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https://instiz.net/pt/4643223주소 복사
   
 
로고
인기글
필터링
전체 게시물 알림
유머·감동 이슈·소식 정보·기타 고르기·테스트 팁·추천 할인·특가 뮤직(국내)
이슈 오싹공포
혹시 미국에서 여행 중이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1470
이 글은 8년 전 (2017/7/12) 게시물이에요

무역길을 제외하면 바닷길 중에 으뜸은 역시 ‘전쟁의 길’이 아닐까 싶다.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니는 동북아의 전쟁 바닷길은 산둥 반도 등주(덩저우)쯤에서 발해만의 섬들을 건너 요동(랴오둥) 반도로 건너가는 길이다. 자잘한 섬들이 발해만에 포진해 그 섬들을 징검다리 삼아 랴오둥 반도를 공략할 수 있다. 수·양·당 제국의 전쟁 행보가 그러하였다.

지금부터는 임진왜란의 바닷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4만3000여 병력을 이끌고 압록강 건너 조선으로 들어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은 요동 철령위(鐵嶺衛) 출신이다. 수군을 이끌고 들어온 진린은 강남(양쯔강 이남 지역) 광동(광둥) 출신이다. 육군과 해군은 같은 중국인이지만 소통에 문제가 생길 정도로 강남·강북의 격차를 지니고 있었다. 강남 해군이 바다를 관통해 조선 남해안에 포진하고 이순신을 도와 승전을 이끌었다.

진린은 애초에는 이순신을 시기했으나 차츰 이순신을 흠모하게 되었고 해전 승리의 보이지 않는 힘이 되었다.

진린의 손자 진영소는 명나라 멸망 이후 난징으로부터 남해 장승포에 표착했으며, 조부 진린이 공을 세웠던 남도로 옮겨가 광동 진씨의 뿌리가 되었다. 임진왜란을 통하여 강남과 한반도가 바닷길로 연결되었던 것이다.

전쟁의 바닷길은 이제 끝났을까 | 인스티즈ⓒ 주강현 제공 : 임진왜란 말기 도산성(현 울산왜성) 일대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 장면을 그린 일본의 병풍 그림 ‘도산전투도’.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일본·조선·중국 3개국을 휘몰아간 국제 전쟁이었다. 그런데 근년에 발굴된 문서에 따르면, 이 전쟁이 주변국에 미친 영향이 훨씬 복잡했음을 알 수 있다. 아시아 지역만 봤을 때, 명나라 군대에 편입된 외국 병사 외에 중국 동북지역의 여진족, 류큐국, 마카오에 거주하던 포르투갈인, 심지어 남해의 섬라(‘시암’, 즉 타이의 전 이름)까지 영향을 미쳤다.

닝보 대학의 임진왜란 전문가 정제시(鄭潔西)는 16세기 말 임진왜란과 전체 아시아 국가의 연동 과정을 만력 20년(1592년)에 기획되었던 타이와 중국 연합함대의 일본 정벌 계획에서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최근 <해양문화> 2집 수록).

전쟁 발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는 조선을 돕기 위한 중요 전략의 하나로 섬라의 무력을 동원해 일본을 토벌하자는 안건(이하 차병섬라·借兵暹羅)이 상정되었다.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은 다급한 나머지 현상금을 걸어 조선을 회복하고자 하는 책략을 펼쳤다. 수많은 제안서 중에 정붕기가 제안한 차병섬라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붕기는 사신을 보내 섬라의 병사를 빌려 직접 일본 본토를 침으로써 조선의 어려움을 완화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전쟁의 바닷길은 이제 끝났을까 | 인스티즈

섬라는 당시 동남아의 떠오르는 신흥 강국이었다. 섬라 사신은 먼저 명 조정에 건의하기를 '섬라가 일본과의 전쟁에 참가해 섬라 해군이 직접 일본 본토를 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명나라 <신종실록>(1593년 정월조)에 섬라 사신이 출병을 자청하는 광경이 언급된다. '섬라는 서쪽 끝에 있고 일본에 가려면 만 리 길을 가야 하지만, 가까이 병부가 있으니 왕을 위해 힘을 다하고자 합니다. 병부에 명령을 내리셔서 일본을 직접 토벌하게 하소서….'

당시 차병섬라 상황은 섬라의 조공사신이 병부에 종군을 자청했고, 자국이 직접 일본의 소굴을 치겠다고 요구했으며, 병부는 섬라 사신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의 <선조실록>에도(1592년 12월) 차병섬라에 관한 정황이 기록되어 있다.

