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적이고 낭만을 즐길 줄 알았던
시인 이육사

<이육사>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 시로 이름높은 저항시인 이육사가 낭만가였다는 사실을 알고계신가요? 시인 이육사의 본명은 이활(李活)입니다. 이육사가 이러한 필명을 사용한 것은 1927년 북경에서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을 당시 받은 죄수번호가 264번이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얻은 죄수번호를 자신의 필명으로 사용할만큼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한 남자였지만 육사는 낭만과 시, 그리고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육사는 기자시절부터 양복을 멋지게 소화하는 패셔니스타였다고 합니다. 딸 이옥비 여사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보면 ‘광야’, ‘청포도’, ‘절정’ 등 육사의 주옥 같은 시에 나타나는 아름다운 필력과 상응하는 패션센스를 엿볼 수 있습니다.
“아이보리 색깔이었어요.
내가 그게 기억이 나서 어머니에게 맞냐고
물어보았는데 맞다고 하시대요.
서울 시구문 밖 문화촌(현재의 신당5동) 살 땐데,
지금은 없어진 그 양옥 집에서 술을 많이 드시고
늦게 들어오셔도
이불 밑에다 양복을 깔아야 주무셨대요”
<아버지 이육사의 옷차림에 관한 이옥비 여사의 기억 -00일보>
모더니즘 상징이었던 양복을 깔아야 꼭 잠을 잤다는 이육사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
시대적 환경이 좋았다면 육사는 정말 유명한 멋쟁이 시인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이옥비 여사의 회고처럼 육사는 장안에서 가장 잘하는 양복점을 찾아가서 옷을 맞추어 입었으며, 얼굴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달덩이같았고, 넥타이 한 번 구기는 일이 없는 단정하고 멋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육사는 양복에 상어가죽구두를 신고 진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식당을 찾아가거나, 버터도 고소한 맛이 없으면 그냥 버려두는 댄디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육사의 시 ‘청포도’의 소재가 된 청포도>
또한 육사는 가을꽃을 따서 술잔에 띄워 마실 줄도 알던 낭만가였습니다. 1942년 신석초와 국화를 따다가 술잔에 띄워주며 마시다가 급기야는 요정을 찾아가 밤 깊도록 술을 마신 일화는 유명한 얘기죠. 그리고 한시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대표작 ‘절정’을 살펴보면 한시의 형태인 '기 - 승 - 전 - 결'의 구조에 독립에 대한 의지와 열망을 담아냈습니다.

<북경을 드나들던 시절에 부여루 앞에서 찍은 육사의 모습>
보헤미안 같은 낭만적 성향과 댄디한 패셔니스타로서의 기질을 모두 갖췄지만 육사의 본질은 대한독립의 열망에 가장 가까웠습니다. 육사는 군사훈련단에서 백발백중으로 이름높은 명사수로 통했고, 국내외를 몰래 드나들기 위해 변장술에도 뛰어났다고 전해집니다.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몸담아 감옥에 갇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육사의 부인 안일양 여사의 회고에 따르면 ‘감옥에 새 한복을 넣어주면 며칠 뒤 옷이 피범벅이 돼 나올 정도’로 혹독한 고문과 매질 앞에서도 독립운동의 의지를 꺾지 않은 저항시인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가 암울했던건 맞지만,
이렇게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모던보이들이 양복이나 양장을 안입고 나온다면?
그건 또 고증적으로 문제가 있을거같음
신문물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았을것 같고
죽고싶을 만큼 힘든 시기였겠지만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양복은 거의 기본이었고 (그때 유명 모던보이는 전부 양복입음)
우리가 보통 매체에서 접하는 드라마 영화 이런것도
일제강점기 주인공들이 일반인이 아닌 지식인들이라서
양복 입고 나오는건 어쩔수 없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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