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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8년 전 (2017/7/30) 게시물이에요

[북경대 갈진가 교수의 최부표해록에 관한 논문] 

 

글을 발표한 곳: 중국사회과학원 세계역사연구소, 1991년 12월

제목: 표해록 초평 -표해록에 대한 초보적 탐구

번역: 김예화, 중국 조선족으로 중국어 통역관  정리: 최철호

http://www.goodsociety.co.kr/pyo/index.htm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전에 조선인 최부가 중요한 저작인 표해록을 기술했다. 그 내용은 최씨및 그와 한 배에 탄 43명의 조선인들이 조선의 제주도 근방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여 중국의 절강성에 표착, 수로와 육로로 귀환한 경험을 중심으로 기술했다. 중국 명나라 초기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교통및 도시풍경 등 다방면의 상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 책은 중국 명나라 시기의 해안방비, 정치제도, 운하, 도시, 지지, 민속및 중조(中朝)의 양국관계등을 연구하는데 증거가치가 있는 고서라할 만하다.


표해록은 본래 최부가 조선 국왕에게 찬진한 '내부보고'였다. 그러나 최씨의 견문은 모두 얻기 어려운 기초자료이었으므로 조정의 큰 중시를 받았다. 표해록은 유창한 한문으로 썼는데 전문(구두점 불포함)은 5만 4천 여자에 이른다. 내용은 만상을 망라하고 있으며 문장이 간결하고 생동감이 있다. 출판된 후 구독자가 많았지만 유포가 넓지 못하였다. 최부 사후 70년(1573, 조선 선조 6년, 명나라 만력 원력)후에 그의 외손 유희춘(교사제조로 있었음)이 교정본을 판각, 인쇄하여 출판함으로써 후세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조선의 해동문헌 총록, 문헌비고는 이 책을 중요한 고서로 수록했다.


아는 바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1769년에 키오타 군킨이 표해록을 일문으로 번역, 책이름을 '당토행정기'로 고쳤다. 또한 미국에서도 1965년 존 메스킬이 표해록을 영문으로 번역하였는데 책명을 '표해록역주' 라고 하였다. 1979년에 최부의 방계후예인 최기홍(崔基泓)이 본국문으로 번역하여 서울에서 출판했으며 1988년 평양에서도 표해록을 번역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중원묘사의 거필'인 이 책을 알고 있는 사람이 적다. 이 외국의 한문서는 다방면의 연구에 자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저술로서 마땅히 중국 학술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켜야할 것이다.


본문은 표해록에 대해 전면적인 평론을 하지 않고 다만 중국에 관한 과거의 외국기록중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는 방면에 대해 초보적인 탐구를 하려고 한다.


     1. 명조 홍치원년 해금(海禁), 해방(海防)과 관련, 표해록 기재

       명나라 홍치초기의 해금, 해방 상황


왜구에 대한 재난은 명나라 초기부터 비교적 엄중하게 다스렸다. 명나라 태조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여 일찍이 산동에서 광동에 이르는 연해지역에 성을 구축하고 군사를 증강시켜 해안 방어공사를 강화하였으며 엄밀한 순겁제도를 세웠다. 영락 17년에 왜구가 요녕성 동쪽에서 섬멸된 후 왜구에 의한 재난이 좀 드물어졌다. 세종 가정 중기에 이르는 100여 년동안에는 해상에 큰 침범이 없게 되었지만 그러나 언제든 철저히 막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표해록이 제공한 자료로 보아 홍치초기에 명나라 정부의 해금은 매우 엄격하였고 관리와 백성들의 해안 방어의식이 매우 강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부를 비롯한 표류인들이 정강 태주부의 임해현 소속인 우두외양에 이르렀다. "산위에 수많은 봉화대가 줄 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표해록 권1, 홍치원년, 정월 16일」그들은 배를 버리고 상륙한 후 곧 왜구로 오인되었다. 당시 주민들이 포위, 심문을 하는 한편 그들을 급히 관부로 압송해 갔다.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였고, 이리 저리 날뛰며 소릴 질렀다.", "어떤 이는 창과 칼을 지녔고 어떤 이는 북과 징을 쳤다.", "마을 사람 모두 막대기를 휘드르고 쳤다.", "좌우를 끼고 전후를 가로 막으며 차례 차례로 체송하였다."「표해록 권1, 정월 17일」"길 옆에서 구경하는 자들이 모두 팔을 위로 흔들며 머리를 가리키면서 참수하는 흉내를 냈다."「표해록 권1, 정월 18일」이튿날 해문위인 천호 허청이 곧, "왜구가 침범했다는 말을 듣고 체포하기 위해 왔소,"하고 최씨 등을 급히 해문위 도저소에 보내 심문케 하였다. 최씨 등은 도저소 성근처에 이르러, "7-8리 주위에는 군졸이 갑옷을 입고 창, 총, 방패 등으로 무장 길거리를 메우고 잇었다. 그 성에 도착했는데 성에 중문이 있었고, 문은 철로 된 문비가 있었으며 성위에는 수비하는 초소가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표해록 권1, 1월 19일」"성곽이 관문과 같았다."「표해록 권1, 1월 18일」등을 보았고, 또 최씨 등은 연도의 영해현 건도소를 경유하면서, "병선이 무장을 완비하고 남강을 상하로 순회하고 있었다", "성문에 들어가니 문은 모두 중문이며 북, 각, 총소리가 바다와 산을 진동시킬 듯했다", 천호인 이앙은 체구가 장대하고 용모가 출중했으며 갑옷과 투구를 갖추고 있었다."「표해록 권1, 1월 24일」"백, 천의 무장병으로 성을 에워쌓으며 거리를 경호했다."「표해록 권 1, 1월 25일」등도 보였다. 영해현 월계순검사는 바로 최씨 일행이 통과한 첫 순검사이다. "성은 산정에 있었으며, 군졸들이 모두 무장하고 바닷가에 열립해 있었다."「표해록 권1, 1월 25일」 이를 보아 명나라 초기에 태조가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연해일대에 성을 구축하고, 요새에 호위소를 설치하였으며 홍치초기에 이르기까지 위수부대를 주둔시켜 경비케 했음을 알 수 있다.


