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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조회 4445
이 글은 8년 전 (2017/9/05) 게시물이에요







[고르기] 아련한 짝사랑 고르기 | 인스티즈




1.



비가 내린다. 그럼, 한 사람도 날 찾아온다.







"잘 있었어?"



그 날처럼, 촌스러운 체크무늬 셔츠에 다리미로 금방 다린듯한 빳빳한 파란 바지.

어쩜 이렇게 사람이 어수룩하고, 때묻지 않아 보일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그를 사랑했던 수많은 이유 중 하나 였을것이다.




"응, 네가 오기 전까진."




사실이다. 불과 몇 분 전 바꾼 현관문 비밀번호를 그가 자연스럽게 누르고 들어오기 전까지,

난 순간순간 방 안을 환하게 만드는 천둥과 거센 비소리에 어쩐지 행복해 하고 있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 때문인지, 창문 틈사이로 스며든 차가운 공기에 몸이 미세히 떨려오는 것을 느끼곤

당장 부엌으로 가 따뜻하고 달콤한 핫초코를 마시며 몸을 덥히는 것이 어떨까. 즐거운 고민도 했다.




"보고싶었어."





그는 냉랭한 내 대답에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오랫동안 깎지 않아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한 눈웃음만을 지을 뿐이다.

슬픈 일이다. 오랜 시간 거치며 변하고 바랜 상대의 마음을 눈치챌 수 없다는 건.




"언제까지 올거야? 난 더이상 네가 보고 싶지 않아."

"정말 보고싶었어."



그가 한 번더 그 말을 힘주어 말하고 날 터질듯 꽉 끌어안았지만, 난 아무런 온기도 느낌도 들지 않는다.

그만이 감정을 느끼고 행복해한다. 우습다. 난 그에게 꽉 안겨진 채로 그의 목덜미에 있는,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커다란 상처를 가만히 바라본다. 언제까지 이런 상처를 방치해 둘 생각이야? 나지막이 건네는 내 말에 그는 또다시 무반응이다.

[고르기] 아련한 짝사랑 고르기 | 인스티즈





"당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야."



그가 들고온 상자의 뚜껑을 조심스레 열자, 거기서 기다렸다는 듯 헥헥 숨을 내쉬며 내게로 뛰어오는 북실북실한, 진한 초콜렛 색깔을 지닌 강아지 한 마리. 종이 박스 사이로 스며든 물기가 찝찝했던지, 오던 도중 자기 몸을 와르르 털어내곤 다시 꼬리를 열심히 흔들어대며 정신없이 뛰어온다. 난 그것이 오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물기로 엉겨붙은 털을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이젠, 그에게 이별을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이미 너무 늦어 버렸지만.



"...이제 더이상 나를 찾아오지마."



제발, 부탁이야.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 가지고 온 상자 안을 뒤적이는 그에게 제대로 들으란듯, 다시 힘주어 말했다.

그러자 그가 거짓말처럼 내 눈 앞에서 사라진다. 마치 공기 저편으로 날아가버린 듯, 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좀 전까지 열심히 꼬릴 흔들어대던 활발한 모습이 아닌, 어딘가 아프고 지쳐 낑낑거리는, 그가 주고 간 강아지만이 이 공간 안에 남았다. 그 잠깐 사이, 그 강아지는 무척 늙은 듯 보인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눈 대신 발달한 코를 킁킁대며 나에게 다가온다.  "끼잉..." 내 맨다리에 촉촉한 코를 부비는 강아지는 내가 그가 찾던 것이 아니었던 듯 곧바로 나를 지나쳐 거실 구석에 놓인 종이상자를 작은 발톱으로 바스락대며 긁는다.


마침내, 그것의 뚜껑이 열려 그곳에 배여있던 향이 이곳까지 날아온다


그의 향. 이젠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그의 향.

십수년이 흘렀다. 무려 16년이라는 시간이었다.


"너까지, 그러는거야?"



이런 멍청한 짓은 나 혼자로도 충분해. 하지만 홀린듯 초콜릿색의, 늙은 강아지가 연 상자로 가까이 다가선다. 그곳엔 그와의 추억이 담긴 유품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가 아끼던 몇 권의 책도. 이제껏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다. 이런 매개물 없이도 그와의 기억은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분명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볼썽사나운 눈물을 뚝뚝 흘려낼 것이 분명했으니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건 그와 내가 볼을 부비며 장난스럽게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다. 그 액자의 뒷면에는, 우리의 오랜 우정에 대한 시가 그의 익숙한 필체로 쓰여져 있다. 멍청한 사람. 우정이라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 다음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지금처럼 늦은 밤, 맥주병을 기울이며 야한 농담을 주고받자. 그런 시시껄렁한 농담이 적힌 수많은 쪽지들. 얜 이런걸 다 모아뒀단 말이야? 조금 무서운데. 하지만 그런 사소한 쪽지를 하나하나 펼쳐, 한 글자도 빠짐없이 읽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내 눈가와 볼가는 이미 끝없이 쉴새없이 흘러내린 눈물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리웠다. 지금도, 16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가 그리웠다. 미치도록 그리웠다. 지금처럼 마치 하늘이 화난 것처럼 거세게 비가 몰아치던날 밤. 예고도 없이 내 곁을 떠나간 그는, 마치 그가 떠나고 밤낮 가릴 것 없이 괴로워하고 외로워하던 날 위로해주려는듯 비가 내리는 날 저녁이면 항상 날 찾아왔다. 처음엔 놀랍고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더 큰 감정이 그것을 억눌렀던 것 같다. 그와 알고 지냈던 오랜 시간, 난 일방적인 사랑을 했다. 드러내면 곧바로 더 큰 것을 잃을 것이란 걸 알았기에, 들키지 않게 나만이 아는 비밀로 아주 조금씩, 정말로 견고하게 쌓아온 것이었다. 그래서 더 지워내기 힘들었다. 그가 떠났다는 사실을, 그가 이젠 내 곁에 없다는 현실을. 하지만 오늘 영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내 진한 짝사랑으로 인해 생겨난 허상인걸까? 난 그 존재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젠 정말로 그를 보낼 때가 됐어."



