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고구려에 대해 우리는 광개토태왕의 정복 이후 강국이 되었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국초부터 강력한 나라였다. 이는 『삼국사기』, 중국사서를 통해 증명할 수 있다. 고구려는 추모성왕이 나라를 건국한 이후 사방으로 정복활동을 펼쳤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조차 막기에 버거웠던 말갈을 건국하자마자 가볍게 정복한 나라였다. 더군다나 고구려에는 좌식자가 1만여 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좌식자가 군사귀족이라는 견해가 있다. 군사귀족이 1만여 명이라는 건 고구려가 군사강국이라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고구려는 2대 유리명왕 때 사나운 선비족을 정복하였다.
11년 4월에 왕이 군신(群臣)에게 일러 가로되, "선비(鮮卑)가 험(險)을 믿고 우리와 화친(和親)치 아니하려 하며, 이로우면 나가 노략하고 불리(不利)하면 들어가 지키어 우리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누구든지) 능히 이를 꺾는 사람이 있으면 내 장차 후한 상을 주리라" 하였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아가 말하기를, "선비(鮮卑)는 험고(險固)한 나라요 그들은 용맹하고도 어리석어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고 꾀로 항복받긴 쉽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본국(本國:고구려)을 배반(背反)하고 저 곳에 가서 거짓말로, '우리는 땅이 작고 군사가 약하여 겁내어 움직이기를 싫어한다' 하면 선비(鮮卑)는 반드시 우리를 쉽게 여기고 방비(防備)를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신(臣)은 그 틈을 타서 (精兵)을 이끌고 샛길로 가서 산림(山林)에 숨어서 그 성(城)을 엿보겠사오니, 또 왕이 약한 군사로 하여금 그 성(城) 남쪽에 나타나게 하면 그들은 반드시 성을 비워 놓고 멀리 쫓아 나올 것입니다. (그러할 때) 신(臣)이 (精兵)을 달려 그 성으로 들어가고 왕은 친히 용기(勇騎)를 거느리고 이를 협격(挾擊)하면 가히 이길 수 있습니다" 하니 왕이 그 말대로 하였더니 선비(鮮卑)가 과연 문을 열고 군사를 내어 쫓는지라 부분노(扶芬奴)가 군사를 달리어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鮮卑)는 (이를) 바라보고 크게 놀라 돌이켜 달려왔다. 부분노(扶芬奴)가 關[관:險(험)]에 임(臨)하여 싸워 적을 많이 죽였다. 왕이 旗(기)를 들고 북을 울리며 나오니 선비(鮮卑)는 앞뒤로 적(敵)을 받아 계교가 다하고 힘이 빠져 항복을 하고 속국(屬國)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扶芬奴)의 功(공)을 생각하여 식읍(食邑)을 상으로 주니 사양해 말하기를, "이는 왕의 덕(德)이어늘 신(臣)이 무슨 공(功)이 있다 하겠습니까" 하고 마침내 받지 아니하므로 왕이 (대신) 황금(黃金) 3천근과 좋은 말 10필을 하사(下賜)하였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유리왕 11년
위 기록은 고구려 유리왕 11년인 BC 9년에 고구려와 선비가 접촉한 최초의 기록이다. 선비는 동호에서 분파된 종족으로 동호가 흉노의 공격을 받고 무너지자 동호에서 갈라져나온 민족이 오환과 선비다. 선비는 시라무렌 강 부근에서 유목의 전통을 고수한 호전적인 기마민족이었다. 반간계를 사용하여 선비를 굴복켰지만, 이런 선비를 굴복시킨 것을 보면 고구려 역시 전투에 능한 기마민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기마민족 답게 중국 내지까지 진공한다.
2년 봄에 왕이 장수를 보내어 한(漢)의 우북평(右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侵襲(침습)케 하더니 (한의) 요동태수(遼東太守) 채동(蔡彤)이 은의(恩誼)와 신의(信義)로써 우리에게 대하므로 다시 (한과) 화친하였다.