태주는 절강 동부연안에 자리잡고 있어 여러 차례 걸친 왜구의 침요를 당했다. "명사기사본말(明史記事本末), 55권, 연해왜란"의 기술에 의하면, 홍무 17년부터 정통 4년에 이르는 50여 년간에 절강 동부 일대에서만도 왜구의 침입, 약탈을 일곱 번이나 당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태주 도저일대가 가장 심한 피해를 입었었다. 정통4년(1439년) 4월 왜구가 절강동부 일대에 침입하여 감행한 약탈만행은, "왜구가 도저에 들어왔을 때, 관의 창고와 백성들의 집을 불지르고 약탈했으며 장정들을 몰아세워 종묘를 파 헤쳤다 갓난애를 대나무위에 묶고 끓는 물을 들어 부으며 그 울부짖음을 보고 박장대소하였다. 임산부를 데려와 아들인가, 딸인가를 점쳐 그 배를 도려내어 그 맞음과 틀림으로 술내기를 하여, 쌓인 해골이 언덕같았다."는 기술로 보아 왜구로 오인된 최씨 일행이 심문, 구축, 구타를 당하게 된 연고를 가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표해록은 당시 관리와 백성들의 왜구의 침입, 약탈에 대한 긴장된 분위기와 그들의 고도의 해안 방어의식을 생동감있게 기술했다.


홍치초기에도 감금조례가 여전히 매우 엄격했다. 최씨일행은 대륙에 발을 들여 놓은 순간부터 매우 엄한 감금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상륙한 이튿날 그들이 만난 명나라의 첫 지방관원은 바로 천호인 허청이었다. 허청이 먼저 최씨에게, "우리 대당의 법도는 매우 엄하다."「표해록 권1, 1월 18일」라고 일러 주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도 그에게, "옛부터 왜적은 우리 변경에 여러 번 침입하여 겁탈했기 때문에 국가는 비왜도지휘, 비왜파총관을 설치하고 왜에 대비하고 있다. 만약 왜인을 잡으면 선참후계한다"「표해록 권1, 1월 19일」라고 일러 주었다. 송문 등지의 비왜지휘 파총관인 유택도 그에게, "당신과 같이 남몰래 변경을 침입한 사람들은 원래 군법으로 다스린다."「표해록 권1, 1월 21일」라고 했다. 항주에서도 한 관원이 그에게, "국법이 아주 엄하고 규율이 대단하다. 누설되면 충군(充軍)이란 형벌에 처해진다."「표해록 권2, 2월 8일」라고 일러 주었다.


명대의 "위법도강(渡江)"규정에 의하면, "모르고 도운 것이 결과적으로 법을 어긴 도강이 되었을 경우, 장 80에 처한다. 감시자가 고의로 놓아주는 경우 같은 죄로 처리한다." 라고 되어 있으며, "첩자" 규정에 의하면, "변방 요새지의 관문및 내지의 경우, 경내에 첩자가 침입, 경내 사정을 누설 혹은 몰래 내통하는 경우 모두 참수에 처한다. 경유지의 감시자가 고의로 놓아 주거나 은익, 자수하지 않는 경우, 범인과 동죄로 처리한다." "사출외경(私出外境)" 의 규정에 의하면, "사정을 누설한 자는 참수에 처한다."「大明會典, 권 167, 刑部 9, 律例 8, 兵律 2」라고 규정지어 당시 관민의 강렬한 감금의식은 당시의 엄격한 감금조례 규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금을 강화시키기 위해 명대에는 해방장려(海防奬勵)의 일환으로 표창제도를 실시했다. 명사의 기재에 의하면, "태조 29년 연해위소지휘(沿海衛所指揮) 천호(千戶), 백호(百戶)에게 명하기를 왜선및 적을 포획한 자는 일계급 승진하고 상으로 은 50량, 지폐 50정(錠)을 급여한다. 군사가 수륙(水陸)에서 적을 포살할 경우 상으로 은을 급여하되 차등이 있게 하라", "세종때 왜로 인한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해상에서 공로는 북방변경에 비해 가장 우대했다." 이후 가정 35년에 이르러 개정되기를, "왜의 두목을 참했을 경우 일계급 승진, 봉급 3질(秩)을 올려준다. 맹목 추종자는 150량, 적을 복종시킨 자는 일계급 승진시키고 봉급 1질을 올린다. 이처럼 해양에서 적을 만나 공을 세운 자는 한결같이 논공행상을 잃지 않았다.", "만력 12년 개정에는 구법보다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즉 적의 수및 선박의 다과에 따라 논공행상의 차이를 두었고 해양정벌과 전투에 있어서 평온을 되찾을 경우 왜적, 해적을 막론하고 공로를 검토한 후 뛰어난 공로로 인정이 되는 경우 공로의 영예를 대대로 세습케 하였다."「명사 권92, 志第68, 兵4」


명사에 홍치초기때의 규정에 관해서는 비록 상세히 기재되지 않았지만 "표해록"에 기록된 사자채 수비관이 최씨일행을 왜구로 오인하고 그들의 왼쪽 귀를 잘라 바치어 공훈을 세우려 시도한 내용으로 보아 홍치초기의 표창제도를 실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당시 해금은 매우 엄격했는 바, 외국인이 입경하기만 하면 해안수비 부문에서는 엄한 대책을 세웠다. 이 방면의 상황에 대해 최부는 표해록에서 수많은 중요한 지료를 기재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은 항주에서 그들 일행을 북경으로 호송할 때 연도의 각부, 역에 통보한 공문인 것이다.「표해록 권2, 2월 11일」 이 공문은 명나라 홍치초기의 해금 등 각 방면의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반영했다. 이 공문을 통하여 최부일행이 사자채에 이른 후 각급 해안 수비부문에서 어떤 대책들을 취했고 어떤 부분에서 출해감시와 수비를 하며, 어떤 부분에서 배를 나포, 구금을 하며 심사확인할 것인가에 대해 모두 명확히 햇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 공문은 그당시 각급 해안수비 부문에서 언제나 경비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해안 수비정보가 잘 통하고, 지휘배치가 신속했으며 해안방비 시설도 완비했다는 것을 반영했다. 표류사건 심의절차와 명나라 홍치초기 법도 표류사건(표류 국경침범 사건)은 외교, 국경수비와 관련되기 때문에 일반소송과는 다르다. 일반사법의 안찰사사(按察使司)가 관장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포정사사(布政使司), 안찰사사가 합동심사를 해야만 안건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최씨 일행건은 우선 해안 수비부문인 해문위, 천호, 파총, 송문 등 왜구 수비지휘자의 초보적인 심문을 거쳤다. 다시 상급인 소흥부에 보내어 총독왜구방비 관공서인 도지휘첨사, 순시해도부사, 포정사분수우참의 등의 연합심문, 즉 부급(府級)심사의 합동심사를 받아야 했다. 다시 상급인 항주 포정사사에 올려 진수절강사설감태감과 순안절강감찰어사의 조사를 받아야 했으며 마지막으로 절강도지휘첨사, 좌포정사, 안찰사부사 등 삼사가 합동 재심사를 하여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다음에야 안건을 결정할 수 있으며, 또한 관을 파견하여 북경으로 호송케 된다. 소송의 절차로 보아 위소(군현), 주부(州府), 사(司)의 삼급(三級)을 거쳐 다시 중앙에 보내는데, 대체로 일반 소송절차와 같이 사심(四審)을 거쳤다.


