명하게 관찰될 정도로 말라 붙어 있었다. 뼈 사이는 하나같이 깊은 고랑을 이루고 있었고, 그가 마지못해 숨을 쉴 때마다 모든 갈비뼈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결정적으로 그는 양쪽 손목과 팔목, 그리고 얼굴과 목 부근에서 끊임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미 사지와 목덜미가 그가 흘려낸 피로 범벅이었다. 그의 하얀 수염과 봉두난발에 검붉은 피가 지저분하게 얼룩져 그를 더욱 숭고하게 보이게 했다. 그야말로 주님의 형상이었다. 만백성을 죄를 전부 짊어지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 십자가에 못 박혀 잔인하게 죽어간, 오, 주님.
2.
그 77세의 노인이 만백성이 아닌 자신을 위해 죽으려고 했다는 사실은 곧 명확해졌다. 보호자들은 예수를 둘러싸고 한숨을 짓거나, 혀를 끌끌 차댔다. 이 죽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 너무 지겹고 진부한 놀이인 것처럼, 왜 가만히 있어도 곧 죽어버릴 노인이 매번 다른 방법으로 죽음의 시도를 해야만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들은 같이 밀려 들어왔다. 이번에도 자살 시도를 하셨으니 빨리 치료를 해달라고만 했다. 아마도 숱하게 이어진 시도의 연장인 듯 싶었다. 나는 곧 모든 상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피가 많이 난다고 해서 꼭 깊은 상처는 아니다. 요란하게 피를 뒤집어 쓰고 온 사람일수록 더 흥분하지 말고 찬찬히 파악해야 한다. 옆에 떨어져 있던 것은 대못이 아닌 식칼이었다고 했다. 그걸로 얼마나 손발을 저몄느냐가 관건이었다. 나는 아예 큰 물동이를 들어다 놓고 핏자국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자살하려는 사람의 특징인 세로로 나란히 그어진 상처가 사지에서 나왔다. 그 깊이와 위치로 이 사람의 시도 과정을 그려낼 수 있었다. 저주받은 능력처럼, 그 연속된 장면이 눈 앞에 잘 만들어진 슬라이드처럼 고스란히 내게 투영되었다.
3.
그는 죽겠다는 마음을 굳건히 먹었다. 어느 때건 같은 생각이었다. 감시하던 가족들이 외출하자 그는 주방에서 잘 벼른 식칼을 한 자루 들고 방 안에 들어온다. 오른손잡이였으므로 식칼을 오른손에 들고 기도한다. ‘주님, 성공해서 곁에 머물게 해주소서,’ 그는 날을 아래로 오게 잡고 힘있게 왼쪽 손목을 썰어낸다. 왼쪽 손목에는 제법 깊은 상처가 나, 인대 몇 줄이 끊긴 활시위처럼 튕겨 나가고, 정맥이 썰려 피를 뿜는다. 하지만, 동맥을 완전히 썰어버리는 것은 의학 지식이나 힘이 부족한 일반인은 대게 성공하지 못한다. 77세 노인의 칼질이 동맥을 써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손목을 그었으니 죽을 것으로 판단하고 칼을 놓고 기다린다. 정신이 몽롱해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또렷하고 선명하다. 왼쪽 손목에선 출혈이 되려 줄어들고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 된다. 이미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무조건 이번에는 죽어야 한다.
그는 다급해진다. 이대로 가다간 왼손만 조금 불편해진 채로 살아남을 것이다. 재차 살아서 남은 자식들을 대할 면목도 없다. 자기가 죽고자 결심했던 일들과 행했던 모든 것들이 지나간다. 이번엔 달라야 한다. 그는 오른손에 다시 식칼을 들어 발목을 썰기로 한다.
