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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l조회 1398
이 글은 8년 전 (2017/7/30) 게시물이에요

오늘날 우리는 영화, 드라마, 음악공연 등을 즐긴다. 영화배우, 탤런트, 가수 등을 보며 그들에게 열광을 하고, 그들을 통해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에게 있어 이런 대중스타들은 우리 삶의 활력소다.

그런데 18세기 조선에도 그런 인기스타가 있었다.

조선은 반상의 구분이 엄격한 사회였다. 오늘날의 탤런트에 해당하는 광대, 재인 등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다. 오늘날 누구나 선망하는 직업이 과거 조선에는 천대받던 직업이었다. 하지만 이런 천대받은 직업에 종사했으면서 누구보다도 조선 민중들의 사랑을 받은 이가 있다. 그가 바로 달문(達文)이다.

18세기는 대중매체는 물론 교통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걷거나 말을 타고 다닌 시대였다. 그 시대 제 발로 전국 8도를 누비며 면면촌촌 구석구석 수많은 팬들을 몰고 다녔던 광대가 있다. 별난 재주로 온 나라에 이름을 떨친 광대, 바로 달문이다.

홀연 달문이 어디서 나타나자

모두 전처럼 은근히 맞이하고

그 고을 사람들 달문 한번 보자고

가는 곳마다 몰려 떼를 이루었네

서로들 잡아끌어 집으로 데려가서

안주는 수북수북 술잔이 넘치는데

… …

가는 곳마다 사람들 그의 얼굴 알아보고

구경 나온 사람들로 담장을 둘러친다.

… …

별난 재주 익살스런 소리

이름이 벌써 온 나라를 들썩이다가

                                             - 「달문가」 『이조시대서사시』 상

달문은 외모가 못생겼다. 어렸을 적 달문을 본 연암 박지원은 그가 추하게 생겼다고 회고하고 있다. 홍신유의 「달문가」에 의하면 달문은 입이 커서 자신의 주먹이 입 속으로 들랑날랑할 정도였다고 한다. 입에 자신의 주먹을 넣는 것은 그를 상징하는 개인기였다. 무한도전의 박명수의 호통개그가 박명수를 상징하는 개인기듯이 말이다.

달문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주먹을 입에 넣는 달문의 장기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곁에 달문이 있는 줄 모르고 그의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들 앞에서 달문은 주먹을 입에 넣어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시속에 하는 아이 꾸짖을 때

달문이 닮았다 하는데

어쩌다 달문이 그 말을 듣고

"달문이 보고 싶냐?"

문득 입을 벌리고 껄껄 웃으며

주먹을 쥐어 입 안으로 집어 넣더라

                                               - 「달문가」 『이조시대서사시』 하

달문은 늦도록 장가를 들지 않아 머리에 상투를 틀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염소 꼬리 같은 긴 머리를 뒤통수에 올려붙이고 다녔다. 누군가가 장가 들라 권하면 그는 "남자만 미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못생겨서 어떤 여자의 마음도 끌 수 없다"고 말했다.

어쩌면 그는 자유로운 삶을 추구한게 아니었을까? 누구에게 얽매이지 않는 바람같은 삶을 살기 위해 독신으로 지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일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의 말에서 달문의 자유로운 삶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아침이면 시중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며 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부잣집 문하에 들어가 잠자면 그만이지 한양 성중이 8만 호이니 매일 집을 바꾸어 자더라도 일생동안 다 다니지 못할 것이다"