최씨 일행 안건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각급 관원들이 안건처리를 공평히 하고 조사연구를 중요시했는데 이는 홍치초기의 사법이 엄격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최씨 일행 안건의 기본골자는 그들의 신분을 똑똑히 밝히는 것이었다. 최씨 등의 일행이 비록, "왜와 말이 다르고 의관이 다르다." 또한 관인, 마패, 각대, 소지문서, 서적 등이 분명 조선인이라는 것을 맑혀 주기는 하나 생각해 보면, "왜인의 도적질은 신기하다. 변복하여 흡사 조선사람과 같이 위장하고 있는지 모른다."「표해록 권1, 1월 19일」또한 신인 등의 물건은 왜구가 조선인의 것을 얻었는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이는 반드시 배제해서는 안 될 의문인 것이다. 최씨 일행의 언어, 의관, 행동을 관찰하고 또 그들이 활 하나, 칼 한 자루를 소지한 것 이외에는 다른 무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도적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파총, 송문 등 각 부문의 비왜지휘들은 최부에게, "당신과 같이 남몰래 변경을 침범한 사람들은 원래 군법으로 처형키로 되어 있으나, 그 정실이 가긍한 점이 있어 잠시 처형을 보류하고 있으니 침범의 유무와 정상을 사실대로 글로 써서 제출하라."「표해록 권1, 1월 21일」라고 했다. 파총관은 표류와 관련된 실정 등을 물은 후 또 조선의 위치가 어느 방향인지…의관과 예절은 어느 때에 만들어졌는지, 어떤 법규를 사용하는지 등 조선과 유관한 사항을 구체적으로 질문하여 최부 일행이 조선인이 아닌지의 여부를 조사했다. 최부는 이에 하나 하나 작성하여 회답했다.「표해록 권1, 1월 21일」


파총관은 최씨가 작성한 공문및 서술을 들은 후 기본적으로 국경을 침범한 혐의가 없음을 인정하고 예로서 대했다. 그리고 북경에 전송하여 본국으로 돌려 보내려 했다. 소흥부에 도착해서 역시 포정사의 심문이 있었는데 이는 더 한층 자세한 질문이었다. "당신은 조선인 같으니 당신 나라의 연대, 연혁, 도읍, 산천, 인물, 풍속, 제사의식, 상제, 호구, 병제, 전부(田賦), 관상(冠裳)제도를 자세히 써내라. 이를 근거로 시비를 판별하겠다."「표해록 권1, 2월 4일」최씨는 이에 대해 상세히 답했으며 반복되는 심문과정을 거쳐 최부일행을 왜구로 잘못 오인 조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결국에 최씨일행 안건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받은 것이다.


각급 관리들이 안건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한데 대해 최부는 깊은 감동을 느끼고, "위엄을 보여주고 관대히 대해 주었으며 후정으로서 대했다."「표해록 권1, 1월 25일」처음에 왜구로 오인되어 갖은 홀대와 멸시를 받은 후 조선인으로 인정받자, "가는 곳마다 공경과 후대를 받았다", "빈 손으로 왔으나 많은 선물을 갖고 간다."「표해록 권3, 5월 19일」이렇게 환대를 받았던 그들은 명나라 황제와 지방관리들로부터 하사품을 받기도 했다. 수상한 물품이 15짐바리에 이르렀다.「표해록 권3, 5월 27일」


     2. 홍치초년의 남북교통과 방무(防務)에 관한 기재


역참분포와 위소관문 수비


최씨 일행은 표류하여 절강 우두외양에 이르러 태주부 임해현 사자채에 상륙한 후 항주에 이르렀다. 항주에서 남운하를 따라 진강에 이르고, 진강에서 장강을 건너 양주에 이른다음 다시 북운하를 따라 북경으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북경에서 육로로 요동 구련성에 이르러, 압록을 건너 조선으로 돌아갔다. 노정은 8,800여 리. "표해록" 에는 최씨 일행이 연도에서 경유한 산천, 호수, 댐, 역참, 농촌, 도시, 다리, 동굴, 정자, 대, 누각, 사당, 이정표, 시설등이 모두 기재되어 있으며, 더욱이 중국의 관문요충, 각지 역관, 수로교통, 국방 등 상황에 대해, 각별히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역참은 옛날부터 국가의 주요 교통선이었다. 최씨 일행은 중국에 체류한 136일 동안 남에서 북으로 올 때, 바로 연도의 역참에서 숙식했던 것이다.


최부의 실지답사 이정(里程)은, 임해현 시자채에서 도저소까지 160여 리, 도저소에서 영해현까지 400여 리나 되는 바, 그 구간은 연해 벽지로 역관이 없었다. 월계순검사에 이르러서야 포(鋪)가 있었고, 영해현에 이르러서야 백교역이 나타났다. 백교에서 출발, 서점, 연산, 사명, 차구, 요강, 조아, 동관, 봉래, 전청, 서흥을 지나, 항수 무림역에 도착했는데, 도저소부터 무림역까지는 1,500여 리. 무림으로부터 오산, 장안, 조림, 서수, 평망, 송릉, 고소, 석산, 비릉, 운양을 지나 진강부 경구역에 도착했는데, 항주에서 여기까지는 1,000여 리. 여기서 양자강을 건너 양주부 광릉역에 이른다. 여기에서 최씨 일행은 수로와 육로를 통해 북경에 도착한다. 수로로는, 소백, 맹성…하서, 화합, 통주노하 수마역까지이며, 양주에서 여기까지의 이정(里程)은 3,300여 리. 노하로부터 북경 회동관까지는 구간 40리 간격이고, 회동관에서 노하, 하점, 공락, 어양…요양, 요동성까지 1,700여 리. 요동에서 두관…참(站)을 경유 압록강까지는 300여 리였다.