하지만 발목은 손목처럼 연한 부위가 없다. 뒤쪽은 각도상 썰기 불편하고, 앞쪽은 딱딱하다. 그는 일단 손에 닿기 편한 왼발의 앞쪽 이음새를 썰어본다. 칼은 발목 앞에 툭 튀어나온 힘줄을 하나 끊어낸다. 그리고는 칼은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애초에 그 부위는 수술방에서 톱으로 썰어도 잘 안 썰리는 곳이다. 고로, 그의 다른 시도도 전부 찰과상으로만 그친다. 그는 왼 발목을 포기하고, 남은 오른 발목을 각도에 맞게 썰어본다. 하지만, 왼 발목의 시도와는 다를 것이 없었고, 오히려 더 불편했다. 이번에는 인대 한 개 끊어내지 못한다. 생채기만 나서 피만 조금 흘렸을 뿐이다.
그는 무슨 일이든 더 해보기로 한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나에겐 아직 오른쪽 손목이 멀쩡히 남아 있다. 이곳만 더 썰면 출혈이 누적되어 죽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오른손에 칼을 쥐고 오른손을 썰 수 없으므로 칼을 왼손으로 바꾸어 쥔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그는 오른손잡이이다. 그리고, 왼손의 인대는 이미 몇 개가 끊겼다. 멀쩡한 손으로도 하지 못한 일을, 성치 않은 왼손이 해낼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억지로 왼손에 쥐어진 칼은 오른쪽 손목에 끊긴 모세혈관 몇 개와, 찰과상만 남기고 금방 멈추어버린다.
그는 가죽이 벗겨진 사지와, 선명해져 오는 정신에 당혹감과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죽지 못해서 손가락질 받을 것이 너무 두려웠다. 처음부터, 어떤 이유로든 살고 싶지 않았다. 그는 피범벅이 된 오른손으로 다시 식칼을 집어 든다. 그리고 그는 충동적으로 목울대 부근을 썬다. 목을 긋는다면 무조건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의학적으로 목을 그어 죽으려면 정면을 비껴 옆으로 동맥을 썰면 무조건 죽을 수 있다. 아니면, 정 가운데를 찔러 기도가 밖과 통하게 되면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목을 썰거나 찔러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시도조차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이 남기고 갈 시신의 모습이 추해지는 것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살 시도자가 정확한 세로 방향으로만 손목을 긋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래서 사람이 오른손에 든 칼로 자신의 어디든 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육신이 덜 훼손될 것 같은 왼손이나 복부 같은 곳을 택한다. 목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칼을 들고 있다고 상상해보면 자명해진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연약하고 취약한 부위를 훼손해낼 수는 없다. 그것을 두려워 하는 것은 너무 거대한 본능이다. 고로, 자신의 목을 자신이 그어 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금기이다. 절대 아무도 그런 일을 벌이지는 못한다. 그걸 성공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는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사람이다.
어쨌든 그는 절대로 주님도, 초인도 아니었다. 절망스럽고 다급한 피 흘리는 77세의 오른손 아귀가 그의 목을 깊이 꿰뚫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의 목 울대의 피부가 몇 번 벗겨지고, 그는 칼을 던져버리고 드러눕는다. 그는 죽고자 했던 피로와 상처들이 주는 압박에 완전히 탈진해 버린다. 그래서 주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 예수가 탄생했다. 그는 십자로 누워 사지에 피를 흘리는 반 주검의 모습으로 집에 들어온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실려 온다.
4.
“. 죽는 것은 불가능한거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내가 지금도 지껄일 수 있고, 손발이 움직이면서 살아 있어야 하오? 으아아아. .”
그는 외모답지 않게 육두문자부터 내뱉었다. 하긴, 사지를 빼놓지 않고 훼손한 일은 나도 처음 보았다. 그 죽고자 하는 계획과 열망도 대단했을 것이고, 실패의 낙담 또한 대단했을 것이다. 이런 꼴에 욕을 조금 더 한다고, 그게 이 사람에게 무슨 대수일까.
“사지를 끊어 자살 시도하신 분들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사람을 괴롭게만 만들지요. 괴롭고, 살아 납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고, 제발 부탁이오. 어떻게 해도 죽을 수가 없어. 갖은 방법을 다 써봤소. 죽는다는 건 다 어도 멀쩡했단 말이오. 이 방법도 안 통하다니, 절망적이오. 그러지 말고 죽는 방법을 바로 알려 주시오. 확실한 방법으로, 당장 죽을 수 있는 걸로 알려달란 말이오.”