『삼국사기』권14「고구려본기」모본왕 2년
한 줄 밖에 안되는 기록이지만,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북평, 어양, 상곡은 지금의 북경 인근지역이고, 태원은 산서성의 중심도시다. 고구려가 산서성까지 공략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강력한 군사를 보유했다는 것이 아닐까? 은의와 신의로써 대하기 때문에 화친했다는 기록은 아마 삼국사기가 중국측 사료를 보고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걸 감안해보면 은의와 신의로 대했다는 것은 한나라가 고구려의 공격에 놀라 애걸복걸하며 군사를 거두어달라는 뜻으로 해석해도 좋지 않을까? 아마 고구려는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함으로써 한나라로부터 침공하지 말라는 의미로 막대한 보상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고구려가 공략한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것이다. 이는 태조왕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3년 2월에 요서(遼西)에 10성(城)을 쌓아 한병(漢兵)을 방비하였다.
『삼국사기』권15「고구려본기」태조왕 3년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대비했다는 기록이다. 이 기록은 고구려가 요서를 차지하여 그 곳에 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요서를 차지했다면 언제 차지했을까? 그건 앞서 모본왕 때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습격한 기사로 미루어보아 모본왕 때 요서를 차지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태조대왕은 일생을 한나라와 싸운 임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재위 기록을 보면 한나라와의 전투 기록이 많다. 그런데 태조대왕 때 고구려가 선비와 함께 한나라를 공략한 기록이 보인다.
4월에 왕이 선비(鮮卑) 8,000명을 데리고 (요동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니,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에서 싸우다 죽었다. (그 부하)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과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는 몸소 풍(諷)을 위하여 막다가 함께 몰진(歿陣)하고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삼국사기』권15「고구려본기」태조왕 69년
태조대왕 시기 선비족은 흉노의 세력이 약화되자 몽골초원의 강자로 급부상한다. 한 영녕 원년인 120년 요서 선비의 대인 오륜과 기지건이 후한 안제로부터 작위를 받을 정도로 선비는 후한조차 두려워하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121년 4월 고구려 태조대왕이 선비 8,000명을 거느리고 요동의 요대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 공조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를 전사시킨 사실은 의미가 크다. 왜냐하면 북아시아의 헤게모니가 흉노에서 선비로 넘어간 상황에서 고구려 태조대왕이 선비 8,000명을 거느리고 한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것... 이는 태조대왕 시기 고구려 국력이 몽골고원을 석권한 선비와 대등했다는 것과 통한다. 아니 이는 고구려가 태조대왕 재위 시 선비를 휘하에 두었다는 것이 아닐까?
고구려는 후한을 공략할 정도로 강력하였다. 거대한 후한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공세를 취하는 입장이었다. 고구려 태조대왕 시기 고구려는 후한을 압도한 듯 싶다. 고구려가 후한을 하도많이 공격하여 후한의 변경을 초토화시키고 후한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자, 후한의 안제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발표한다.
"선비와 고구려는 해마다 노략질하여 백성을 잡아가 그 수가 수천 명이 되었는데, 이제 겨우 수십 명만을 보내왔다. ……지금 이후 변경을 공격하지 않고, 스스로 와서 포로를 돌려보내면 한 사람당 비단 40필을 주고 어린이는 어른의 반에 해당하는 금전을 주겠다"
중국측 기록에 의거한 것이라 다소 후한이 고압적으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다르다. 고구려가 후한을 자주 공격하자, 후한에서 그만 공격을 멈추고 잡아간 포로들을 돌려주면 금전을 주겠다고 애걸복걸하는 상황이라 보는 것이 합당할 듯 싶다.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자국의 지방정권이라 우기고 있다. 하지만 후한을 상대로 밀리지 않고 강력한 국가를 자랑한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 될 수 있을까? 국초부터 강력한 고구려가 굳이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들어갈 이유는 없다. 우리가 고구려를 노래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고구려가 강력한 국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국초부터 강력한 힘을 보유한 군사강국이었다.
참고
김용만,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바다출판사, 1999
지배선, 「고구려 광개토왕의 연군침공원인에 대하여」, 『백산학보』 83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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