  최부 일행의 복행노정은 8,800여 리이고 경유한 역참은 100여 개다. 최부의 관찰에 의하면, 역에는 역승(驛丞)과 역리(驛吏)가 있었으며, 변경의 역참은 "군이 지키고 있어 마치 방어소와 같았다." 육로의 역간 거리는 매우 가까운 데, 일반적으로 30, 40리 또는 50, 60리가 되며, 수로의 역간 거리는 매우 먼데, 일반적으로 60, 70리에 이르며, 또는 80, 90리 혹은 100여 리에 달하기도 했다. 명대의 양주부는 남북 수륙교통의 요지였다. 이 곳에서 북으로 올라가며, 수륙으로 나눠져있는데, 최씨 등이 거쳐간 길은 수로였다. 양주로부터 북경까지의 육로에는 32개의 역관이 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 이 육로는 2,500여 리나 되나 수로에 비해 800여 리가 짧다. 최부에 의하면, "사명감을 가지고 맡은 직무에 전력을 다하도록 하고 있다. 상거래는 대개 수로를 이용하고 있으나 가뭄으로 인해 강물이 감수되어 선박의 운항이 불가능할 경우, 또한 관청에서 화급한 일이 생겨 역마를 이용해야 할 경우는 대개 육로를 이용하고 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최부 일행 안건은 바로 육로를 통해 북경에 상신했던 것이다.


  최부는 연도에서 산해위, 산해관, 장성 등 관문 요충지를 경유했을 뿐만 아니라, 이 지방들의 역사, 지리 및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일일이 기술했다.


  산해위에 관해, 그는 표해록에서, "성의 동남쪽에 있는 고산은 해빈에 임해 있었다. 북쪽에는 각산이 우뚝 솟아 있고, 산해관은 그 중앙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으로 산을 등지고, 남으로 바다를 두르고 있었다. 산해관 주위 10여 리 거리는 요해지로서 진나라 장수 몽염이 장성을 소축했는 데, 장성은 각산의 허리에 걸터앉아 산해위의 동성까지 연이어 뻗어 바다에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동운 체운소는 성안에 있었다."「표해록 권3, 5월 6일」 산해관은 산해위성의 주요 일부이다. 최씨는, "조교를 지나 산해위 서문으로 들어가… 망부대의 전설에 의하면, 진나라가 장성을 축조할 당시, 맹강의 부인이 남편이 그리워 불원천리하고 찾아왔던 곳이라 한다."라고 기술했다.「표해록 권3, 5월 7일」 관내외부의 방어에 관해 그는, "산해관 이내에는 10리마다 연대를 설치하여 봉화를 대비하고 있었다. 산해관 이후에도 5리마다 작은 돈을 설치하고 푯말을 세우고, 이정을 기록해 놓았다."「표해록 권3, 6월 4일」


  "산해관의 동쪽에도 긴 담장을 축조하고…야인을 방어하고 있었다.", "성을 축조하지 않은 부, 주…위소를 설치했다.", "체운소는 모든 성을 축조했고, 방어소와 마찬가지로 성이 있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


  산해외성에 대한 상술은, "표해록"의 서술에서 전형적인 실예가 된다. 매우 간결한 글로 이 험준한 요새의 방위, 지형, 지세, 연혁, 수비, 시설, 고적 및 요도를 통과할 때의 상황 등을 일목요연하게 기술했다.


  최부 일행이 귀국 도중, 장성의 동단(東端)을 거칠 때, 성화년간(成化年間)에 신축한 담장의 모습에 대해 들은 바를, "명나라 홍무년간에 또다시 긴 담장을 쌓아 오랑캐에 대비했으며, 진나라가 축조한 긴 성과 맞닿아 동으로 뻗고 있었다." 라고 기술했다.「표해록 권3, 6월 4일」 긴 담장은 명나라때 요동도사(邀東都司)가 지역분할을 위해, 건축한 "요동변장(遼東邊  )"이다. 그 축성기간은, 수선 정통 7년(1442)에 요서(遼西)에서 쌓기 시작했다 하며, 주로 몽고인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에는 성화(成化) 3년(1467)에 요동에서 쌓기 시작했으며, 주로 여진족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표해록"에, 요하 동쪽으로 벽이 뻗어나가는 모습을, "삼차하 서쪽으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동쪽으로는 북쪽의 장정, 장녕, 장안, 장승, 장용, 장영, 정원, 상유림, 십방사 등 보루가 있고…압록강까지는 대개 수천리나 된다고 했다."라고 기술했다.「표해록 권3, 6월 4일, 부기」 그 것에는 수치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요동변장의 길이는 당연 1,700여 리이다. 5월 22일 최부의 서술에 의하면, "고돈포를 지나 신관문에 이르니 긴 토성(土城)이 있는데, 그 북쪽이 장성(長城)에 연접해 있었고, 남관문은 그 토성의 중앙에 있었으며, 바로 성화년간에 신축한 것이다." "표해록"중의 명나라 때, 산해관 동쪽에 "긴 담장"을 축조해, 오랑캐와 여진족 침입을 방어했다는 서술은, 역사사실과 부합됨으로 참증자료로 제공할 수 있다.


  하천, 운하의 치수(治修), 제방, 수문 수축에 대한 제도


  중국의 남북운하는 원나라 지원(至元)26년(1289)부터 태정(泰定)2년(1325)에 이르는 36년동안에 걸쳐, 물을 가로 지르는 치수공사를 완성함으로써 전운하가 관통되었다. 그러나 지원말년에 와서는 물길이 막히고 말았다. 결국 명나라 초기의 준설을 거쳐 운하의 형태가 바로 잡히게 되었다. 명나라 홍치년간은 운하항로가 비교적 그침없이 통하게된 시기였다. 의외의 사고로 표류해온 최씨일행이 중국해안에 이른때는 바로 북경과 항주간의 운하가 완전히 개통된 후였으므로 그들은 전운하를 경유한 첫 한국인이 된 것이다.