섬라 사신이 제안한 참전 요구가 조정에서 받아들여진 후, 황제는 차병섬라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 상당히 구체적인 실행 절차를 직접 고안하게 된다. 사신을 섬라에 직접 보내 군사를 동원하기 위한 방도를 모색한다.

타이 해군도 참전할 뻔했던 임진왜란

그러나 섬라와 인접했던 양광(광동과 광서)의 총독 소원은 ‘오랑캐의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병사를 빌리는 일은 반드시 중단해야 한다’라는 양광 지역 민중의 불안한 마음을 분명히 전달한다. 섬라 병력을 동원해 참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섬라는 중원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명나라에 절대적으로 충성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또한 섬라 자체가 명나라에 위협적인 존재일 수도 있었다. 섬라는 군사 강국이기 때문에 일본과 교전한 뒤 다시 명나라를 침략하고자 하는 야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명나라의 적이 장차 일본이 아니라 섬라가 될 수도 있으며, 차병섬라는 향후 국가 재난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이로써 저 멀리 남쪽 타이에서 일본에 이르는 광대한 전쟁의 길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러한 기획이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국제 전쟁의 거대한 판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이 단순하게 동북아를 뒤흔든 것이 아니라 동남아까지 끌어들일 만한 국제 전쟁이었다는 좋은 증거다.

전쟁의 바닷길은 이제 끝났을까 | 인스티즈ⓒ 주강현 제공 : 임진왜란은 독립 해상왕국인 류큐(현 오키나와)까지 영향을 미쳤다. 위는 류큐의 슈리성.

임진왜란 광풍은 독립 해상왕국인 류큐(현재의 오키나와를 가리킴)를 뒤흔들었다.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은 류큐에 전쟁조달금을 요구했다. 중국과 조공체제를 굳히고 있던 류큐는 일본보다는 중국에 기울어져 있었다. 류큐를 통해 수집된 일본 정보는 고스란히 중국에 보고되었고, 중국은 류큐의 정보에 기초해 일본의 군사·정치적 동향을 지켜보았다.

전쟁이 끝나자 사건은 엉뚱하게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가고시마인 사쓰마 영주 시마즈 요시히로는 류큐 출병을 명령한다. 시마즈란 어떤 인물일까. 칠천량전투에서의 원균 전사, 남원성 전투에서의 도공 포로화, 노량해전에서의 이순신 전사 등은 모두 그의 손에 의해서였다. 우리 역사서에서는 그를 심안돈오(沈安頓吾)라 부른다. 그 시마즈의 사쓰마 번이 메이지유신의 주역이 되어 다시금 조선 식민지배에 나섰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또 하나의 슬픈 증거이기도 하다.

왜란에서 돌아온 제대 군인들이 득실거리자 사쓰마 영내는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전장을 누비던 병사들이 하릴없이 서성거리니 불안감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쓰마는 무사의 비율이 유난히 높았다. 무사 인구 비율이 전국 평균의 5배였다. 영주 시마즈의 류큐 출병은 가고시마에서 조선의 남해안까지 이어지던 전쟁의 바닷길이 남쪽으로 연장되어 오늘의 오키나와까지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1592년 시작되어 1598년까지의 7년 전쟁 직후 1609년에 류큐 무력 침공이 실행된 것이다. 사쓰마의 류큐 침략은 번의 경제적 이득 때문이었다. 사쓰마는 류큐국과 중국과의 무역 이권을 독점해 번의 재정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 당시 중국과 조공 무역체제를 갖추고 있던 류큐국에는 일명 강남 상인들이 다수 왕래하고 있었다.

이로써 중국 강남에서 조선의 남해안에 진출한 진린의 수군, 일본 가고시마에서 조선의 남해안에 진출했다가 남방 류큐국까지 진출한 전쟁의 바닷길이 원을 그리면서 형성되었다. 게다가 미완으로 끝났지만 타이로부터 일본으로 이어지는 전쟁의 바닷길이 한때 탁상에서나마 그려졌으니 바닷길의 외연은 가히 확장 일로였다.

전쟁의 바닷길은 이제 끝이 났을까? 당연히 우문이다. 분단 상황에서 전쟁의 바닷길은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그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른바 해군 군사작전도(軍事作戰圖)란 그 자체가 전쟁의 바닷길이기도 하다. 굳이 ‘잠수함의 길’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바다는 변방이 아닌 ‘문명의 고속도로’

우리는 흔히 지중해 문명, 에게해 문명이라는 말을 쓴다. 굳이 바다문명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원이 부족하고 척박한 풍토의 그리스에서 약진과 번성이 가능했던 지점은 바로 선박 이동을 통한 문명의 바닷길이었다. 식민 제국을 거느리면서 문명과 문명의 접촉을 통한 소통의 세계를 도모한 것이다.