“일단 이 방법이 안 확실하다는 것만 알려 드리지요. 진짜로 죽으려면 다시는 손목 긋지 마세요.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게까지 인생을 끝내야 하는지 잘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의 나이에 절반도 되지 않는 내가 인생을 언급해서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맞았다. 그것보다 더 옳은 말이 있었을까.
5.
상처는 허무하게 얕았다. 그 깊이가 목숨에 가 닿기에는 가당치도 않았다. 나는 십자가에 못박힌 모양으로 누운 그에게 달려들어 기계적으로 실과 바늘을 들어 상처를 메워냈다. 그가 주님이었거나, 주님 곁에 있었으면 이런 수모도 없었을 것이었다. 인대는 가볍게 끌어당겨 붙였고, 한 상처마다 서너 바늘이 들어갔다. 순식간에 그의 손과 발이 피부로 덮였다. 그가 가지고자 했던 간격이 사정없이 매몰되었다. 그는 생각에 잠겼는지 꼼짝하지 않고 바늘을 받았다. 세상에 돌아왔으니,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정신과 치료는 완강히 거부하였으므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봉합밖에 없었다. 정신과 면담은 커녕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는 죽고자 하는 방법을 물은 후엔 절대로 입을 열지 않았다. 보호자들은 얼른 그를 데리고 집에 가서 다시 가둘 생각뿐이었고, 예수님도 방에 다시 갇힐 생각뿐이었다. 그의 무른 칼날처럼, 어떠한 이해도 그를 파고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기계처럼 말했다.
“봉합 위치가 많습니다. 2~3일에 한 번씩 소독을 받고 10~14일 후에 봉합된 것을 풀러야 합니다. 인대까지 봉합했으므로 최대한 움직이지 말고 손을 움직이는데 불편감이 있으면 추후 내원해야 합니다. 덧나고 염증이 생길 수 있으니 실밥을 풀 때까지는 항생제를 꼬박꼬박 드셔야 합니다. 봉합 후에도 치료를 잘 받으세요. 침상 안정이 필요하고요.”
“… 허허허… 소독. 허허…”
피를 닦아내서 깔끔해진 그는 부활한 예수처럼 집으로 비적거리며 걸어나갔다.
6.
그가 떠나고도 나는 자살한 사람 몇을 더 받았다. 그리고 그 날 그 사람들도 전부 내 곁에서 떠나버렸다. 그들은 집으로 가버렸던지, 죽어버렸다. 나는 나의 치료를 받아 내고 내 인생에서 영영 사라져버린 이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 예수는 식칼을 뽑아 들고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고독을 느꼈다. 그는 주님을 이를 악물고 갈망하다, 자신이 팔십여년을 죽기 위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죽기 위해 과거를 떠올려 근거 삼았다. 언제나 그는 위태롭다고 느꼈으며, 자신을 항상 부정했고, 한 사람을 미칠 만큼 증오했을 것이며, 배신에 치를 떨었고, 종국에는 숨을 쉬는 공기조차 역겨웠을 것이다. 장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그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었고, 식칼을 들어 자신의 손목을 써는 순간 자신의 결정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내 앞에 나타나기까지 그는 그랬다.
하지만 그가 세상으로 돌아온 곳은 그와 같은 결심을 했던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곳이었다.
가운을 입은 문지기는 서류를 받아 읽듯이 그를 보고, 침묵으로 일관하자 그를 내쳤다. 이 세상의 모든 문지기는 그런 역할을 한다. 세상이 침묵하는 그를 구제할 방법은 전혀 없다.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날카로운 바늘과 실, 그리고 지독한 진실뿐이었다.
그는 다른 궁리를 시작했을 것이고, 그의 수명과 죽고자 하는 열망 중에 어떤 것이 승리할지는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기술하는 동안에도,
나는 그 예수가 마음 속에서 죽어, 이미 주님 곁에 누워 있던 사람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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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경 왜 활동 뜸한것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