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편 - 대조영과 돌궐 묵철가한의 밀월관계
2편 - 발해 군왕 대조영, 당나라 현종과 제휴하다
3편 - 무왕 대무예의 즉위, 강력한 무력을 꿈꾼 군주
4편 - 새로운 시험대: 후방에 가해지는 당나라의 위협
강경파 대무예 vs 온건파 대문예
안동도호 설태의 건의를 받아들인 당 현종이 726년 흑수말갈 지역에 기미주를 설치하여 영역화 작업을 시도한 것은 앞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발해의 후미를 위협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따라서 발해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많은 의견이 오갔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대표적인 일화가 무왕 대무예와 그의 동생 대문예의 에피소드입니다.
당시 무왕은 강경 대응을 생각했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발해 지배층 모두가 무왕에게 동조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당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인정한 흑수말갈 지역을 토벌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당과의 전쟁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대문예가 서 있었습니다.
대문예는 현재 발해의 국력이 당의 '몇 만 분의 일'도 안 된다고 하며, 강성한 고구려도 당에게 멸망당하였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무왕을 설득하려 합니다. 결과적으로 무왕은 대문예의 만류를 거부하고 본격적으로 흑수말갈 토벌 준비에 착수합니다. 대문예는 당에서 장행급을 발해로 보냈던 705년(고왕 8년), 장행급 일행을 따라 당에 들어가 숙위로 체재하다가 개원연간(713~742) 초에 귀국한 경험이 있던 인물입니다.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장안에 있으면서 당의 실상을 보았던 인물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발언이 현실을 직시한 충언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당의 군사력만 놓고 생각하면 당 제국의 팽창세가 극에 달한 고구려 멸망 시와 세력 수축기에 들어간 지 꽤 된 개원연간을 비교하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당대를 살았던 사람의 입장에서는 달리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무예와 대문예의 대립은 단순한 견해 차이로 볼 수만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과 외교적 마찰이 생긴 그 시점에서, 발해 조정이 대무예로 대표되는 강경파와 대문예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분열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발해의 후계 구도 문제와도 연관된 사항입니다. 대조영의 수명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단 그가 '고구려의 장수'였다는 기록을 감안한다면, 최소한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에 20살 전후한 연령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719년 서거할 때에는 70살 전후한 나이가 됩니다. 그렇다면 대조영의 아들들인 대무예와 대문예 역시 고왕의 서거 시에 40~50대 정도의 장년이었다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대조영의 치세(698~719)에 대무예·대문예 형제가 성인으로서 조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설령 대조영의 나이를 10살 어리게 본다 해도 그러한 면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무예·대문예 형제가 발해 건국 시점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임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그러므로 대무예 못지 않게 대문예의 위상도 상당했을 것입니다. 무왕대는 아직 발해건국 시 활약했던 세대들의 입김이 강하였을 것이고, 그러한 상황 아래서 대문예는 비록 왕제의 위치였음에도 지지 세력을 등에 업고 상당한 세력을 자랑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문예의 무왕에 대한 이견 표출은 1인의 의견이라기보다, 대문예를 중심으로 뭉쳐진 대당온건파의 목소리라 하겠습니다.
요컨대 당 현종의 흑수말갈 영역화 조치를 두고, 발해 조정은 무왕 대무예를 중심으로 하는 강경파와 대문예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가 대립하게 됩니다.
결국 무왕 대무예를 비롯한 강경파의 주장대로 흑수말갈 토벌이 단행됩니다. 재미있는 점은 흑수말갈 토벌군의 지휘관이 대문예였다는 점입니다. 대당강경책을 극렬히 반대하던 인물이 대당강경작전의 일환인 흑수말갈 토벌전의 책임자로 삼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문제는 추후 발해 무왕대의 역사적 실상을 되돌아보려면 간과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대문예와 함께 파견된 이는 무왕의 장인인 임아(任雅)란 인물입니다. 임아의 '임'이 성씨인지, 아니면 임아 자체가 이름이고 성씨가 없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알기 힘듭니다. 여하튼 대무예의 노선에 반대한 대문예와 대무예의 장인인 임아 2인이 토벌군을 이끌었다는 것을 보면, 훗날 요동정벌 때 최영이 이성계와 조민수로 정벌군을 이끌게 한 사실도 떠오릅니다.
그런데 토벌군의 총책임자가 된 대문예는 국경지대에 이르러 다시금 토벌의 재고를 요청하는 상소를 올립니다. 이 부분도 요동정벌 시 이성계의 행동과 비슷합니다. 이성계의 경우에는 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개경으로 진격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렇다면 대문예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일단 대문예는 상소를 올리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상소를 받은 무왕은 진노하여 대문예 대신 사촌형 대일하를 파견하고, 대문예를 소환케 합니다. 소환령은 곧 처벌을 말합니다. 이에 대문예는 곧바로 당에 투항합니다.
