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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4518
이 글은 8년 전 (2017/6/25) 게시물이에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상언(上言)하였다.
 
“이제 임금이 되신 초두에 있어서, 의복과 기구와 패물 등을 만들어 쓰는데 검소하고 간략하도록 힘써서 자손 만대에 본을 보여야 될 것입니다. 사(紗)·나(羅)·능(綾)·기(綺) 등 각색 무늬 있는 비단과 진채(眞彩)는 남의 나라의 물건으로 대 쓰기 어려우며, 금과 은은 또 해마다 공물(貢物)로 바치게 되어 대기 어려운 것인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다 통용하여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이익만 아는 무리들은 무역(貿易)을 모의하여 남몰래 국경을 넘어가서 말썽을 일으키게 되니, 그 폐해가 적지 않습니다. 원컨대 이제부터는 사·나·능·기와 금은으로 만든 패물 같은 것은 궁중에〉 진상하는 것과 관원들의 품대(品帶)에 소용되는 것 이외에는 의정부와 중추부 이하 시민에 이르기까지 일체로 금지하고, 공사(公私)의 가옥이나 사원(寺院)에는 진채를 쓰지 못하게 하며, 승지 이상 이외에는 금이나 옥으로 만든 갓끈을 달지 못하게 하고, 유밀과(油蜜菓)와 사화봉(絲花鳳)·금은저(金銀箸)·채화초(彩花草)는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 이외에는 모두 금단하게 하소서.”
 
이에 임금이 말하였다.
 
“사·나·능·기와 금·은·주·옥은 각 품관(品官)들의 의복과 말안장과 고삐에 쓰는 등급을 다시 의논해서 보고하고, 비밀히 국경을 넘어가서 무역을 하는 자들은 돈이나 물건이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주범이나 공범을 모두 참형하게 하라.”
 

조선은 다들 아시다시피 민무역을 금지하고 관무역만을 행했으며, 관무역 역시도 중국과의 육로를 통한 무역을 주로 행했습니다. 그 이유는 명나라가 행한 해금정책을 조선이 따랐기 때문이죠. (이렇게 텅텅 빈 아시아의 해역은 일본이 차지하고 일본의 급성장으로 이어집니다.)

고려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의외로 무역 의존도가 높았습니다. 심지어 고려인들은 스스로가 이미 무역을 통해서 진귀한 것들을 다 얻으니 꼭 송나라와 '정식' 통교해서 얻을 것이 없다는 자신감까지 보여줬지요. 그렇게 고려시대를 거치며 많아졌던 사치품들을 조선은 위와 같이 금지시킵니다.

이 법안으로 가옥에 치장했던 금은들은 모두 사라졌으며, 동시에 고려시대까지 허용되어오던 진채, 즉 가옥에 하는 채색은 모두 금지가 됩니다. 즉, 귀족들의 화려한 단청, 채색들.. 그리고 금은으로 장식했던 모든 것들이 다 이 때 사라집니다. 태종대의 이야기입니다.

 


“대소 신민의 가옥이 정한 제도가 없어, 이로 말미암아 서민의 가옥은 참람하게도 공경(公卿)에 비기고 공경의 주택은 참람히 궁궐과도 같아서, 서로 다투어 사치와 화미(華美)를 숭상하여, 상하가 그 등위(等位)가 없으니 실로 온당하지 않은 일이다. 이제부터 친아들 친형제와 공주는 50간(間)으로 하고, 대군(大君)은 이에〉 10간을 더하며, 2품 이상은 40간, 3품 이하는 30간으로 하고, 서민은 10간을 넘지 못할지며, 주춧돌을 제외하고는 숙석(熟石)1615) 을 쓰지 말 것이다. 또한 화공(花拱)과 진채(眞彩)·단청(丹靑)을 쓰지 말고 되도록 검소·간략한 기풍을 숭상하되, 사당(祠堂)이나, 부모가 물려준 가옥이나, 사들인 가옥, 외방에 세운 가옥은 이 제한을 받지 않는다. ”



이번에는 세종대왕 시기입니다. 여기서 고려시대 귀족, 부농들의 가옥이 어땠는지 간단히 알아볼 수 있는데, 서민의 가옥이 공경에 비기고 공경의 주택은 궁궐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궁궐이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경복궁등은 임진왜란때 깡그리 불타고 그 터에다가 다시 세운 궁궐입니다. 다만 기록을 통해서 당시 기록에 2층 구조의 건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합니다.