우리 역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육지중심주의에 사로잡히고 바닷사람을 천시하는 나라에서 아무리 대륙국가가 아니라 해륙국가를 강조한들 먹혀들 여지가 적었다.

그동안 <시사IN>에 문명의 바닷길을 연재하면서 일부러 체계적으로 순서를 배치하지는 않았다. 일견 난삽할 정도로 다양한 방식의 바닷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우리의 ‘잠자고 있던 바다 DNA’를 일깨우려는 충동적 방식이었음을 말씀드리고자 한다.

지평선에서 바라보는 역사와 수평선의 역사는 다를 수밖에 없다. 바다에서는 우연과 필연적 사건에 의해 새로운 감염과 문화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가령 제주도에 하멜이 느닷없이 표착하여 조선에 충격을 주었고, 역으로 하멜 귀환 후에는 유럽에 충격을 주었다. 육지에서는 쉽게 벌어지기 어려운 문제들이 바다에서는 일상적으로 벌어지곤 한다. 바닷가 변방은 변방이 아니라 ‘문명의 고속도로’이기도 했다.

마지막 원고를 마무리하면서 임진왜란을 둘러싼 전쟁의 바닷길을 썼다. 막연하게 중국 군대의 참전이 아니라 해군의 참전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수군은 강남 세력이었다. 중국 강남에서 조선 남해안까지 선이 이어졌다. 일본 수군의 선도 가고시마에서 조선 남해안으로 이어졌다. 전쟁 이후에는 그 선이 류큐국으로 이어졌다. 류큐국이 중국 강남과 밀접하게 움직였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거대한 둥근 루트가 완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 역사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페르낭 브로델은 이른바 ‘액체의 역사’를 서술했다. ‘액체의 역사’에는 반드시 바닷길이라는 노선이 존재했다. 그 노선은 중첩적·융합적으로 존재했으며, 때로는 동시다발적으로, 때로는 전파론적으로 상호 융합했다. 우리가 21세기에 그나마 먹고살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물류의 바닷길로 세계를 오가기 때문이다. 일명 ‘세상을 바꾼 박스’인 ‘컨테이너의 길’이야말로 오늘의 우리와 자본주의 세계를 연결하는 강력한 바닷길이다.

바닷길은 속속 새롭게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오래도록 지속된 바닷길의 흔적은 오늘과 내일의 바닷길을 규정짓는 좌표일 수 있다. 문명의 바닷길, 그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제주대 석좌교수)

로그인 후 댓글을 달아보세요


이런 글은 어떠세요?

전체 HOT댓글없는글
국산인 줄 알았던 기업의 진짜 국적
20:34 l 조회 560
"학과 폐지 막으려"...대리시험 쳐준 교수님들
20:30 l 조회 792
현재 난리 난 놀면뭐하니 출연한 정준하..JPG8
20:29 l 조회 1910
슬픔을 반으로 나누면
20:18 l 조회 872
좋아하는 과일
20:18 l 조회 532
국내 지역명물 빵집 매출 순위 TOP 10
20:15 l 조회 1661
현재 성심당 카피 심하다고 난리 난 부산 베이커리..JPG10
20:14 l 조회 5108
자산 정리하고 파이어 하자는 블라인드 남편1
20:12 l 조회 2085
미국에서 7일째 넷플릭스 1위 영화2
20:12 l 조회 2872
빌보드 선정, 2025년 최고의 K팝 앨범 순위
20:11 l 조회 620
훔친거 아닌데 오해받는 애엄마1
20:07 l 조회 2681
대한민국 성씨 별 인구
20:06 l 조회 998
문신한 거 가장 후회한다는 때
20:04 l 조회 2375
퇴사 한다니까 근거 가져 오라는 회사
20:03 l 조회 2198
인생 망한 27살 요즘 삶이 즐겁다
20:00 l 조회 5488
못생긴 애들은 손들고 와봐
19:59 l 조회 914
공부의 신 삼부자
19:57 l 조회 1259
집에 가고 싶을때
19:55 l 조회 421
사회성이란 어떻게 해야 좋아지는가
19:55 l 조회 1218
가요대전 무대 이후 차트 역주행 중이라는 노래1
19:55 l 조회 1354


12345678910다음
이슈
일상
연예
드영배
2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