참고로 대문예를 대신하여 토벌군을 이끌게 된 대일하는 대무예의 사촌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일하의 부친과 대무예의 부친이 형제라는 말이 됩니다. 대무예의 부친이 대조영인 것이야 주지의 사실이고, 대조영의 형제로 잘 알려진 인물은 대야발입니다. 대야발은 당대에는 전혀 주목받지 못한 인물입니다. 그렇지만 그 4세손이 선왕 대인수이고 이후 발해의 왕계가 대인수의 후손들로 이어지기 때문에 발해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합니다. 만일 대야발의 아들이 대일하라면, 이는 바꿔 말해 대일하가 대인수의 증조부 뻘에 해당할 수도 있게 됩니다.
대일하의 흑수말갈 토벌 이후 흑수말갈은 물론이요, 흑수말갈과 발해 사이에 위치해 있던 월희말갈·불열말갈·철리말갈 등의 당으로의 조공 역시 당분간 단절됩니다. 이로 보건대 726년 대일하의 흑수말갈 토벌전은 일단 성공으로 끝난 것 같으며, 당 현종의 흑수말갈 영역화 계획은 실패했다고 여겨집니다. 애초와 당과 흑수말갈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흑수말갈 토벌은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당시 발해의 병력이 수만, 흑수말갈의 병력은 7천 정도로 여겨집니다. 물론 흑수말갈은 중국인들이 동이지역에서 가장 사납고 싸움에 능하다고 표현할 정도이니, 그들과의 싸움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흑수말갈 토벌전이 성공으로 끝난 뒤 무왕은 당 현종에게 대문예의 송환 및 처벌을 요구합니다. 당 현종이 이 요구에 응할리는 없었습니다. 일개 번국의 수장 말을 듣는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 될 뿐더러, 당 조정으로서는 발해 내부의 의견 대립, 즉 강경파와 온견파의 대결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대문예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투항 이후 대문예는 당 현종으로부터 좌효위장군에 제수됩니다.
대문예 처벌을 요구하는 무왕의 요구가 집요하였기에, 당 현종은 대문예를 일단 안서 지방(=돈황 서쪽의 투르판·타림 분지 일대)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무왕에게는 영남(=광주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고 거짓으로 알립니다. 하지만 곧 이 거짓은 드러났고, 이를 알게 된 무왕은 재차 당에 항의하였습니다. 당 현종은 대문예의 유배에 관한 사실을 누설한 담당 관리를 좌천시키고 결국 대문예를 유배보내고 맙니다.
당 현종이 이렇게 무왕의 요구에 온건하게 대처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료상으로는 726년 이 해에 해족의 추장인 이노소를 '봉성왕 우우림군원외장군'에 임명하는 등 당의 동북 경략에 큰 문제가 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흑수말갈 토벌전에서 발해군이 대활약을 한 것을 들었거나, 혹은 돌궐과 관련된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당 현종이 무왕의 요구에 결과적으로 응하는 조치를 취할 즈음 발해 역시 다소 온건한 태도를 보입니다. 바로 무왕의 아들 대도리행이 '좌무위대장군 원외치숙위'에 임명되어 숙위의 역할로 당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물론 대도리행을 보낸 것은 발해조정이었지만, 대도리행이 720년에 당 현종에 의해 '계루군왕'에 책봉된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즉위 전 대무예가 당 조정으로부터 받은 책명이 '계루군왕'입니다. 따라서 '계루군왕=발해의 태자'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태자가 훗날 왕위를 이을 인물로 나라 안에서 막중한 위치에 있음은 발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무왕이 태자 대도리행을 당에 머물게 했다는 것은 무왕 역시 더 이상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을 보여주는 사건은 아닐는지요? 혹 그러한 면을 인정한다 해도, 대도리행이 당에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했을 가능성 역시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당에는 무왕의 악의 축이 되어버린 대문예가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다사다난했던 726년의 상황 정리는 일단 마칩니다.

** 당 현종이 대문예를 보낸 안서는 지도에서 보자면 돈황보다 서쪽에 위치한 투르판 일대입니다. 그리고 당 현종이 무왕에게 대문예의 유배지로 말했던 영남은 지도에서 광저우를 중심으로 한 남중국 일대를 말합니다. 참고로 일전에 올린 글에서 고선지가 등장하기 전 당 제국의 서쪽 경역은 돈황 정도가 아닐까 하는 짧은 생각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당 현종 시기에도 일단 투르판과 타림강 일대는 장악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물론 그 지배의 실상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 본 연재물은 총 9부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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