① 조선 최고의 인기 광대 달문

달문은 인형놀이의 일종으로 산대 위에 인형을 설치해서 놀리는 만석중놀이, 서울지역 탈춤 산대놀이에 포함된 탈춤의 한 종류인 철괴무(鐵拐舞), 팔풍무(八風舞) 등에 능했다. 달문가를 보면 달문은 몸만 쓰는 광대가 아니었다. 그는 재담, 흉내 내기 등 연기에도 능했다. 오늘날로 치면 만능엔터테이먼트라 하겠다. 달문은 땅재주를 부리는 중간에 '눈을 흘기며 비뚤어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드는' 어릿광대의 연기와 입심을 보여줬다. 하루는 길을 가다 싸우는 사람을 만나자 옷을 벗고 덤벼들어 함께 싸울 듯한 형상을 흉내내는데,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웃고 싸우던 이들도 웃느라 싸움을 그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한양 최고의 광대였다. 산대 나례(山臺儺禮)가 거행될 때 장안의 악소년(惡小年: 왈자, 풍류와 유협을 숭상한 무리들)들이 달문을 상석에 앉히고 귀신 모시듯 떠받들었다고 한다. 산대 나례는 귀신을 쫒는 의식인데 고아대놀음을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확장되었다.

악소년들이 산대나례가 거행될 때 달문을 귀신처럼 받들었다는 것은 달문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야 산대 나례의 좌우변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이다. 당대 연예계에서 달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② 신의있는 사람, 달문

달문은 비록 광대였지만 신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장안의 거지 아이들과 어울렸고, 그들의 우두머리로 추대되기도 했다. 하루는 거지 아이들이 구걸을 나가고 달문이 아픈 아이와 함께 움막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전신을 떨며 신음하자 달문이 잠깐 나가 밥을 빌어왔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죽어있었고 때마침 돌아온 패거리들은 달문이 아이를 죽인 것으로 의심해 그를 때려 내쫒았다. 누명을 쓰고 맞기까지 했음에도 달문은 다음날 아침 거지 아이들이 수표교 아래 던져버린 죽은 아이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주었다. 이 과정을 아는 어떤 사람이 달문의 의리를 높이 사 약방하는 부잣집 일꾼으로 추천했다.

달문이 약방에서 일하고 있을 때 주인의 돈이 없어졌다. 주인이 달문을 의심하자, 달문은 잘못했다 사과하고 돈을 돌려주었다. 그런데 며칠 후 주인의 손님인 다른 사람이 와서 주인이 없기에 미리 말을 못하고 빌려갔다면서 돈을 갚았고, 이에 달문의 신용과 강직함이 드러났다.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 광대에 거지와 어울려 다니며 밥을 빌어먹던 달문이었기에, 그의 의리와 신용은 주변 사람들을 더욱 감탄하게 만들었고 그의 소문은 널리 퍼져 나갔다.

③ 달문 없이는 일 전의 값어치도 못 얻던 기생들

달문은 한 때 장사를 했다.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 사이에 흥정을 붙여 이문을 챙기는 주릅 노릇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돈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에 을 느낀다. 홍신유는 「달문가」에서 달문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디.

몇 푼의 이문에 쫒아다니는 꼴

스스로 돌아보기에 서글퍼지누나

어찌 사내대장부의 몸으로

마당에 노는 닭처럼 모이 한 알 다툴건가

결국 달문은 연예계(?)에 복귀했다, 그는 기생들의 뒤를 봐주는 조방군으로 일했다. 서울에서 아무리 고상하고 아름다운 기생이라도 달문이 이름을 내주지 않으면 일 전의 값어치도 없었다고 한다. 서울 장안의 기생들은 모두 달문을 통해 이름을 내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달문은 연예계 기획사 사장 정도 되지 않을까?

④ 장안의 왈자들과 교분을 쌓은 달문

18세기 한양은 한강 주변을 중심으로 신흥 상업 지역이 발달하고 기생, 가객, 악공, 광대 등의 예술이 상품적 가치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달문은 시정 사람의 안목으로 상업문화에 대처하였고 오락과 유흥의 수요에 부응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는 광대로 활동하던 시절, 서울의 오락 유흥문화를 장악한 왈자 집단과 친연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루는, 장안의 왈자들이 검무로 이름난 기생 운심의 집에 들러 술자리를 벌이고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운심에게 춤을 청했다. 하지만 운심은 좀처럼 춤을 추려 하지 않았다. 그 때 달문이 대청에 올라 술자리 상석에 앚아 무릎으로 장단을 치며 노래를 부르자 운심이 일어나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왈자들은 달문의 행동을 꽤심히 여겼으나 그의 기상과 풍류를 인정하고 서로 친구가 되었다는 일화다.

