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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6/21) 게시물이에요







 비는 소리가 없다 | 인스티즈


김사인, 풍경

 

 

 

산모퉁이 잡초 욱은 길로

땡볕 맞으며 가네 흙투성이 늙은이 하나

황소 한 마리

새소리도 없네 바람 한 점 없네

발밑엔 푸석한 먼지

저 풍경, 아무도 말하지 않네

실한 팔다리들 다 어디로 가고

이 빠진 늙은것들만

기침에 넘어오는 가래를 우물우물 되씹어 넘기네

말하는 이 없네

세월은 홀로 저만큼 앞서가고

금 간 사발 몇 개 남아 있네

땀 흘러

해진 샤쓰는 등에 붙었네







 비는 소리가 없다 | 인스티즈


도종환, 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비는 소리가 없다 | 인스티즈


김수열, 비는 소리가 없다

 

 

 

정작 비는 소리가 없다는 걸

이대도록 모르고 살았습니다

하늘 어드메쯤에서 길 떠나

지상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비는 아무 텅 빈 후에야 알았습니다

 

비에도 길이 있어 그 길 따라

바다가 닿으면 파도 소리가 되고

키 큰 나무에 내리면

푸른 나뭇잎소리가 되고

더는 낮아질 수 없는 개울에 닿으면

맑은 물소리가 된다는 것

그와 헤어져 인사도 없이 돌아선 날

내 가슴으로 내리는 빗줄기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는 것 알았습니다







 비는 소리가 없다 | 인스티즈


허영숙, 신 심청가

 

 

 

논둑에 기지국처럼 박혀 있는 삽자루 곁에서

아버지 한 개비의 담배에 전원을 켜시네

그 곳에도 서리가 내렸느냐

제 몸을 긁어대는 둘째 놈의 아토피는 괜찮느냐고

걱정의 고랑을 일구는 궁금한 소식들

담배연기를 타고 아날로그로 전송되고 있네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새참처럼 내 안부 받으시라고 보낸 손 전화기 한 대

비싼 몸값을 이유로 날마다 장롱 속에 모셔져 있네

먼 산꼭대기 송신탑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안부가 바람을 타고 흐르는 동안

할부금의 횟수보다 더 짧게 닿았던 아버지는

저장순위 1번의 딸에게 늘 부재만 알리네

아버지

가끔은 내 목소리도 받으셔요







 비는 소리가 없다 | 인스티즈


천양희, 마음의 달

 

 

 

가시나무 울타리에 달빛 한 채 걸려 있습니다

마음이 또 생각 끝에 저뭅니다

망초꽃까지 다 피어나

들판 한 쪽이 기울 것 같은 보름밤입니다

달빛이 너무 환해서

나는 그만 어둠을 내려놓았습니다

둥글게 살지 못한 사람들이

달보고 자꾸 절을 합니다

바라보는 것이 바라는 만큼이나 간절합니다

무엇엔가 찔려본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달도 때로 빛이 꺾인다는 것을

한 달도 반 꺾이면 보름이듯이

꺾어지는 것은 무릎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들고 달빛 아래 섰습니다

들숨 속으로 들어온 달이

마음 속에 떴습니다

달빛이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어설 무렵

마음은 벌써 보름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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