  표해록의 기술에 의하면 명대전기(明代前期)에는 전국의 조운(漕運)과 남북교통에 관계되는 이 운하를 매우 중시하였으며, 전문기관을 설치하여 관리하였고 항상 준설하며 제방과 수문을 검사, 수축했다한다.


  맹성역에 이르렀을 때 최부일행이, "고우주의 석축 제방길이는 30리가량 되었다." 「표해록 권2, 2월24일」 회음역에 도착했을 때 최씨 일행은 범광, 보응, 백마호등을 거쳤다. "범수포로부터 여기까지….연이어져 있었다."「표해록 권2, 2월26일」 회안부를 거쳐갈 때 최씨일행은 회안입구에서 청강갑, 복흥갑, 신장갑등을 통과했다.「표해록 권2, 2월 27일」 "여량홍에 도착…대로 꼰 뱃줄로 끌어야하는데 소 열 마리에 해당하는 힘이라야 위로 끌어갈 수 있었다."「표해록 권2, 3월 2일」"백 보쯤 가니 홍이 있었다. 사, 수, 제, 문, 패 등 강물이 합류하고…뱃줄로 배를 묶어 끌어올렸다."「표해록 권2, 3월 3일」 표해록이 기술한 다성점 협구역 북쪽, 황가갑 미산의 만익비는 간단명료하고, 요령있게 명대의 강, 운하의 치수(治修)상황을 설명했다.「표해록 권2, 3월 5일」 비문은 사람들에게 대운하는 명나라 시기에 와서 물길이 기본적으로 정해짐으로써, 남북의 물자 및 문화교류의 대동맥으로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때 강, 운하치수(治修)의 중점은 양주, 회안, 서주, 제남 구간이었다. 명대 운하의 제방에 관해서도 표해록에서는 역시 상세하게 기술했다. "강물이 다량으로 쏟아지는 데에는 언과 파를 설치하고…어떤 데는 목책까지 있는 곳도 있다."「표해록 권3, 3월 5일」


  운하연안의 상업도시

  명나라 시기에는 도시가 전보다 한층 발전되었는데, 특히 동남연해지역, 강남지역, 남북 운하연안의 도시 발전이 더욱 빨랐다. 운하연안 도시에 대한 최씨의 기술은 역사와 지리, 유명인사 및 고적에 치중하였으나 하천과 운하교통의 혜택으로 상공업이 발전하게 된 상황도 기재했다.


  최씨일행이 연도에서 경유한 운하연안의 도시는 10여 개나 된다. 그 중 임청, 덕주, 천진 3도시는 행정구획이 현소재지거나 군소재지였다. 여기에 표해록에 기재된 항주, 소주, 양주, 회안, 임청, 덕주, 처진 등 운하연안의 도시에 대해서만 발췌하려한다.


  항주부, "동남에서 제일가는 도회지로서 화려한 가옥이…가무 탕객이 질탕하다"「표해록 권2, 2월 12일」 항주는 대운하 남단의 화물 집산 중심지였다. "온갖 돛대달린 선박이 빽빽이 정박하고 있었다." 라고 생동감있게 남북의 물산을 각처로 중계운송하는 곳이었던 항주를 묘사하고 있다. 표해록에서는 또한 오산역 일대를 실례로 들며 항주 주변 소도시들의 발전에 대해서도 묘사했는 데, 오산역 일대는, "10여 리에 이르며, 시내 상점들이 서로 접해있다." 덕승파 일대는, "온주, 처주, 엄주, 소흥, 영파 등까지는 절강 이남의 상선들이 집합하는 지방이어서, 돛대가 마치 뭉쳐 있는 것과 같았다."「표해록 권2, 2월 13일」 이것은 명나라 홍치년간의 도나쁜전이 주변 소도시의 발전을 이끌었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소주부는, "동쪽은 바다에 연하여 있고, 세 개의 강을 옆에 두고 다섯 개의 호수에 둘러싸여 있는 옥야천리이며, 사대부도 깊은 못에 물고기가 모이듯 많이 모여 있고 해륙진보와 사라능단, 금은주옥 및 백고기예와 부상대고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었다.", "상점이 별처럼 밀집되어있고 여러 강과 호수의 물이 종횡으로 흘러 교류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남방의 t아선들이 모여 운집하고 있었다."「표해록 권2, 2월 17일」 보대교에서 고소역에 이르기까지는, "양쪽 기슭에는 상점이 상접했고, 선박이 운집하여 있었다."「표해록 권2, 2월 16일」


  소주부에 대한 묘사에서 최부는 당시 비단과 수공예의 2개 항목의 주요 경제사업을 위주로 한 소주부의 상공업 발전모습을 개괄했다. 최부일행이 양주부를 경유할 때 배를 타고 지나갔으므로 물에 오르지 않았지만 최씨가 기재한 수정청, 세과국의 상황으로 보아 당시 양주의 상업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이로써 명조정부는 이 곳에 세수 징수기관을 설치했음을 알 수 있다.


  회안부는, "옛 성의 동쪽에 또 새로 성이 건축되어 있는데, 새로 건축된 성안에 대하위가 있고 그 외 다른 관아는 아직 설치되지 않고 있었다.", "남도문으로부터 북향하여 회하에 도착했다." 그 사이에, "공부창, 상영창, 조운부, 회남, 강북, 강남의 여러 위소는 모두 이 지대에 몰려 있었다. 또한 조선창도 설치되어 있었다."「표해록 권2, 2월 27일」 회안은 명초부터 남북조운에 연접한 교통의 중심으로 성의 경제발전은 운송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운송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서 명정부는 특별히 회안에 운송 감독소를 설치하여 운송사업을 감독했다. 뿐만 아니라 청강포에 상영창을 설치했다. 지폐청, 즉 각관은 민간 상세(商稅)를 징수하는 곳이다. 상로(商路)로서의 운하는 원활했다. 회안의 소금 및 대량의 남북 잡화교통은 모두 회안의 각관을 통화해야만 했다. 관영 조선창은 모두 회안부 청강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임청현은, "남경과 북경의 요충지로서 상인 및 여행하는 사람들이 폭주하는 곳이었다."「표해록 권2, 3월 14일」 여기에서 당시 임청도 역시 운하연안 남북화물의 집산지였음을 알 수 있다. 최씨 일행은 임청에서 출발하여 우연히 길에서 진기등 7명의 요동상인을 만났다. 덕주위는, "강이 성의 서북쪽을 둘러 흐르고 있었다.", "지역은 광대하고 인구는 조밀했으며 상인들이 폭주하는 곳이었다."「표해록 권2, 3월 18일」