마지막으로 남은 그가 즐겨 읽던 책들. 닳고 손때 묻은 표지와 페이지를 대충 넘기자, 마치 강아지를 받았던 그 순간 처럼 서프라이즈 선물을 보여주듯, 책의 중반부쯤일까. 한 페이지에 깊숙히 꽂혀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 역시 이 책의 표지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들여다본 것인지, 손때로 잔뜩 더럽혀져 있었다.



뒷면에 쓰여진, 사랑에 대해 간결히 쓴 시를 읽고 난 후 그 앞면을 확인하는 순간.

간신히 멈추었던 눈물이, 이젠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그를 보며 환하게 웃음 지어보였던, 과거의 내가 그곳에 있었다.






2.



벚꽃이 눈처럼 흩뿌려진다. 난 그 중 꽃잎 하나를 손에 쥐고 싶어 이리저리 몸을 날린다.

왜, 그런 속설이 있잖은가. 이렇게 흩날리는 벚꽃잎 중 하나라도 손에 쥐게 된다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고르기] 아련한 짝사랑 고르기 | 인스티즈


"그렇게 연애가 하고싶어?"




응, 너랑. 너랑 하고싶어서 이러는거다 멍청아. 어느샌가 꽃잎을 잡으려 날뛰는 내 옆으로 슬며시 다가와 그런 내가 웃기다는 듯 보조개 패인 웃음을 환하게 지어보이는 사람. 난 그가 좋다. 오래전 부터, 쭉 그 감정을 간직했다. 하지만 멍청하게 감정을 숨기고, 전혀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래서 이런 미신에나 내 마음을 기대는 거다. 내가 자신이 없으니까.




"원래 그런건 일부러 잡으려고 하면 안돼. 저절로 떨어져야 되는거지."

"...나도 알거든? 근데 안 떨어지니까 이러는거 아냐."



사랑은 노력해서, 쟁취하는거라고. 사실 이런 말 할 자격 없는 거 알지만, 그래도 맞는 말 하는 네가 왠지 얄미워져서. 괜히 부루퉁하게 대꾸했다. 내가 자신의 말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는 걸 느낀건지,




"그래, 노력하면 이루어질거다. 나처럼."




뒤에 '나처럼.' 그 말을 꼭 붙여야 했을까. 오늘따라 내 곁에서 나란히 따라 걷는 그의 손에 끼워진, 은색의 가느다란. 그 반지가 무척 거슬린다. 아주. 그가 그 반지를 끼게 된 건 며칠 되지 않은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난 그보다 먼저 그를 좋아했다. 뭔가 그 점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사실이었다. 내가,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하지만 이 생각이 멍청한 생각이란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괴롭다. 슬프다.



"어? 잠깐만. 그럼 뭐,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보네 지금?"

"지금이 아니라, 아주 오래 됐거든?"

"헐~누군데? 내가 어떻게 그걸 모르지?"



"너는 너무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알려고 그래. 이런건 좀~몰라도 된다고. "



"뭐야 그 반응은. 설마 나야?"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그 애가 나야?라고 하는 순간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순식간에 내 얼굴은 홍시의 그 색깔처럼 확확 달아올랐다. 창피함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내 마음을 눈치챘다는 것에 대한 두근거림 때문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지금 이 순간 내가 오롯이 느껴지는 건 당황스러울정도로 쿵쾅대는 내 심장소리였다. 정말이지, 이 진동과 소리는 내 몸 어느곳에서든 똑같은 진동과 소리를 느낄 수 있을것 같다.


  그는 내가 당황스러울 때, 거짓말 할 때의 반응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늘 불만스럽게 생각한 점이지만. 하필이면 이럴 때.



"야...너...너 다 알면서 왜 그래."


"뭘?"



알잖아. 나 얼마전에 그 선배한테 고백한 거...그리고 사귀기 시작한 거.



"응, 알지."



근데...너 지금 반응이 꼭...그렇잖아.



"응, 알아."



응, 아니까 그만해.



그리고, 난 학교로 가던 발걸음을 돌려 곧장 집을 향했다.

도저히 그 애의 옆에 더는 있을 수 없었다. 부끄럽다기 보다 그냥 멍했다.

그리고 내 방에 틀어박혀 울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이런 식으로 끝맺어지는 거였다면, 너무 비참하잖아.

그냥 혼자 좋아하는 내 감정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좋아하면 뭐해? 상대는 알지를 못하는데. 상대는 신경쓰지도 않는데. 상대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데. 상대는 나를 봐주지 않는데.



짝'사랑'을 감히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걸까?

그냥, 혼자 하는 상상에 불과한 것 같아.

그냥, 혼자만의 생각.



난 그 날 새벽까지 울다 지쳐 잠드려다, 베개 밑에 있던 휴대폰이 방금 온 카톡에 환한 빛을 내는 것을 보았다.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한 장문의 카톡. 너랑은 오랜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들.




아까는 그냥...네 말에 당황해서 그런거였어. 신경쓰지마.







그렇게 답장을 보냈다.


'대체 네가 미안할게 뭔데?'


그렇게 내 짝사랑은 끝났다.








*





 쓰고보니까 .... 딱히 고르고 싶지 않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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