“내가 풍질을 얻은 까닭을 경은 반드시 알지 못할 것이다. 저번에 경복궁에 있을 적에 그때가 바로 한창 더운 여름철이었는데, 한낮이 되어 잠시 2층에 올라가서 창문 앞에 누워 잠깐 잠이 들었더니, 갑자기 두 어깨 사이가 찌르는 듯이 아팠는데 이튿날에는 다시 회복되었더니, 4, 5일을 지나서 또 찌르는 듯이 아프고 밤을 지나매 약간 부었는데, 이 뒤로부터는 때 없이 발작하여 혹 2, 3일을 지나고, 혹 6, 7일을 거르기도 하여 지금까지 끊이지 아니하여 드디어 묵은병이 되었다."



세종대왕은 2층의 창문 앞에서 누워서 잠을 청하다가 풍질을 얻으셨답니다. 즉, 조선 전기의 경복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경복궁과 상당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아래 그림은 일본이 그린 경복궁 상상도인데, 상상도이기 때문에 실제와 많은 차이가 있었겠지만 최소한 지금의 경복궁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는걸 예상해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두지만, 상상도이기 때문에 실제와는 거의 다를 것입니다. 지금은 사진을 찾를 수 없는데, 조선 중종 시절의 경복궁 근정전을 그려놓은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을 살펴보면, 조선 전기의 근정전의 좌우 측문이 2층 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지금 남아있는 경복궁은 대원군이 고종 시절의 양식으로 아예 새롭게 만든 근대의 건축물입니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작은 이유는 무엇일까? | 인스티즈


이렇듯 고려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제한없이 집을 지었던 고려인들은 조선시대에 들어서 제한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한을 받기 이전의 고려인들의 가옥이나 그런 것들이 어떠했는지는 고려 도경에도 간략하게 나와있습니다. 귀족들의 집이 궁궐.. 그것도 지금의 경복궁보다 더욱 큰 건물들이 즐비했던 궁궐에 비할 수 있을 만큼 화려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도경은 고려시대 사회와 생활, 건축물에 대해서 가장 자세히 나와있는 책인데, 일부 귀족들의 집이나 사원, 사신들의 숙소 전각에 대해서 "왕의 거처를 능가한다" 라는 표현이 수도없이 등장합니다. (반면 가난한 백성들의 민가는 개미집처럼 옹기종기 모여있다고도 하지요.) 고려시대 왕의 거처라고 한다면 당연히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만월대일겁니다.



조선시대 건축물이 다른 나라에 비해 작은 이유는 무엇일까? | 인스티즈


이 녀석을 능가하는 건물이 수도 안에 적어도 4,5 개는 있었던 셈입니다. 참고로 정전인 회경전(위 그림)은 경복궁 근정전보다 규모에서 4배, 길이에서 1.5배에 이르는 거대 건축물이었습니다. 물론, 서긍이 말한 왕의 거처가 회경전을 의미하는지 침전을 의미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요. 게다가 우리 기록에서도 공경들의 저택은 엄청나게 화려했다고 적혀있습니다.


공경들의 저택이 10여리에 뻗쳐있는데,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누각은 봉황이 춤추는 듯 이무기가 기어오르는듯. 
서늘한 마루와 따스한 방이 즐비하게 갖춰져 있고, 
금벽이 휘황하며 단청이 늘어섰네.

비단으로 기둥싸고 채전으로 땅을 깔고, 
온갖 진기한 나무와 이름난 화초들, 
봄의 꽃과 여름 열매, 푸른 숲에 붉은 송이, 그윽한 향내 서늘한 그늘이 한껏 곱고 아름다움을 뽑내어오네.





-최자 [삼도부] 중에서-




아래는 조선 전기 한성의 모습을 담은 <조선부>입니다.



[서울의 모습은]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서울에는]종고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시끌벅적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식기는 금, 은, 동, 자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物産)이 또한 번성하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즉, 정리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던 백성들의 화려한 가옥들은 태종, 세종대에 걸쳐서 검소함을 강조한 조정 덕택에 매우 작아졌고, 그 이후 임진왜란을 거치며 더더욱 검소해져서 내려왔습니다. 그나마 화려함을 유지했던 궁궐 역시 임진왜란 덕택에 다 불타버리고 그 뒤 수백년이 지나고 건설된 경복궁은 전기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림엑박

위 그림은 조선 전기 의정부의 모습인데, 보시다시피 2층은 아니어도 이중기와를 사용했습니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을 겪고 일반 기와로 다시 지어집니다. 이렇듯 임진왜란을 전후로 조선 건축물은 안 그래도 정부 주도로 검소화되었던 것이 더욱 더 검소화됩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건축물들은 하나 같이 검소한 규모가 되었답니다. -.-




http://topsy.tistory.com/1647 [팔만대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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