덕주는 당시에도 남과 북을 왕래하는 교통의 요지 중의 하나였다. 당시 그곳에 건립된 것은 위성 즉 군사상의 요지로 성내에는 거주민이 없었다. 덕주로 몰려온 사람들은 모두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천진위는, "위하는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으로, 우리는 바로 이 위하를 따라 내려왔다. 백하는 북에서 남류하고 있는 강으로, 우리가 곧 위로 거슬러 올라 갈 강이었다. 두 강은 천진위성 동쪽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빠지고 있었다. 성은 두 강물이 합류하는 지점에 임하여 있고, 바다는 성의 동쪽으로 십여 리쯤 되는데 옛날에는 양자강과 황하이남의 운항은 모두 대해를 항해한 후 다시 여기 천진에서 모여 서울에 도달했다 한다. 지금은 운하가 개발되고 수문을 설치하여 개폐를 자유롭게 할 수 있고 선박교통도 어디든 통하고 있었다. 성안에는 수위사, 좌위, 우위가 있어서 해운업무를 맡고 있었다."「표해록 권2, 3월 24일」명대 영락 2년 천진에서 성을 건축하고 위를 설치했으며 천진이라는 이름으로 명해졌다. 홍치초년에 천진은 상공업 도시로 발전하는 중이었으며 그곳의 발전은 해운과 하운의 원활한 소통으로 얻어진 것이었다.


최씨가 표해록에서 천진이 도시로 발전할 수 있는 관건은 치수에 있다고 했는데 역사적 상황으로 보아 최부의 이 견해가 아주 타당했다고 할 수 있다.


     3. 명대 홍치초기의 시정풍정에 대한 기재


최부는 중국풍물에 대한 관찰에 유의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민속에 대해서도 매우 유의했다. 중국의 미풍양속에 대해 그는 일률적으로 논한 것이 아니라, "양자강으로써 남북이 나뉘어짐" 이라 하여 관찰하고 대비했다. 아래는 그가 몇개 지방을 중국의 남북풍속을 비교하여 서술한 것이다.「표해록 권3, 6월 4일」


「작성자 주: 중국의 남북풍속 비교 서술한 기재는 강진가 교수의 다른 하나의 논문 "표해록 재평"에 중복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본문을 생략합니다. 필요하신 분은 "표해록 재평"과 교양사에서 발행한 표해록 원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항목은 시내상범및 산물, 주택, 의복, 성격, 문화지식, 어로, 부녀자, 무기, 단장, 화폐, 종사업, 교통수단, 장례 등이 있습니다.」


최씨는 중국의 남북민속의 차이점을 비교했을뿐만아니라 그 공통점도 기술해 놓고 있다. "서로 같은 점은 귀신을 받들고 도교나 불교를 숭상하고 있는 점이다. 말할 때에 반드시 손을 흔드는 습관이 있고 화를 낼 때는 반드시 입을 찡그리고 게거품을 내면서 말을 하고 음식이 정갈치 못하고 서로 같은 그릇과 같은 상을 쓰고 있으며 젓가락도 제각기 일정한 것이 없어 돌려 쓰고 있었다. 이는 반드시 입에 넣어서 씹고, 절구통은 모두 돌로 만들었으며 맷돌을 가는 일은 노새나 소를 부리고 있었다. 시 주변 술집에는 술집이란 표지의 기를 세우고 행인들은 물건을 어깨에 메고 다니기는 하여도 머리에 이는 법은 없었으며 거의가 상업에 힘쓰고 있었다. 비록 관직을 가진 거족이라 하더라도 몸소 소매속에 저울을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하찮은 이해일지라도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관부에서는 일정한 형벌이 있기는 하나 곤장같은 것으로 다스릴 때에는 소인 등속이라고 손가락질 하면서 달아나곤 했다."


표해록은 연도에서 본 중국 남북민속의 다른 점을 서술식으로 기술했다. 이 기초적인 자료들은 두말할 것 없이 사실적인 것이다. 비록 주마간산식이었지만 어떤 것은 매우 자세히 관찰했다. 이를테면 강남의 여인복장들은 옷깃이 왼쪽으로 여며져 있고, 창주 이북의 복장의 옷깃은 오른쪽 혹은 왼쪽이었으며 통주 이후부터는 모두 오른쪽이었다. 그야말로 세심한 관찰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최부로부터 관찰된 유학사상의 조선에 대한 영향


최부의 자는 연연, 호는 금남이며 전라도 나주인이다. 1454(조선 단종 2년, 명 경태 5년)년에 출생, 24세 때에(1477년, 조선 성종 8년, 명 성화 13년)지사 3위로, 29세에 문과 을과 1위로 급제하여 교서관 저작, 박사, 군자감 주부, 성균관 전적, 사헌부 감찰, 홍문관 부수찬, 수찬을 역임했다. 33세에 문과 중시 을과에 1위로 급제 하였으며, 34세에 홍문관 부교리, 용마위 사과, 부사직, 관급 5품이었다. 동연 9월 추쇄경차관으로 제주에 부임하였다. 익년(1488, 조선 성종 19년, 명 홍치 원년) 윤정월 초3일에 부친상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향 하던 중, 불행히도 폭풍을 만나 17일에 중국 절강성 임해현 태주부에 표착, 왜구로 오인되었다. 계속되는 심사과정을 거친 후, 왜구로서의 혐의가 풀려 북경에 체송되었다. 6월 4일 압록강을 지나 조선으로 귀환한 후, 왕명을 받아 표해록을 찬술하니 나이 35세였다. 동년 7월 조선 국왕은 사신을 보내 명 조정부에 최부 등 43명을 귀환시킨데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성종강정대왕실록 무신 19년 7월 임술」


1492년(조선성종 23년, 명 홍치 5년)에 최부는 3년 탈상후 조선국왕 이강정을 알현했다. 국왕은 궁전에서 상세히 표류전말을 하문한 후, 찬탄하며 말하기를, "발섭사지(跋涉死地)에 국위선양을 발휘했다"며 옷과 신발을 하사하며 칭찬했다. 동년 최부는 서장관으로 사신을 따라 북경에 갔다. 그 후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홍문교리대관, 승문교리,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었고 부응교 및 예문관 응교로 승진되었다. 1496년(조선 연산군2년, 명 홍치 9년), 조선 호서(湖西)지방에 큰 가뭄이 들자 왕명으로 중국으로부터 배운 수차 제조법과 운용 방법을 가르쳤다. 제 2년에 질정관으로 다시 북경에 갔다. 1498년 "사화"가 일어나니, 최부는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당한다. 1504년(조선 연산군 10년)에 처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51세였다. 1506년(조선 연산 12년),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로 추증되었다.