달문의 고객 중에는 어사 박문수로 알려진 영성군, 좌의정 벼슬을 지낸 풍원군 조현명이 있었다.

⑤ 달문, 조선 8도를 누비며 유랑 연예생활을 하다

화려한 잔취 뒷전에서 기생들의 뒷바라지를 하다 먹다 남은 술이나 식은 안주를 먹는 자신의 삶이 처량해서인가? 그는 조방군 노릇에 염증을 느끼고 서울을 떠나 동남쪽 끝에 있는 동래로 내려갔다. 조방꾼이 아닌 광대로서 자신의 모습을 찾은 것이다. 그는 영조 23년(1747) 41세의 나이에 일본에 떠나는 통신사 일행 500~600명과 합류하여 일본에까지 간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통신사가 서울을 출발해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까지 온갖 기예를 지닌 재주꾼들이 따라붙었다고 한다. 아마 달문도 이와 같은 루트를 통해 일본에 가지 않았나 싶다.

일본에서 돌아온 달문은 반년 가까이 부산에 체류하며 특유의 익살과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지만, 이런 생활에 지루함과 염증을 느끼고 전국 8도를 누비는 유랑 연예 생활을 시작했다. 발길 닿는대로 이러저리 떠돈 그는 금강산 비로봉에 올랐고, 백두산 꼭대기까지 오르기도 했다.

달문은 왜 그토록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랑생활을 했을까? 달문의 유랑은 세상에 안주할 수 없는 천민광대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나 싶다. 예술가로서 세상을 앞질러가는 안목을 지녔으되,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미천한 처지에 대한 갈등이 달문을 끝없는 유랑으로 몰고가지 않았을까?

⑥ 역모의 혐의를 쓴 달문

조선시대 중죄인의 공초를 기록한 『추안급국안』에 의하면 영조 40년(1764) 그의 나이 58세 때 달문은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의금부로부터 추국을 받게 된다.

그가 역모 혐의를 쓰게 된 것을 박지원은 「광문자전」후속편인 「서광문전후」에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떤 거지 아이가 경상도 개녕 수다사에 머물려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거지아이가 스님들이 달문을 칭찬하며 그를 그리워하는 상황을 보게 된다. 그 아이는 더 잘 얻어먹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자기가 달문의 아들이라 말했다. 스님들이 크게 놀라고 반가워하며 그 때부터 아이의 대접을 후하게했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어떤 영남 사람이 달문의 아들이라 자처하는 거지 아이를 꾀어 자기를 작은 아버지라 해준다면 함께 부귀를 누릴 수 있을 거라며 꾀었다. 달문은 원래 자신의 성도 모르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 형제나 처자식이 없었는데 갑자기 아들과 동생이 나타나자 누군가가 이상하게 여겨 관가에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달문이 이들과 잡혀 들어갔는데, 서로 대질심문을 해서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추안급국안』에 따르면, 수다사의 거지 아이를 꾀어 달문의 동생임을 자처한 사람은 이태정이란 사람으로, 그는 중이나 노비, 점쟁이 등 당시 사회의 수외계층을 모아 역모를 꾀했는데 그 역모에 가담했던 자근만이란 사람이 경상감사에 역모를 밀고했다고 한다. 이태정은 공초의 진술에서 개녕 수다사에서 자근만을 만났는데 그가 달문의 아들이라는 얘기를 듣고 자신도 달문의 동생이라 사칭했다고 하였다. 달문의 아들을 사칭했던 이가 자근만이고 그가 이태정의 역모를 고발한 것이다. 경상감사는 무리를 체포해 서울로 압송했고, 영조가 친히 지켜보는 가운데 국문을 진행했다. 그 결과 주동자 이태정은 죽임을 당했고 자근만과 달문은 귀양을 가게 되었다.