최부의 저술은, 후세인(後世人)이 편집한 "금남문집"에 수록되었으며, 그 중 표해록이 있다. 표해록에서 그의 모든 행동은 유학사상에 기초를 두었음을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에 유입된 유학사상은 14세기초 고려왕조 후기와 조선왕조 초기를 거쳐서야 비로소 불교를 대신, 통치사상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씨조선 시기(1392-1910)는 유학을 대폭 흡입, 확장시켰다. 조선 이조시대에 통치적 지위를 누린 유학사상은, 선진(先秦)의 사상도 아니었으며, 한 대(漢代)의 사상도 아닌, 새로운 형태의 송명이학(宋明理學) 사상이었다. 조선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면 먼저 "소학", "가례"를 가르치며…치상거가(治喪居家)는 주문공가례를 따른다."「표해록 권3, 3월 29일」 "집집마다 모두 효(孝), 제(悌), 충(忠), 신(信)을 본분으로 삼는다."「표해록 권1, 1월 18일」 "사람들은 모두 집에 들어와서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을 공경하며 임금에 충성하고, 친구에 신의를 지킨다."「표해록 권2, 2월 11일」 "선비들은 경학궁리(經學窮理)를 업으로 삼고 있다." 「표해록 권2, 2월 17일」"사서오경을 공부하는데, 경서 하나만 가지고서는 유학자의 대열에 끼지 못한다."「표해록 권3, 4월 8일」 "불도를 이단시하고, 유도(儒道)를 존중한다."「표해록 권2, 2월 11일」 이러한 상황하에, 유학가정 출신인 최부는 어릴때부터 유학의 정통교육을 받았다. 사서오경을, "격치성정(格致誠精)의 학문으로 삼았으며,"「표해록 권1, 1월 19일」 유학자들이 신봉하는 "천리(天理)"의 윤리사상을 추구하고 실천하였다.


"천리"중 중요한 것은 "삼강(三綱)"이며, 그 중 군신, 부자관계는 주요 관건이었다. 최부는 상중인 동시에, 생사문제에 직면했으나 "천리"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않았다.


최씨등은 구사일생으로 영파지방에 표착하였으나, 적선을 만나 다시 해상에서 표류한다. 재차 태주지방에 표착, 배 6척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씨와 그의 부하는 아래와 같이 문답을 한다.「표해록 권1, 1월 16일」


  "관인(官人)의 위의를 보이지 않아, 도적을 불러들인 것같이 되어 죽을 뻔했다. 관대를 갖추고 저들에게 위의를 보여주시오."


  "자네는 왜 의를 훼손하는 일을 종용하고, 나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가."


  "이처럼 죽음이 코앞에 있는 마당에 어떻게 예의만 차립니까. 임기응변으로 살길을 찾은 후에 예의로 치상(治喪)한다고 해서 의를 해하는 길이 아닙니다."


  "상복을 벗는다는 것은 바로 길(吉)이기 때문에, 효(孝)가 아니다. 그리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차라리 죽음에 이를지언정, 효가 아니고 진실이 아닌 처신은 못한다. 바르게 처신하고, 그 다음 오는 일에 순응하겠다."


최부는 위험을 만나 이국땅에 갔지만, 의연하게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라 소복차림으로 음주를 하지않고 육류를 먹지 않았다. 그리고 삿갓을 쓰고 상관(喪冠)을 하였는데 이는 하늘을 우러러볼 수 없으며, 피눈물의 마음을 견지(堅持)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북경에서 상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복을 입어야 하는 바, 이 일이 그를 궁지에 빠트렸다. "상중의 몸이나 길복은 예에 맞지 않으며, 상복을 입조함도 예의상 어긋난다."「표해록 권3, 4월 18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상을 받을 때에는 예의 절차가 없어, 남이 대신 받을 수 있으나, 사은 때에는 반드시 직접 황제에게 친배하여야 했다. 최씨는 비록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사세(事勢)의 핍밥으로 길복을 입고 장안문으로 입궐하였다. 예식이 끝난 후에 다시 상복을 갈아입고 입궐한 문으로 나왔다. 해상에서 표류시, "모진 풍랑을 겪으며 살갗이 이처럼 회복되지 않고, 발이 벗겨졌다." 그는, "신체발부, 효지시야(身體髮膚 孝之始也)"「표해록 권2, 2월 9일」라는 효경(孝經)의 한 구절을 지적하며 슬퍼했다.


  孝와 忠은 統一的이다. 효경의 제 1장에서 개종명의(開宗明義)는, "夫孝, 始于事親, 中于事君, 終于立身"이라 말했다. 효도의 전 과정에서 移孝作忠, 奉事君主, 服務國家를 최상의 효행으로 보았다. 최씨는 유가경전을 근거로 하여, 효와 충을,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는 말이 있다. 어버이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사람이 임금에게 충성을 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표해록 권1, 1월 22일」라고 생각했다. 종법제(宗法制)를 기초로 하는 봉건사회에 있어서, 군주는 바로 국가를 대표하였고, 충군(忠君)은 애국을 표시하며 일체의 공덕은 모두 군주에게 속하는 것이다. 최부는 명나라 황제의 상을 받은 것은, 조선 국왕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황제가 우리에게 시상한 것은 우리 국왕이 외천사대지덕(畏天事大之德)이 아니었든들 자네들이 이러한 영광된 자리에 이를 수 있겠는가. 우리 국왕의 덕을 잊지 말아야 한다."「표해록 권3, 4월 20일」라고 부하들에게 특별히 강조했다. 최부는 孝親하였을 뿐만 아니라, 군주에게 더욱 충성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국왕의 성까지도 다른 사람에게 경솔히 말하지 않았다. "나라밖에 있으니 괜찮다." 라며 유도질문을 하였으나 최부는, "신하된 자, 나라밖에 있다 하더라도 나라를 배신하고, 그 행동을 달리하며 그 말함에 변함이 있어서는 안된다."「표해록 권1, 1월 22일」라고 말했는데, 이 언행은 바로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상을 집중적으로 표현하였고 상사에게 복종하는 儀式, 情感 및 心理의 표시이다. 그러나 최부는 결코 어리석은 우충지사(愚忠之士)는 아니었다. 그는 나라를 위해, 일생동안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분투하였고, 여러차례 忠言을 서슴치 않으면서 대의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다.


유학의 경국치세(經國治世) 개념은 역사적 사명감과 사회적 책임감이다.

최부는 비상 상황하에서도 이 관념을 견지하였다. 그는 과거에 본국인이 중국 강남을 직접 가본 일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강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느끼며 강남에 표류하게 된 것을 좋은 기회로 삼았다. 그는 연도를 따라서 여행하며 세심한 고찰을 하였고, 또한 4명의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매일 기록하게 하였다. 명 홍치초년의 중국 장강 남북의 정황에 대한 그의 기술은 얻기 어려운 제일류의 자료였다. 특히, 중국 강남의 水車는 조선에 전해졌는데, 이는 그의 큰 공로였다. 명 홍치년간 남부지역에서 농부가 사용했던 수차는, 힘이 적게들고, 물을 많이 끌어올릴 수가 있어서, 논이 많고 가뭄이 자주 드는 조선에 유익하고 적합하였다. 그는 수차의 형태, 제조법, 재료, 사용법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했다. 「표해록, 권2, 3월 23일」 귀국후, 남부 지방에 가뭄의 피해가 크자, 왕명으로 내려가 수차의 제조방법과 운용방법을 농민에게 가르침으로써 가뭄을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成宗康靖大王實錄, 무신 19년(1488) 6월 丙辰」


經國治世와 관련, 유학에 있어서 국가품위는, 군주의 명을 받들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데에 있다. 최부는 외국에서도 이를 실천했다. 구사일생으로 표착했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최부는 부하들에게, "우리나라는 원래 예의지국이다. 비록 분상중에 표류되어 군색하고 당황중이라 하더라도 예의와 위의를 보여 이 지방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예절을 알도록 해야 한다."「표해록 권1, 1월 17일」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들은 경우에 따라 직위와 직급에 따라 절을 하게하고, 마을이나 성에 도착하여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읍례를 하도록 했다. 한번은 지방군리가 수행원중 한 사람을 구타하였는데, 최부는 관인에게 이를 보고, 치죄케 하였다.「표해록 권1, 2월 4일」 최부는 죄를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국 관원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와 같은 타국인에 대해서도 법을 가지고 처리해야할 것이며, 더욱이 우리 군인들은 타국에서 언어와 습관이 불통하여 실로 맹아와 같은데, 비록 실수가 좀 있다 하더라도 가련하게 여겨 타이를 일이지, 도리어 때려서 상처를 입게하는 행동은 우리를 호송하는 관인으로 도리가 아니다."라고 힐책하기도 했다.「표해록 권2, 2월 24일」 최부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를 지냈다. 그가 군량(軍糧) 관계에 대해 질문을 받자, 그 문제는 군사기밀과 연관된다고 생각하여, 자신은 儒臣이며, 군자감 주부를 재임한지 한 달만에 전임되었으므로 그 상황은 잘 모른다고 핑계를 댔다. 그의 대답은,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문제를 교묘하게 피했던 것이다. 이처럼, 최부는 국가의 이익과 존엄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입신행사(立身行事)의 기준으로 삼았다.


최부는 正道를 걷는 선비였다. 품행과 절개를 중히 여기고, 처신을 단정히 하였다. 절강성의 봉화 연산역에서 폭행 당했을 때, 동행한 관인이, 의류 꾸러미까지 약탈당했다는 내용을 현령에 고발하겠다는 말에, 최부는, "약탈당하지도 않은 물건을 강탈당했다고 무고하여 죄없는 사람을 벌받게 하면 사리에 어긋나고, 우리를 보호하는 것은 좋으나,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데 공갈하면, 갈중침포죄(喝衆侵暴罪)가 되니 하지 않는게 좋다."「표해록 권2, 2월 25일」면서 강직한 인품을 나타냈다.


格(物), 致(知), 誠(意), 正(心)으로 학문을 삼고있는 최씨는 가는 곳마다, 유학의 道에 따라 행동을 하였다. 유학사상이 조선에 미친 영향은 최부를 통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최부는 여행가가 아니었다. 그는 예측하지 못한 폭풍을 만나 중국에 표착한 것이다. 비록 이탈리아 여행가인 마르코폴로처럼 먼 길을 고생하며 동방에 온 것도 아니고, 일본 승려 엔닌(圓仁)이 당나라에 와서 겪은 고난과 위험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더욱이 마로코폴로나 엔닌과는 달리 최씨에게는 아무런 물적, 정신적 준비도 없었다. 엔닌은 고승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와서 성지를 순례하며 불법을 탐구하였고, 마로코폴로는 원나라에 와서 유람도 하였고 객경으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최부의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그는 우선 왜구로 오인받았다가 여러급의 심사를 거친 후,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다고 인정은 받았지만, 표류자였으므로 규정된 시간과 여정에 따라 관원의 호송하에 귀국하는 수 밖에 없었다. 시간상으로, 마르코폴로는 17년간 유람하였고, 원인이 중국에서 성지순례하며 불법을 탐구한 기간도 9년 7개월이나 된다. 그러나 최씨가 중국에 체류한 시간은 단지 136일로 그들의 체류기간의 끝자리 수도 안되며, 또한 그 대부분을 여정으로 보냈다. 이처럼 어려운 조건하에서, 최부가 광범한 내용의 장편 기행문을 썼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엔닌은 고승이었고, 마르코폴로는 여행가였지만, 최부는 바로 유가사상에 귀의한 사대부였다. 만일 견인불발의 정신이 그들의 사업 성취의 공통적인 품성이었다면 유학을 신봉하고, 그것을 실천한 최씨의 사명감과 사회 참여의식은 훨씬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의 역사문화에 대해, 최씨는 엔닌보다 숙지하였고, 마르코폴로보다 더욱 정통했던 것이다. 참증적 자료가치가 있는 최부의 표해록은 "당나라 불법탐구 여정기", "마르코폴로 여행기"에 이어 외국인이 중국의 상황을 기술한 또 하나의 중요한 고서임에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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