⑦ 신선같은 삶을 살다간 달문, 자유를 꿈꾸다

사실 달문은 무고하게 옥사를 치렀다. 공초 결과 역모와 관련없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함경북도로 귀양 보내졌다. 이는 달문이 당시 백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것과 관련이 깊다. 상층 권력자 눈에 달문은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별난 재주와 입심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문은 양반계층에게 있어 위험 인물이었다.

만약 달문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대중스타이자 앞서가는 예술가였을 것이다.(어쩌면 다른 인기스타들에게 묻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50여년 전 닫힌 조선사회를 살아간 달문은 이곳저곳 다니며 사람을 모으고 마음을 모은 죄로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달문이 유배생활에서 돌아오자 한양 장안 남녀노소가 모두 구경을 나가 저잣거리가 텅빌 지경이었다고 한다. 상층 권력자들은 그를 사회에서 격리시켰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의 재주와 명성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온 달문은 예전의 달문이 아니었다. 삐쩍 마른 몰골에 누더기를 걸치고 빠진 머리를 아직도 땋고 있어 쥐꾀같이 보였고 이빨이 빠져 입이 합죽해지니 더 이상 주먹을 입 안에 넣는 그의 장기를 하지 못했다. 60 가까운 나이에 세상의 풍파를 겪고 8도를 누비던 광대의 기상도 사그라졌다.

서울로 돌아온 달문은 함께 어울리던 왈자 표철주를 만나 잘나가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표철주는 막대한 재산을 등에 업고 함부로 주먹을 휘둘러 표망둥이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어 집을 팔고 사는 흥정을 붙이는 집주름 노릇을 하는 그는 달문에게 이제야 세상을 알 것 같다고 말하자, 달문은 "네가 쟁이들의 일을 배우면서 눈이 어두워졌구나"고 말했다.

장안의 이름난 왈자로 망둥이처럼 날뛰던 표철주가 집주름이 되어 쟁이들의 일을 배우면서 세상에 대한 눈을 떴다는 말을 눈이 어두워졌다고 바꾸어 말한 달문의 말은 어떻게 봐야할까? 누구에게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이 달문이 생각한 세상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풍류를 논하며 자유로운 삶을 버리고 돈에 얽매여 세상을 살아가는 표철주에게 눈이 어두워졌다 말한게 아니었을까?

오랜 유랑과 고난 끝에 달문은 세상에 눈을 뜬 광대가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 눈을 뜬 그 광대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렸고 그 후로 그의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홍신유는 세상에서 홀연 모습을 감춘 그의 행적을 신선의 자취와 같다고 평가하였다.

⑧ 달문이 꿈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천민 광대로서 몸은 청계천 거지 패거리와 함께 지냈지만 재상가를 드나들며 상층의 오락유흥에 기여했던 달문

그는 그 괴리를 통해 신분질서와 차별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약방의 부자가 인정한 신용을 지녔고 주릅 노릇을 통해 시장의 논리를 익힌 그는 뜬구름 같은 명분을 내세우는 유학보다 실질적인 생활에 도움을 주는 상업활동의 중요성을 깨우치지 않았을까?

한양 장안을 주름잡는 왈짜들을 탄복시킨 기상과 풍류로써 전국 8도를 누비며 익살과 재간으로 민간을 파고들었던 그였기에 구석구석 어디 하나 예외없이 박혀있는 삶의 애환과 고통을 목격하고 고뇌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세상에 눈떠 반역을 꿈꾼 광대가 아니었을까?

자유를 추구한 광대 달문, 그가 진정으로 꿈꾼 것은 무엇이었을까?

참고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선 전문가의 일생』, 글항아리, 2010

 







 

18세기 조선의 인기스타, 달문 | 인스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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